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역사적 맥락에서 본 노자
사마천의 <사기>의 <노장신한열전>에 따르면 노자는 초나라 사람이다. 성은 이李이고 이름은 이耳이고 또 자는 담聃이다. 노자, 즉 이이李耳는 도덕道德을 수양하면서 스스로 드러내지않고 명성을 좇지 아니하였다. 이이는 전국 시대 사람으로서, 전설상의 인물인 노담과 구별된다. 재미있게도, 당시 고대의 위대한 진인眞人인 노담에 대한 전설이 있었다. 이이는 노담의 이름을 빌려서 자신의 아이디어를 전파하였다. 사마천의 부친인 사마담에 따르면 노자의 도가道家는 인간정신을 무형의 도에 합일시킴으로써 사물의 이치를 깨닫는 것이라고 했다. 또 노자의 도가는 음양가의 순리와 유가와 묵가의 선善을 채택하였고 명가名家와 법가法家의 불비를 충족하였다. 도가道家는 시간에 따라 변해가는 사물을 보면서, 풍속과 질서를 세웠으므로 마땅히 온당하지 않은 바가 없었고, 그 아이디어는 간략하였지만 매우 이로웠다.
2. 초나라
노자, 즉 이이李耳는 초나라 사람이었다. 초나라 사람들은 남방의 신흥 민족으로서 고급문화가 없었고 심한 방언를 썼던 야만인들이었다. 초나라 사람들은 선왕의 도를 경멸했던 민족이었다. 재미있게도, 초나라 사람이 주周문화를 동경할 경우, 북방인 중원으로 유학해야 했다. 초나라 사람 진량陳良은 북방으로 유학했는데 북방의 학자들도 그를 쉽게 능가하지 못했다. <한서>의 <지리지>에 따르면 초나라는 양자강과 풍요로운 산림의 덕택으로 백성들은 먹을 것이 풍족하였고 나약하기는 하였으나 삶을 즐겼고 재산을 축적할 줄 몰랐다. 음식은 서로 나누어 먹었고 추위와 굶주림을 걱정하지 않았지만 큰 부자도 없었다 초나라 사람들은 무속과 귀신을 신봉하고 음사淫祀를 중시했다.
3. 도道, 덕德
고대의 하늘天은 主宰之天, 즉 상재로서 인격신의 성격을 갖고있었다. 공자와 묵자는 고대의 하늘天 개념을 이어받았다. 노자는 하늘과 땅은 인하지 않다天地不仁고 하였다. 노자는 신의 세계와 인간 세계를 이원화했던 것이다. 한비자는 노자를 해석하면서 말하기를 "도道는 사물의 본질을 드러나게하는 리理이다. 리理는 모든 사물의 형식이고, 도道는 모든 사물을 드러낸다. 왜냐하면 도道는 모든 사물의 리理를 관장하기 때문이다. 모든 사물은 각각 다른 리理가 있고 도道는 모든 리理의 주재자이다. 따라서 세계天地가 변화하면 도道 또한 운동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 노자에 따르면 도道란 세계天地에 앞서 이미 소리도 형체도 없이 독립적으로 운행하는 존재이다. 도는 모든 사물을 낳고 모든 사물은 도道에 의존한다. 따라서 사람은 인간 세계에 의존하고 인간세계는 신天을 의존하고 신은 도道에 의존하고 도는 자연自然을 의존한다. 도道는 항상 무위無爲하지만 그것은 단지 무위가 아니다. 이것이 노자의 포인트이다. 도道는 모든 사물의 생성원리이다. 모든 사물은 유有라고 말할 수 있지만 도道는 유有가 아니므로 무無라고만 말할 수 있겠다. 따라서 도道의 체體는 무無이고 도의 용用은 유有이겠다. 노자는 말하기를 "도道는 하나를 낳고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셋을 낳고 셋은 모든 사물을 낳고 모든 사물은 음陰과 양陽이 맞물려 조화를 이룬다."고 하였다. 여기서 하나란 태일太一을 말하고 둘은 천天과 지地를 말하고 셋은 음기陰氣, 양기陽氣, 화기和氣를 말한다. 노자는 말하기를 "도道는 모든 사물의 근거로서 홀연히 형상을 드러내고, 홀연히 질료를 드러내고 홀연히 정념을 드러낸다. 도道는 정념을 너무나 진실되게 드러내므로 인간은 도道를 믿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 노자에 따르면 도道는 영원불변하고 이름도 없지만 사물을 이것 또는 저것으로 결정내는 힘이다. 그럼, 덕德이란 무엇일까. 도道는 모든 사물의 생성원리였다. 반면에 덕德은 한 사물의 생성원리이다. 한비자는 말하기를 "모든 사물은 각각 다른 리理가 있다."고 하였다. 바로 그 리理가 덕德이다. 노자는 말하기를 "덕德은 도道를 따라서 운행한다."고 하였다. 즉, 도道는 모든 사물을 낳고 덕德이 각 사물을 기르면, 사물은 드러내어 완성하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사물은 도道를 우러르고 덕德을 귀하게 여긴다. 이것은 자연의 뜻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관자管子>의 <심술상心術上>은 말하기를 "도道가 머무는 곳이 덕德이다. 모든 사물은 도道 얻어서 생성된다. 각 사물이 얻은 것은 덕德이다. 따라서 무위無爲는 도道이고 머무는 것은 덕德이다."라고 하였다.
4. 사물의 상도常道
한비자는 <해노편>에서 영원불변한 것을 상常이라고 하였다. 노자는 도道라고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상도常道가 아니라고 하면서 상도常道에서 상덕常德이 나온다고 하였다. 노자에 따르면 도道는 상무常無이기도 하고 상유常有이기도 하면서 영원불변하면서 이름이 없지만 항상 작위作爲하지 않으나 이루지 않는 일이 없다고 하였다. 노자에 따르면 모든 사물은 근거根로 되돌아가서 본질을 실현한다. 노자는 이것을 복명復命이라고 하였다. 이 복명이 바로 상常이고 상常을 아는 것이 명明이다. 그럼 상常을 터득하면 어떤 이로움이 있을까. 노자에 따르면 상常을 아는 사람은 관용容적이고 공평公하고 포용周적이고 광대大하고 도道에 맞고 오래久도록 평생 위태롭지 않다고 하였다. 또 이러한 상常을 실천하는 것을 습명襲明 또는 습상習常이라고 하였다. 재미있게도, 노자는 상常을 모르고 멋대로 작위하면 흉凶하다고 하였다. 일반적으로 사물의 상常은 항상 극점에서 되돌아가게 된다. 노자는 이 반복反復하는 것을 도道의 운동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정상이 비정상으로 돌아서고, 경사가 재해로 돌아선다. 구부러지면 온전해지고, 굽으면 곧아지고, 비면 채워지고, 낡으면 새로워지고, 적게 가진 자는 얻게되고, 많이 가진 자는 미혹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즉, 도道의 운동으로 인하여 재앙 속에 행복이 깃들고 행복 속에 재앙이 깃들 수 있다. 노자는 말하기를 "현상세계天下에 물보다 유약한 것은 없지만, 굳센 것을 공격할 경우 물보다 나은 것이 없다."고 하였다. 따라서 모든 사물은 손해이면서도 이익이 될 수 있고, 이익이 되면서도 손해가 될 수 있다. 이것이 노자의 포인트이다.
5. 개명開明
이미 언급했다시피, 개명은 상常을 아는 것이다. 그럼, 개명한 사람은 어떻게 처세하는가. 노자는 말하기를 "장차 누를려면 우선 펴주어야 하고, 장차 약화시킬려면 우선 강하게 해주어야 하고, 장차 폐할려면 우선 융성케 해주어야 하고, 장차 빼앗을려면 우선 주어야한다."고 하였다. 모든 사물은 발전하여 그 극점에 이르면 반드시 그 반대를 향하여 변화한다. 이것이 도道의 운동이다. 따라서 개명한 자는 사물이 그 극점에 이르지 않도록 대처할 수 있어야한다. 노자는 말하기를 "광명한 도道는 마치 어두운 것 같고, 전진의 도道는 후퇴하는 것 같고, 평탄한 도道는 험난한 것 같고, 숭고한 덕德은 낮은 것 같고, 결백한 德은 더러운 것 같고, 큰 덕德은 부족한 것 같고, 건전한 덕德은 나태한 것 같고, 진실은 허구 처럼 보이고 극한의 네모는 모서리가 없다."고 하였다. 따라서 개명한 자는 지나침을 배제하고, 사치를 배제하고, 극단을 배제한다. 헤겔에 비추어 본다면, 곧은 것이 구부러지게 된다는 것은 정正이 반反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합合이란 구부러진 것을 내포한 곧은 것이다. 개명한 자는 합合의 경지에 이르렀으므로 평생 위태롭지 않을 수 있다.
6. 정치철학
사물은 극에 달하면 반드시 반전한다. 물극칙반物極則反, 즉 달은 차면 기운다. 노자는 말하기를 "현상세계天下에 금지와 규제가 많을수록 백성은 궁핍해지고, 백성들에 이로운 도구가 많을수록 국가는 혼란해지고, 기술을 가진 백성이 많을수록 기이한 사물이 늘어나고, 법령이 정비될수록, 도둑은 더 늘어난다."고 하였다. 재미있게도, 노자는 평화를 어렵게 하는 것은 다름아닌 지배자의 작위作爲 때문이라고 하면서 백성들이 죽음을 경시하는 이유는 지배자가 지나치게 생生을 추구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또 노자는 생生에 대한 탐닉은 재앙이라고 말하면서 생生을 추구하다가 사지에 빠지는 경우가 열에 셋이라고 하였다. 노자의 포인트는 법령과 인의仁義를 배제하고 무위無爲로서 작위作爲하고 불치不治로서 통치하는 것이다. 그러면 백성은 저절로 바르게 되고 부유해지고 너그러워진다는 것이다.
7. 욕망
여러 욕망을 만족시키는 것 보다는 근본적으로 욕망을 줄이는 것이 낫다. 이것이 노자의 포인트이다. 노자는 말하기를 "현자를 숭상하지 않으면 백성들의 다툼의 없어지고, 금은보화를 중히 여기지 않으면 도둑이 없어지고, 욕망을 선전하지 않으면 백성이 어지럽지 않게된다. 성인聖人은 백성의 마음을 비워 배를 채우도록 하고, 항상 백성을 무지하고 무욕하게 내버려두어야 한다. 지혜와 지식을 버리면 백성의 이익은 백배 증가하고, 인의仁義를 버리면 자식은 효도하고 부모는 자애로워지고, 기술과 이익을 버리면 도적은 없어진다."고 하였다. 따라서 노자는 소박한 마음을 품어서 단순하게 표현하고 사심私心을 줄여 욕망을 없앨 것을 제안했던 것이다. 지나친 욕망을 줄이는 것이 절제이다. 노자는 만족할 줄 알면 수치를 겪지 않는다고 하였다. 노자는 말하기를 "만족을 모르는 것보다 더 큰 재앙은 없고, 탐욕을 부리는 것보다 더 큰 잘못은 없으므로 만족을 아는 것이 영원한 만족이다."라고 하였다. 재미있게도, 노자는 배우지 않는 것이 배우는 것이라고 하면서 백성들의 지혜가 많아지면 국가는 재앙에 이르게 되므로 국가의 복리는 백성의 지혜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하였다.
8. 사회철학
노자에 따르면 덕德이 두터운 자는 어린아기와 같다. 따라서 상덕常德의 상태는 어린아기처럼 단순하다. 노자는 상덕常德을 수양한 자를 가리켜 어리석은 자에 비유하면서 말하기를 "내 마음은 어리석은 자같이 어리숭하구나. 속인들은 저렇게 총명한데 나만 흐리멍덩하구나. 속인들은 저토록 영리한데 나만 멍청하구나. 모두들 재주가 많은데 나만 홀로 아둔하고 비루하구나."라고 하였다. 노자에 따르면 옛날에 도道를 추구했던 자들은 백성을 개명시킨 것이 아니라 어리석게 했다. 여기서 어리석다는 것은 보통 말하는 어리석은 행위가 아니라 지혜에서 나오는 어리석음으로서 정립과 반정립에서 나오는 긴 여정의 종합으로서의 어리석음이다. 도道를 추구하는 목적은 욕망과 지식을 끊임없이 떨쳐내고 무위無爲에 이르는 것이다. 노자는 말하기를 "국가는 작아야 하고 백성의 수는 적어야 한다. 우수한 기술이 있더라도 사용하지 않고, 죽음을 중시하고, 멀리 이사가지 않으며, 배와 수레가 있어도 사용할 데가 없고, 갑옷과 병기가 있어도 쓸 일이 없다. 결승문자가 다시 부활하고, 맛있게 먹고, 멋지게 입으며, 편안하게 즐긴다. 이웃 나라가 앞에 보이고 닭과 개가 짖더라도 백성들은 늙어죽을 때까지 서로 왕래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것이 노자의 사회철학이다. 이 사회는 문명과 야만이 변증법적으로 합일된 사회이겠다.
9. 장자莊子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장자의 이름은 주周이다. 장주(B.C.369)는 송나라의 몽蒙에서 태어났다. 장주莊周는 탁월한 이해력과 분석력을 통하여 유가와 묵가를 비판하였고 결국 노자의 사상에 귀착하였다. 한때 초나라 위왕은 장자의 명성을 듣고 그를 재상으로 등용하기 위하여 사신을 보냈다. 위왕의 사신은 후한 예물을 장자 앞에 내놓았다. 그러나 장자는 말하기를 "천금은 큰 이익이고 정승은 존귀한 벼슬이지만 교제의 희생소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희생소는 여러 해 잘 먹고 잘 길러지지만, 어느 날 태묘에 보내지는데 그것이 마지막이지요. 그제서야 평범한 돼지의 신세를 부러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나를 더 이상 괴롭히지 마시지요. 나는 평생 벼슬을 안하고 내 뜻대로 살렵니다."라고 하였다. 재미있게도 장자가 논한 도道와 덕德은 노자의 그것과 일치한다. 장자에 따르면 도道는 없는 곳이 없다. 도道는 모든 사물의 생성원리이므로 사물이 있는 어디든지 도道가 있는 것이다. 장자는 말하기를 "도道는 실재하므로 느낄 수 있고 믿을 수 있지만 무위無爲하고 무형無形이다. 도道는 전해질 수 있지만 전수될 수 없고, 얻을 수 있지만 보여줄 수 없다. 또 도道는 스스로 심고 스스로 태어나므로 세계天地가 생성되기 이전에 이미 존재했다. 도道는 세계天地에서 귀신과 상제를 낳고, 태극보다 앞서 있지만 멀지않고, 육극보다 아래있지만 낮지 않다. 세계天地보다 앞서 있지만 오래되지 않았고, 엣날보다 나이가 많지만 늙지 않았다."고 하였다. 장자에 따르면 도道는 자연적이다. 즉 인간의 자질은 생활을 따르고 생활은 정의를 따르고 정의는 덕德을 따르고 덕은 도道를 따르고 도는 신神을 따르게 되는데 이 신神을 무위無爲라고 하였다. 신神은 내재하고 인간은 외재한다. 소나 말이 네발을 가지는 것은 신天의 의지이고 말에 굴레를 씌우고 소 코를 뚫는 것은 인간의 의지이다. 장자에 따르면 도道는 신神이자 신天을 따르는 것이다. 반면에 노자에 따르면 도道는 스스로 그러한 현상, 즉 도법자연道法自然이다. 장자는 바람이 불 때 각 사물이 각각 다른 소리를 내는 이유는 각 사물이 스스로 소리를 골라잡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재미있게도 노자는 도道는 작위하지 않으나 이루지 않는 일이 없다고 하였다. 반면에 장자에 따르면 최초에 무無가 있었는데 이 무無가 도道이다. 이 도道에서 하나가 생성되고 그 하나는 형체가 없지만, 모든 사물이 그 하나를 얻는 것이 덕德이다. 따라서 모든 사물의 생성원리는 도道이고 개별 사물의 생성원리는 덕德이 되는 것이다. 장자는 말하기를 "형상形은 도道없이 생성될 수 없고, 생성되는 것은 덕德없이는 현실화될 수 없다. 도道는 보편적인 것이고 덕德은 개별적인 것이다. 사물은 무형에서 유형으로 형체를 갖게 되는데 이것이 명命이다. 이 명命은 사물의 본질적 속성, 즉 성性을 드러낸다. 선천적인 형체는 생성된 후에 이꼴에서 저꼴로 무쌍하게 변화한다."고 하였다. 장자는 이러한 생성된 사물의 변화무쌍을 천균天均이라고 하였다. 모든 사물은 도道로부터 각기 덕德을 얻으므로 각 사물은 자연의 본성이 내재한다. 따라서 매미와 붕새와 뱁새는 각자의 성性에 만족하므로 서로 교만하지않고 부러워하지 않는다. 이것이 장자의 소요, 즉 행복에 관한 포인트이다. 데카르트는 인간은 각자의 개체적 선천 지식 안에서 자족한다고 하였다. 장자는 공자를 공격하면서 말하기를 "세계天地는 본래 법칙이 있고, 해와 달은 본래의 광명이 있고, 뭇별은 질서가 있고 금수는 본래의 무리가 있고, 나무는 본래의 특성이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덕德에 따라 행하고 도道를 좇아가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인의仁義를 좇는 것은 인간의 천성天性을 어지럽히는 일입니다."라고 하였다. 즉, 덕德에 따라 도道를 좇아가는 것은 인간과 사물의 천성에 순응하는 것이다. 이것이 장자가 말하는 천락天樂이다. 장자에 따르면 물고기는 물속에 있어야 살지만 인간은 물속에 있으면 죽는데, 그 이유는 선천성 때문이다. 따라서 이름이 실제와 부합하고 정의가 바로 서면 그것이 바로 행복이라고 하였다. 장자는 정치적 사회적 법과 제도를 제정하는 데 부정적이었다. 장자에 따르면 불치不治로서 다스리는 것이 정치政治이다. 장자는 말하기를 "인간은 신天을 멸해서는 안되고, 일부러 신의 계시天命을 멸해서도 아니된다."고 하였다. 장자는 절대적 자유를 주장하면서, 모든 인간이 자신의 명命에 따른다면 그것이 절대적 자유라고 하였다. 장자는 현상세계天下의 모든 사물을 선善하다고 보았다. 이것이 장자학과 불학의 차이점이다. 불학에서는 현상세계天下의 모든 사물은 악惡하다. 재미있게도 장자는 유가와 묵가를 비판하면서 말하기를 "시비를 따지는 것은 유가와 묵가에서 비롯되었는데 시비를 따지는 데는 명明을 쓰는 것이 최고이다. 그러나 성인은 시비의 노선을 따르지 않고 신天의 관점에서 비추어본다."고 하였다. 그럼, 장자의 죽음관을 살펴보자. 장자는 말하기를 "내 왼팔이 수닭으로 변하면 나는 새벽을 알리겠고, 내 오른팔이 탄알로 변하면 나는 부엉이 고기를 장만하겠다. 내 정신이 말로 변하고자 한다면 나는 기꺼이 올라탈 것이므로 어찌 마차가 필요하겠는가. 탄생은 때를 만난 것이고, 죽음은 질서에 순응하는 것이므로 만난 때에 조용히 머물다가 질서에 순응하여 돌아가면 애락哀樂이 개입하지 못한다. 이것이 현해懸解, 즉 거꾸로 매달린 상태에서 풀리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애락哀樂이 개입하지 못한다는 것은 정념이 순화된다는 것을 말한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인간을 억압하는 것은 정념이다. 따라서 정념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위해서는 사물 생성의 필연성을 인식하여 정념이 동요되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장자는 노담, 즉 노자의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말하기를 "저토록 슬퍼하는 것은 신의 계시天命을 거역하는 형벌이고 정념을 배가시키는 일이다."라고 하였다.
10. 진인眞人
장자에 따르면 진인眞人이란 현덕玄德으로써 대순大順에 합일한 인간이다. 개체는 순수경험 속에서 세계와 합일할 수 있다. 윌리암 제임스에 따르면 그 순수 경험자는 경험 내용의 그러함만을 지각할 뿐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이것은 단지 액면 가치로서 불가에서 말하는 현량現量이다. 경험은 있지만 그 사물의 있음과 분별과 시비를 모른다는 것인데, 모르면 모를수록 그 경험은 더 순수한 것이다. 왜냐하면 경험대상인 사물은 구체적이지만 그것이 지시하는 바는 추상적이기 때문이다. 장자가 말한 심재心齋와 좌망坐忘은 이 순수경험의 경지이다. 장자는 말하기를 "뜻을 다하여 귀기울이고 귀로 말고 마음으로 들어라. 마음으로 말고 기氣로 들어라. 귀는 듣고 마음은 따라가지만, 기氣는 허虛이므로 만물을 붙들고 있다. 허虛는 도道이다. 허虛는 곧 심재心齋이다.''라고 하였다. 그럼 좌망坐忘이란 무엇인가. 좌망은 마음을 비워 대통大通에 합일하는 순수경험이다. 장자는 말하기를 "성性을 수양하면 덕德을 회복한다. 덕德이 지극하면 태초와 합일한다. 합일合一은 허虛이고, 허虛는 광대함이니 말소리와 새소리가 합한 것이다. 이 합일은 우주의 합일로서 우매하고 혼미한 것 같으나 이것이 현덕玄德이고 대순大順에 합일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현덕玄德은 진인眞人이 경험하는 순수경험의 경지이다. 진인은 사려나 지식이 없고 마음이 비어있어서 대통하여 합일했으므로 따르지 않는 것이 없고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없다. 인간은 이 경지에서 절대적 행복이 가능하다. 장자는 말하기를 "열자列子는 바람을 타고 다니며 보름만에 돌아오곤 했다. 행복에 도달한 사람 가운데 그런 사람은 흔치 않았다. 열자列子는 걷지않아도 되었지만 여전히 무언가에 의존하였다." 재미있게도, 열자列子는 바람을 타고 다녔으므로 바람이 없으면 다닐 수가 없었다. 즉 열자列子의 행복은 바람에 의존한 것이었다. 이것이 장자의 신비주의이다. 서양의 신비주의자로서 스피노자가 있다. 도道와 덕德을 타고 소요하는 인간은 사물을 부릴 뿐 사물에 부림당하지 않을 수 있다. 이것이 장자의 포인트이다.
<참고문헌>
풍우란. 박성규 역, 중국철학사.
멋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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