2012년 5월 31일 목요일

4. 순자: 인도人道, 성악性惡, 인의법정仁義法正, 변화變化, 허일이정虛壹而靜

1. 역사적 맥락에서 본 순자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따르면 순자荀子(B.C298)는 전국시대 말기 조趙나라 사람이다. 순자의 이름은 황況이고 자는 경卿이다. 순경荀卿은 쉰 살이 넘어서 제濟나라에 유학했다. 순경은 제濟나라에서 이름을 떨쳤으나 참소를 받고 초楚나라로 가게 되었다. 초楚나라 춘신군은 순경을 난릉蘭陵의 장군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춘신군이 사망하자 순경도 면직되었지만 그대로 난릉에 머물렀다. 얼마후 순경의 제자 이사李斯는 진秦나라의 재상이 되었다. 순경은 세상의 정치가 혼탁해지고 무도한 군주들이 나타나 대도大道를 좇지않고 무당들에 현혹되어 귀신의 복을 빌고, 유생들이 천박해지고 장주莊周같은 학자들이 가치체게를 어지럽히고 사회기풍을 문란시키는 것을 보면서 현실을 한탄하였다. 순경은 유가 묵가 도덕가의 사상을 체계적으로 저술한 후 B.C.238년 난릉에서 타계하였다.


2. 순자의 맹자 비판

알다시피, 맹자는 공자를 숭상하였다. 순자 또한 공자를 숭상하였다. 순자는 공자와 그의 제자들을 칭송하며 말하기를 "그들은 치국의 방책을 마련하고 언행을 일치하고 개별과 보편을 통일하고 천하天下의 영재들을 끌어모아 대도大道를 일깨우고 순리順理를 가르쳤으며, 항상 성왕聖王의 가르침을 보존하며 태평성세의 습속을 일으켰다."고 하였다. 또 순자는 공자를 칭송하면서 말하기를 "편견을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의 인식체계는 도道의 전모를 깨달을 수 없다. 따라서 도道의 일면 만을 본 인간은 자신을 혼란에 빠뜨리고 타인을 미혹하고, 윗사람을 가리우고 아랫사람 또한 가리운다. 그러나 공자는 인仁으로서 지식을 터득하고 슬기로워 막힘이 없었다. 통치에 대한 공자의 학술은 선왕先王에 비해서 손색이 없었고 주도周道의 핵심을 잘 파악하고 널리 전파하였다. 공자의 덕德은 주공周公에 비견될만하고 그의 이름은 삼왕과 더불어 나란하게 되었으니 그것은 그의 막힘없는 복福에 기인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순자는 공자의 학문學文을 높이 평가했다. 반면에 맹자는 공자의 덕德을 높이 평가한 것이었다. 순자筍子는 자사子思와 맹자를 비난하면서 말하기를 "그들은 선왕들의 근본정신을 무시한 채 지엽적인 것만을 갖고 오행五行을 창설하였다. 이 새 학설은 기묘하고 모순되어 기준이 없고 논리적 근거가 약하여 난삽하다. 그들의 학설은 어리석은 유생들을 유혹하고 있으니 이것이 바로 자사와 맹자의 죄이다."라고 하였다. 윌리암 제임스에 따르면 철학자는 그 기질에 따라 강경파와 온건파로 나누어진다. 플라톤은 온건파를 대표하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강경파를 대표한다. 순자는 강경파로서 유물적 성향이었다. 반면에 맹자는 온건파로서 유심론적 성향이었다. 재미있게도, 전국시대 유가의 맹자, 순자 두 학파의 쟁론은 송명시대 신유가의 정주程朱, 육왕陸王 두 학파의 쟁론과 비슷하다.


3. 순자와 주도周道

순자는 주周나라 문화를 옹호하면서 말하기를 "왕제王制의 도道는 하, 은, 주 삼대三代를 벗어나지 않으며 그 법法은 후왕後王과 다르지 않다. 도道는 삼대三代를 벗어나면 황당하고 법도法道는 후왕後王과 다르면 부정하다. 의복에도 규정이 있고 건축에도 법도가 있다. 아전들도 차등이 있고 상례나 제례에도 등급과 법식이 있다. 음악과 색채, 기물은 전통에 비추어 바른 것이 아니면 모두 폐기하니 이것을 두고 복고復古라고 한다. 이 복고가 곧 왕제王制이다."라고 하였다. 공자는 주周의 제도를 옹호한 만큼 늘 문왕文王과 주공周公을 언급하였다. 재미있게도 묵자墨子는 주周문화에 반발하여 하夏문화를 본받으면서 우禹왕을 내세웠고 문왕과 주공을 하시보았다. 이어서 등장한 맹자는 더 오래된 요堯, 순舜을 내세워 우왕禹王을 하시보았다. 또 노장老莊의 문도들은 더 오래된 전설상의 인물을 내세워 요, 순을 하시보았다. 순자 시대에 이르러서야 문왕과 주공은 후왕後王으로서, 그리고 주도周道는 후왕後王의 법法으로서 인식되었다.


4. 신天, 성性

공자의 신天은 주재지천主宰之天이고 맹자의 신天은 주재지천, 운명지천運命之天, 의리지천義理之天이었다. 반면에 순자의 신天은 자연지천自然之天이다. 순자의 신天 개념은 노장의 사상에서 비롯되었다. <장자>에 따르면 천지일월의 운행은 기계적이고 부득이한 바, 그 돌고 도는 운행이 저절로 그칠 수 없는 것이락 하였다. 이러한 노장의 자연주의적 우주관은 순자에게 영향을 주었다. 순자는 말하기를 "신의 운행天行은 영원불변하여 사회에 선인善人이 있어서 생성하는 것도 아니고 사회에 악인惡人이 있어서 소멸하는 것도 아니다. 안정으로 신의 도天道에 응하면 길하고 혼란으로 신의 도天道에 응하면 흉할 따름이다. 따라서 신天과 인간 간의 직분을 명확히 인식한다면 가히 지인至人이라 할 수 있다. 작위하지 않으나 성취하고, 추구하지 않으나 획득하는 것을 가리켜 신의 직무天職라고 한다."고 하였다. 즉, 자연계의 법칙은 인간사회의 법칙으로부터 독립해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종교에서 말하는 신비주의적 천인감응설天人感應說은 순자에게는 완전히 허구이다. 순자는 말하기를 "신天은 인간이 추위를 싫어한다고 해서 겨울을 물리치지 않으며 인간이 먼 거리를 싫어한다고 해서 광야를 좁히지 않는다."고 하였다. 순자의 신天은 자연지천自然之天으로서 도덕적, 인격적 신이 아니다. 반면에 맹자는 의리지천義理之天을 말하면서 인간의 성性을 신天의 부여한 것으로서 보았으므로 신天은 성선설의 형이상학적 근거였다. 그러나 순자는 인간본성과 관련하여 말하기를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 인간이 선善하게 됨은 위僞 덕분이다."라고 하였다. 위僞란 훈련을 말한다. 순자는 성性과 위僞를 구별하면서 말하기를 "배울 수도 없고 도모할 수도 없는 천성天性적인 것을 성性이라 하고 배워서 얻을 수 있고 도모하여 성취할 수 있는 인위적인 것을 위僞라 한다."고 하였다. 순자는 말하기를 "성性은 본태적인 질료이고 위僞는 가공된 문례文禮이다. 성性이 없으면 위僞를 가할 데가 없고 위僞를 가하지 않으면 성性은 스스로 아름다워질 수 없다."고 하였다. 성性은 신天에 속한 것이다. 신天은 영원불변하지만 도덕적 원리가 없다. 따라서 성性에도 도덕적 원리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도덕은 인위적인 것, 즉 위僞이다. 이것이 순자의 포인트이다. 순자는 말하기를 "인간의 성性은 날 때부터 이익을 좋아하는 바 투쟁이 발생하고 사양지심이 없다. 이 성性을 좇기 때문에 질투와 증오심으로 남을 해치고 비방하므로 충직과 도덕은 사라진다. 이 성性 때문에 눈과 귀는 고운 색과 고운 목소리를 좋아하고, 때문에 음란이 발생하고 예의문리禮義文理(예절, 정의, 관습, 도리)는 사라진다. 그런즉, 본래의 성性을 따르고 정情을 좇으면 반드시 투쟁이 발생하고 신분질서가 무너지고 사회기강이 문란하게 되어 폭동에 귀착하게 된다. 따라서 반드시 선생과 법으로 교화하고 예禮와 의義의 도道를 세워야 사양지심이 생기고 관습과 도리에 부합하고 안정에 귀착한다. 따라서 인간의 성性은 악함이 분명하고 선善하게 되는 것은 오직 위僞 덕분이다."라고 하였다. 맹자에 따르면 인간은 사단四端, 즉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의 선단善端을 가지고 있고 이것을 깨닫고 덕德을 쌓으면 누구도 성인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순자는 사단四端을 부정하였다. 순자는 인간 본성은 사단四端이 없을지라도 누구나 예禮와 의義를 학습할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 따라서 인간은 예禮와 의義를 학습하여 성인이 될 수 있다. 이것이 순자의 포인트이다. 순자는 말하기를 "거리의 모든 사람은 우禹임금처럼 될 수 있다. 우禹임금은 인의법정仁義法正(어짐, 정의, 법, 정당)을 실행했다. 인의법정에는 깨닫고 행할 수 있는 리理가 존재한다. 모든 사람은 인의법정을 알 수 있는 질료를 가지고 있으므로 인의법정을 실현할 수 있다. 따라서 모든 사람은 요堯임금처럼 될 수 있다. 도道를 받들어 학문하고 일심전력으로 사색하고 쉬지않고 선善을 쌓으면 마침내 신명神明에 통하고 세계天地와 합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성인聖人이란 인간 노력의 결과이다."라고 하였다.


5. 성악설性惡說설

+ 성性, 정情
순자는 말하기를 "자연스럽게 타고나는 것이 성性이다. 성性은 조화롭게 발생하고 정밀하게 감응된 것이다. 따라서 애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 성性이다. 성性 중의 호好, 오惡, 희喜, 노怒, 애哀, 락樂이 정情이다. 마음은 정情 중의 하나를 취사선택하면 그것이 사려慮이다. 사려慮에 따라 행위하는 것이 인위僞이다. 인위僞는 사려가 축적되고 능히 습관화된 후에 이루어진 행위이다. 바른 이익을 좇는 행위가 사事이고, 바른 의義를 좇는 행위가 덕德이다. 인간의 인식능력이 지知이고, 지知가 외부 사물과 접촉하는 행위가 지智이다. 지智를 발휘하는 행위가 능能이다. 능能으로써 외부사물과 접촉한다. 성性이 손상된 것이 병病이고, 성性과 우연히 조우하는 것이 명命이다."라고 하였다. 인간이 자연스럽게 타고나는 것이 성性이다. 성性에는 감정이 들어있고 이 정情을 다스리는 것이 위僞이다. 순자는 위僞로써 덕德을 쌓을 것을 강조한다. 성性이 손상된다는 의미는 정情, 위僞, 덕德에 모두 손해이다.

+ 욕망
순자는 말하기를 "다스림의 도道를 논하면서, 욕망제거를 주장하는 자는 욕망을 다스릴 수 없을 뿐만아니라 욕망 때문에 곤혹을 겪는다. 또 다스림의 도道를 논하면서 욕망축소를 주장하는 자는 욕망을 절제할 수 없을 뿐만아니라 욕망 때문에 곤혹을 겪는다. 인간은 욕망을 실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나, 그 추구하는 자는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욕망의 실현 여부는 신天으로부터부여된 것이다. 따라서 그 추구하는 자는 마음의 지시를 따른다. 천성天性에는 욕망이 있으나 마음이 절제를 하는 것이다. 인간의 가장 큰 욕망은 생生이고 가장 큰 혐오는 사死이다. 인간이 삶을 버리고 죽음을 택하는 이유는 삶을 욕망하지 않고 죽음을 욕망하기 때문이 아니라 삶이 불가능하고 죽음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욕망이 넘치지만 행동이 못미치는 이유는 마음이 저지하기 때문이다. 욕망은 못미치지만 행동으로 옮기는 이유는 마음이 시키기 때문이다. 성性은 신天의 의지이고 정情은 성性의 질료質이다. 욕망이란 정情이 외부세계에 응하는 것이다. 욕망의 실현이 가능하다고 보아 추구하는 것은 정情의 부득이한 측면이고 그 욕망의 가능성을 도道에 비추어보는 것은 지知에 따른 결과이다. 인간은 선택을 통하여 선호대상을 불러올 수 있고 혐오대상을 물리칠 수 있다. 따라서 힘權을 갖추어야 한다. 저울衡이 바르지 않을 경우 무거운 물건도 가볍다고 간주되고 가벼운 물건도 무겁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때문에 인간은 무겁고 가벼움에 미혹되는 것이다. 마음의 저울衡이 바르지 못할 경우 선호대상 속에 화禍가 깃들어 있어도 복福으로 여기고 혐오대상 속에 복福이 깃들어 있어도 화禍로 여길 수 있다. 때문에 인간은 화禍,복福에 미혹되는 것이다. 도道는 고금의 올바른 힘正權이다. 도道를 벗어나 오직 주관적인 힘權에 따라서만 선택하면 화禍, 복福의 소재를 알 수 없다."라고 하였다. 순자에 따르면 인간은 욕망이 없을 수 없으나 또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므로 마음으로 욕망을 절제할 것을 강조한다. 마음은 사려慮와 인식知을 통해서 욕망을 절제할 수 있다. 순자가 말하는 도道는 올바른 힘正權으로서 신天의 도道가 아니라 인간의 도道이다. 따라서 순자의 도道는 예의문리禮義文理, 인의법정仁義法正 등과 같은 인간의 도道이다. 그 도道란 욕망과 증오, 처음과 끝, 멈과 가까움, 심오와 천박, 과거와 현재를 측량하는 저울衡이다.

+ 허일이정虛壹而靜
그럼, 도道는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 순자는 말하기를 "마음을 비워서 고요하게 함으로써 도道를 알 수 있다. 마음은 대립적인 것들이 없을 수가 없지만 한결같은 것이 있다. 마음은 잠시도 활동하지 않을 때가 없지만 고요함靜이 존재한다. 인간은 선천적으로 인식능력知이 있고 인식하면 의지志가 생기는데 그 의지는 축장臧 되지만 그 축장에는 허虛가 존재한다. 마음은 인식능력으로써 차이를 구별한다. 인식능력이 동시同時에 차이를 파악하는 것이 통일一이다. 이 통일一이 서로를 방해하지 않는 것을 가리켜 일壹이라 한다. 마음은 잠을 자면 꿈을 꾸고 내버려두면 멋대로 생각하고 사용하면 도모謀한다. 정靜이란 이러저러한 잡생각, 즉 몽극夢劇이 인식능력知을 어지럽히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허심虛心하면 도道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 이 허일이정虛壹而靜의 상태에서 사물의 현상과 이치가 막힘없이 파악될 수 있다. 이 허일이정의 경지는 대청명大淸明이라고도 한다."라고 하였다. 마음은 생각慮하고 인식知능력이 있다. 마음은 욕망을 절제하면서 힘權과 기준衡을 세우면서 큰 이익과 적은 손해을 선택하려고 한다. 이러한 순자筍子의 학설은 묵자墨子의 공리주의와 일치한다. 순자는 마음을 비우는 평정심을 통하여 도道를 알 수 있다고 하였다. 비어있는 평정심, 즉 허일이정虛壹而靜은 노장사상과 순자의 포인트이다. 장자는 말하기를 "수면이 평정하면 그 맑음은 수염과 눈썹을 비출 수 있다. 물이 평정해도 사물을 밝게 비추거늘 하물며 정신의 경우임에랴. 성인의 마음은 세계天地의 거울이요, 모든 사물의 거울이다. 허정虛靜, 염담舌淡, 적막寂漠, 무위無爲란 세계의 기준이자 도덕道德의 정점이다. 제왕과 성인은 이 안에서 쉰다. 쉬면 허虛해지고 허虛하면 실實해지고 실實하면 윤倫하다. 또 허虛하면 정靜하고 정靜하면 동動하고 동動하면 득得한다. 또 정靜하면 무위無爲하고 무위無爲하면 신하들이 스스로 책임진다. 무위無爲하면 유유자적하고 유유자적하면 우환이 깃들 수 없어 장수한다."라고 하였다. 순자에 따르면 마음의 허虛란 이미 축장된 것이 장차 받아들일 것을 방해하지 않는 상태이다. 마음의 정靜은 잡생각 즉, 몽극이 마음을 어지럽히지 않는 상태이다. 반면에 장자의 허虛는 거울과 같은 상태이므로 순자의 정靜과는 조금 다르다고 하겠다.

+ 성誠, 변화變化
순자는 말하기를 "마음의 수양은 참됨, 즉 성誠보다 더 좋은 것이 없으니 성誠에 도달하면 더 할 일이 없으니 오직 인仁을 지키고 의義를 행할 따름이다. 성심誠心으로 인仁을 지키면 밖으로 현현形되고 현현되면 신명神해지고 신명해지면 사물화化시킬 수 있다. 성심으로 의를 행하면 이치理있고 밝고明 변화變시킬 수 있다. 사물화와 변화가 교대로 나타나는 것이 신의 덕天德이다. 도道에 익숙한 사람은 성誠으로써 전일全一하고 전일全一된 것은 밖으로 나타난다. 세계天地는 위대하지만 성誠이 실현되지 않으면 사물화될 수 없고 성인은 지혜롭지만 참誠되지 않으면 만민을 교화할 수 없다. 부자지간은 친밀하지만 참誠되지 않으면 소원해진다. 임금은 존엄하지만 참誠되지 않으면 비천해진다."라고 하였다. 순자에 따르면 인의도덕仁義道德은 본래 인성人性속에 없다. 따라서 성性을 변화시켜 인위僞를 일으킴으로서만이 가능하다. 그것은 물을 거슬러 배를 젓는 것과 같은 것이므로 노력하지 않으면 성性을 인의도덕仁義道德으로 변화시킬 수 없다. 성性이 인의도덕으로 변화되어 제 2의 천성이 된다. 맹자와 같은 성선론자들은 인간을 원래의 자연상태로 되돌리고자 하였다. 반면에 순자와 같은 성악론자는 인간을 원래의 자연상태로 되돌아가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것이 맹자와 순자의 차이점이다.


6. 국가의 기원

순자에 따르면 인간이 선善을 바라는 이유는 성性이 악惡하기 때문이다. 그럼, 왜 인간은 성性이 악惡함에도 불구하고 선善을 바라는가. 알다시피, 선善이란 예의문리禮義文理이고 인의법정仁義法正이다. 인간은 본래 이러한 선을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부득이하게 욕망할 따름이다. 이것이 순자의 포인트이다. 순자는 말하기를 "모든 사물은 같은 것으로부터 나오나 형체를 달리한다. 이것들은 인간을 위하여 생성되니 수數이다. 인간은 더불어 살면서 각가 다른 도道를 통하여 욕망의 대상을 추구한다. 같은 것을 욕망하면서도 달리 인식한다. 이것이 생生이다. 현자나 어리석은 자나 모두 존재를 바라지만 분수에 따라 그 현현이 다르다. 의욕은 같으나 인식이 다르므로 이기적으로 행동하여 화를 면하려하고 욕망을 좇으며 만족하려하므로 민심의 문란이 불가피하다. 신하를 제어할 군주가 없고 아랫사람을 다스릴 윗사람이 없으면 천하의 사람들은 맘대로 욕망을 추구하다보면 반드시 해악이 발생한다. 욕망하는 사람은 많으나 그 대상이 부족하므로 반드시 쟁탈이 발생한다. 공동사회에서는 분업이 없으면 분쟁이 생긴다. 가난함은 재난이고 분쟁은 재앙이다.재난과 재앙을 막으려면 분업을 통하여 공동사회를 이루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강자가 약자를 위협하고 현자가 아둔한 자를 겁주고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거스르고 젊은이가 어른을 깔보며 덕으로써 정치하지 않고, 노약자들은 근심에 젖고 장정들은 분쟁한다. 사람들은 일하기 싫어하고 영예와 이득만을 좋아한다. 분업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사업을 성취하다가도 재난을 겪고 공적을 다투어 화를 입는다. 남녀의 분업과 혼인의 예禮가 없으면 남녀가 결합하지 못하고 여색을 쟁탈한다. 따라서 지자知者는 분업分業을 도모한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예교禮敎에 따른 공리주의로서 묵자의 주장과 동일하다고 볼 수 있다. 순자에 따르면 지자知者는 분업과 예禮를 도모한다. 인간이 예禮를 추구하는 이유는 원래 인간본성 중에 예禮가 있었기 때문은 아니다. 순자는 말하기를 "물과 불은 기氣는 있으나 생生이 없다. 초목은 생生이 있으나 지각知이 없다. 금수는 지각이 있으나 의義가 없다. 인간은 기氣, 생生, 지知, 의義를 모두 갖추고 있으므로 현상세계天下에서 가장 귀한 존재이다. 인간의 힘은 소보다 못하고, 인간의 달리기는 말보다 못하지만 인간은 소와 말을 부린다. 그 까닭은 인간은 공동사회를 이루나 소와 말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분업을 통하여 공동사회를 이룬다. 인간은 의義를 바탕으로 분업을 이루고 서로 화합하면서 통일하고 힘이 증대되면 강해지고 모든 사물을 제압한다. 그래서 가옥을 짓고 삶을 영위한다. 분업과 의義 덕분으로 인간은 사계절이 운행질서를 정리하고 모든 사물을 이용하고 그 이익을 향유한다. 따라서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사회를 떠날 수 없다. 사회내의 분업이 없으면 다투게 되고 혼란해지고 흩어지고 약해지고 모든 사물을 다스릴 수 없고 가옥을 짓고 삶을 영위할 수 없다. 그런즉, 인간은 예禮와 의義를 버릴 수 없다."라고 하였다. 현상세계에서 인간이 인간다움은 분업과 예禮에  따른 결과이다. 이것이 순자의 포인트이다

+ 예禮
순자에 따르면 인간은 태어나면서 욕망이 있고 그 욕망을 추구하려 한다. 욕망을 추구할 때 일정한 법도와 한계가 없으면 분쟁과 혼란이 발생한다. 선왕先王은 이러한 혼란을 우려하여 예禮오 의義를 제정하고 분업을 설정하였다.인간은 예禮, 의義, 그리고 분업에 조화를 이루면서 욕망을 충족하게 되었다. 이것이 예禮의 기원이다. 예禮는 분업을 정하고 인간의 욕구를 절제한다. 이것이 순자의 포인트이다. 공자는 개인의 성정性情의 자유를 중시하면서 외부규범 또한 중시했다. 맹자는 개인의 성정과 도덕적 판단을 사회규범보다 더 중시하였다. 반면에 순자는 예禮, 즉 사회규범을 인간 개인의 성정性情보다 더 중시하였다. 재미있게도 순자에 따르면 학문의 순서는 경전을 암송하는 데서 시작해서 예禮에 관한 책을 읽는 데서 끝난다고 하였다. 순자는 공리주의적인 측면에서 묵자와 비슷하다. 그러나 묵자墨子는 실용에 과도하게 기울어진 나머지 형식의 가치에 무지하였다.

+ 왕도王道와 패도覇道
순자는 말하기를 "성인聖人은 윤리倫에 밝은 자이며 왕王은 제도制 밝은 자이다. 윤리와 제도에 밝은 성인과 왕은 현상세계天下를 지배할 만하다."라고 하였다. 순자에 따르면 성인이 왕이 되어야만 최선의 국가를 이룰 수 있다. 순자는 말하기를 "그러므로 천자天子가 바로 그 인물이다. 현상세계天下는 지극히 무거우므로 강한자가 아니면 감담할 수 없고 현상세계天下는 지극히 거대하므로 능력이 없으면 나누어 다스릴 수 없고 현상세계天下는 수 많은 인구이므로 능력이 없으면 결집시킬 수 없다. 이 세가지 경지에 밝은 성인이 아니면 왕이 될 수 없다."고 하였다. 성인이 왕이 되는 것이 왕도정치王道政治이다. 이것이 순자의 포인트이다. 순자는 왕도정치와 패도정치를 구별하면서 말하기를 "공자의 제자들은 오패五覇(제 환공, 진 문공, 초 장왕, 오 합려, 월 구천)를 찬양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오패는 정치적 교화를 근본으로 한 것도 아니고, 예의禮義를 받든 것도 아니고 문리文理를 좇은 것도 아니고 민심을 얻은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오직 방침과 책략으로 백성들의 노동을 통제하여 물자를 비축하고 전술로써 적을 타도하고 기만과 술책으로 승리했던 것이다. 그러나 왕자王者는 지극히 지혜로우면서도 못난 사람을 도우며 지극히 강하며서도 약자를 관용하며, 이길 수 있더라도 싸우는 것을 수치로 여기며 덕德을 천하에 펼쳐서 강포한 나라들을 교화하고, 재앙을 반복하는 경우에만 벌주었으니 성왕聖王이 벌주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고 하였다. 성인이 왕이 되어야 왕도정치이다. 그렇지 않으면 패도정치일 뿐이다. 순자의 왕도정치는 맹자의 경우와 조금 다르다, 맹자의 왕도정치란 남에게 모질지 못하는 마음에서 시작한다.

+ 토지 조세 제도
순자는 말하기를 "왕은 세금을 차등 부과하고 모든 일을 바로잡고 모든 사물을 재량한다. 들판의 소출은 10분의 1의 세금을 거두고 관문과 시내 상가는 감찰만 하고 세금은 부과하지 않는다. 산림의 채벌과 여울의 통발은 절기에 따라 금지 또는 개방하지만 과세하지 않는다. 토지는 등급에 따라 차등 과세하고 운송로의 원근을 고려하여 공물내용을 결정하며 재물과 곡물을 유통시켜 적체되는 일이 없도록 한다."고 하였다.


7. 정명론正名論

이미 보았듯이, 공자에 따르면 정명正名이란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부친은 부친답고 자식은 자식다운 것을 말한다. 또 맹자는 정명론과 관련하여 부친도 무시하고 임금도 무시하면 다름아닌 금수라고 하였다. 공자와 맹자의 정명론은 윤리적인 측면을 강조하였지만 논리적인 측면은 없었다. 순자에 따르면 인간은 생각하고 인식하는 마음과 욕망만이 존재한다. 순자는 말하기를 "인간이 가진 인식능력이 지知이고, 이 지知가 외부 사물과 접촉하는 것이 지智이다. 눈은 색깔, 형체, 무늬를 변별하고 귀는 퉁소 연주 소리를 변별하고 입은 달고 쓰고 짜고 싱겁고 매운 맛을 변별하고 코는 향기 악취 꽃내음 썩은내 노린내 비린내를 변별하고 몸은 아프고 가렵고 싸늘하고 덥고 매끄럽고 가볍고 무거운 느낌을 변별하고 마음은 쾌활과 우울, 희노애락애오욕을 변별한다. 마음心은 징지徵知를 갖고있는데 마음은 들어온 인상에 의미를 부여해야만 귀로 소리를 인식하게 되고 눈으로 형체를 인식하게 된다. 징지徵知는 신의 기관天官이 외부사물을 유類에 따라 접수한 후에야 기능한다. 따라서 '모른다'는 것은 오관五官이 접수했지만 마음이 분류하지 못하고 마음이 증명徵하려해도 할 수 없는 경우이다."라고 하였다. 마음은 텅 비어있는 상태에서 오관五官을 다스리는데 그것이 바로 신의 기관天官이다. 신의 기관天官은 선천적인 사유기관이다. 마음에는 징지徵知가 있는데 징徵이란 증명을 말한다. 이를테면 어떤 나무를 볼 때 그 형태를 감각하면 마음은 그것이 나무임을 안다. 이것이 징지의 작용이다. 따라서 징지가 있으므로 귀로 소리를 알게 되고 눈으로 형제를 알게 된다. 만약 징지가 없다면 소리를 듣고 형체를 볼 수 있을 뿐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나무가 나무임을 알게 되는 것은, 마음이 개체 사물을 나무의 유類속에 접수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의 경험 속에 나무의 유類가 없었다면 그 개체 사물이 나무임을 알지 못한다. 즉, 오관이 접수했지만 분류하지 못하고 마음이 증명하려해도 설명할 수 없는 경우를 가리켜 모른다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신의 기관天官이 작동하여야먄 사물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순자의 포인트이다.

+ 명名
순자는 이름의 기원과 기능에 관하여 말하기를 "이름으로 실재를 지칭하면 위로는 귀천이 구별되고 아래로는 같음과 차이를 변별할 수 있다. 따라서 뜻이 전달 안될리 없고 일이 막힘이 없음으로 재앙이 사라지게 된다. 이것이 이름이 존재하는 목적이다. 이것이 저것과 다른 이름을 갖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신의 기관天官 때문에 그러하다. 모든 사람은 동일한 유類에 대하여 동일한 신의 기관天官을 공유하기 때문에 비슷하게 모사하고 소통한다. 따라서 지각된 외부사물에 대하여 동일한 이름을 붙이기로 함께 약정하는 것이다. 신의 기관天官은 눈이 색깔을 변별하고 귀가 퉁소 소리를 분별하는 등, 오관五官에 덧붙어서 같은 것과 다른 것을 생성한다. 그런 연후에 이름이 사물에 부착되는데 사물이 같으면 이름이 같고 사물이 다르면 이름이 다르다. 이름자체에는 본래의 합당성이 없고 단지 약정에 의한 것일 뿐이다. 약정이 확립되어 습관화 된 것이 합당한 이름이다. 약정과 다르면 합당히지 못한 이름이다. 이름 자체에 실재가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약정에 의하여 실재가 결정된다. 약정이 확립되어 습관화 된 것이 실명實名이다. 이름에 선善이 부착되면 편하고 쉽고 꼭 알맞다."고 하였다. 인간은 모든 사물의 각 유類에 대하여 동일한 신의 기관을天官을 공유한다. 이름은 실제상의 개체의 모든 속성들을 지칭할 수 없다. 따라서 이름은 개체에 대하여 비슷하게 모사하여 소통할 따름이다. 실제로 같은 실상의 것들이 동일한 이름을 갖음으로 사물의 동이同異를 변별할 수 있게 된다. 이름과 실상의 이중적 본체는 최대의 공명共名, 즉 유개념이다. 공자의 정명正名은 이름을 바르게 한다는 것으로서 임금은 임금이라는 이름에 부합하고 신하는 신하라는 이름에 부합하게 하는 것이다. 순자는 이에 덧붙여 이름으로서 귀천을 밝히고 동이同異를 변별하고자 하였다. 본래 이름은 합당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임의로 약정된 것이다. 따라서 이름이 이미 습관화되었다면 임의로 고칠 수 없다.

+ 사辭
순자는 말하기를 "이름은 실상을 전달한다. 이것이 이름의 효용이다. 이름을 합하여 문장을 이루는 것이 문법麗이다. 이름을 안다는 것은 이름의 효용과 문법을 터득하는 것이다. 이름이란 서로 다른 실상을 표시하는 것이다. 명제辭란 서로 다른 실상의 이름들을 나열하여 표현하는 것이다. 변설辨說이란 이름과 실상을 통하여 일관된 법칙을 논구하는 것이다. 남을 이해시키는 것이 변설의 작용이다. 변설이란 분석하는 마음의 상도象道이다. 마음은 도道를 제작하는데 도道는 다스리는 보편법칙이다. 성인의 마음은 도道와 합하고 말說은 마음과 합하고 명제는 말과 합하고 이름이 정확히 사물을 표시하고 참모습을 쉼게 표현하고 분석이 그릇되지 않고 유추가 모순되지 않고 남의 말을 듣고 합리적으로 받아들이고 논변하면 논거를 밝힐 수 있다. 따라서 먹줄로서 곡직曲直을 바로잡듯 정도正道로써 궤변을 변별하기 때문에 사설邪說은 횡행할 수 없고 백가百家는 달아날 데가 없다. 이것이 바로 성인의 변설이다."라고 하였다.

+ 일반 백성
순자는 말하기를 "사설邪說은 정도를 벗어나 멋대로 조작된 것이다. 따라서 현명한 군주는 그의 본분을 깨닫고 더불어 논변하지 않는다. 일반백성은 도道로써 통일시키기는 쉬어도 더불어 리理를 논할 수는 없다. 그런즉, 현명한 군주는 위세로써 군림하고 도道로써 계도하고 칙명으로써 천명하고 논의로써 밝히고 형벌로써 금지시킨다. 그러므로 백성들은 귀신같이 도道에 교화된다. 여기에 변설 따위가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그러나 성왕聖王은 이미 돌아가셨고 현상세계天下는 혼란하여 간교한 주장이 일어났으나 군자에게는 권세가 없고 형벌권이 없기 때문에 변설辨說을 행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따라서 판단, 명명, 논변, 논증은 변설의 중요한 형식이 되었다."고 하였다.재미있게도 순자는 백성들을 가리켜 도道로써 통일시키기는 쉬워도 함께 이치를 논할 수는 없다고 보았다. 이것은 공자가 말한 "백성은 따라오게 할 수는 있어도 깨우칠 수는 없다."는 것과 상통한다. 순자의 제자 이사는 이 말을 근거로 진시황의 사상정책의 통일을 수립하였다.






<참고문헌>

펑유란. 박성규 역, 중국철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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