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역사적 맥락에서 본 공자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연 공자孔子는 중국 춘추시대 말기, 노魯나라 양공 22년(551-479BC.)에 태어났다. 공자의 선조는 송宋나라 공족이었다. 공자는 하夏, 은殷, 주周 시대의 시詩와 서書, 예禮를 정리하였다. 또 공자는 요순시대부터 진秦나라 목공穆公때까지의 역사를 기록하였다. 재미있게도, 공자는 하夏와 은殷의 문화를 기록하면서 문헌이 충분하다면 앞으로 100세대 후의 문화도 알 수 있겠다고 하였다. 주周의 문화는 이전의 하나라와 은나라의 형식문화와 바탕문화 위헤서 건립되었다. 공자는 주나라의 문화周禮를 추종한다고 밝혔다. 사마천은 <서전書傳>과 <예기禮記>는 공자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하였다. 공자는 은나라 시조인 설契과 주나라 시조인 후직后稷 및 당시 번성과 일상을 표현한 305편의 시를 현악에 맞춘 예악禮樂을 정리하였다. 공자는 말년에 <역易>을 좋아하였는데 책을 묶는 끈이 세번이나 끊어질 정도였다. 공자는 <시>, <서>, 예, 악 으로 제자들을 가르쳤는데 그 수가 3,000명에 달하였다. 공자는 이전의 노나라의 역사서를 바탕으로 노나라 당대의 역사서인 <춘추春秋>를 지었다. <춘추>는 노나라의 은공에서 시작하여 애공 때까지 12대에 걸친 역사서이다. 공자는 노나라의 정통성을 주나라외 은나라에서 찾고있다. 공자는 애공 16년 4월 기축일에 타계하였다. 향년 73세였다.
2. 공자와 육예六藝
육예六藝란 춘추시대 고유 학문인 <역易>, <시詩>, <서書>, <예禮>, <악樂>,<춘추春秋> 여섯가지를 말한다. 일설에 따르면 공자가 육예를 창작하였다고 하나, 실은 육예는 공자 이전에 존재했으므로 공자의 저작물이 아니다. <국어國語>에 따르면 사미가 초나라 태자에게 가르친 과목 중에 이미 <시>, <서>, <예>, <악>, <춘추>, <고지> 등이 들어있었다. 따라서 공자는 이러한 귀족 교육을 일반인에게 보급하여 가르쳤던 것이다. 공자의 제자 중에 안연顔淵은 말하기를 "<시>로써 뜻을, <서>로써 정치를, <예>로써 행실을, <악>으로써 화합을, <역>으로써 음양 이치를, <춘추>로써 명분을 계도했다."고 하였다. 공자는 몇가지 점에서 돋보인다. 첫째, 공자는 중국최초로 학술을 대중화하면서 강학과 유세의 풍습을 열면서 선비계층을 창조하는 발판이 되었다. 당시 평민은 몰론이거니와 귀족도 완전교육을 받기가 쉽지않았다. 이를테면, 진晉나라의 귀족인 한선자는 노魯나라에 가서 태사씨를 만나고 나서야 <역易>의 괘상과 노나라의 <춘추>를 볼 수 있었다. 재미있게도, 공자는 차별없이 교육한다는 취지에서 일정한 예물을 가져온 학생들을 상대로 육예를 가르쳤다. 또 공자는 임금들에게 끊임없이 유세하였고 학생들을 데리고 여러나라를 돌아다녔다. <논어>에 따르면 공자는 손가락 하나 까닥않고 오곡도 분간 못했다고 한다. 재미있게도, 공자는 말하기를 "벼슬을 하다가 여력이 있으면 학문을 하고 학문을 하다가 여력이 있으면 벼슬을 한다."고 하였다. 둘째, 공자는 그리스의 소피스트와 유사한 면이 있다. 공자는 규졍된 학비를 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예물은 반드시 받았으므로 최초로 강학을 직업으로 삼고 생활을 유지했던 것이다. 소피스트처럼 공자도 박학다식하였고 학생들에게 정치적 자질을 키워주었다. 셋째, 공자는 그리스의 소크라테스와 같은 업적을 남겼다.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와는 다르게 학비를 받지 않았지만 그리스인을 각성시키는 것이 자신의 신성한 의무라고 생각했듯이 공자 또한 말하기를 "신天이 내게 덕德을 부여하였다."고 하였다. 소크라테스는 인간행위의 기준을 도덕으로 보았으므로 귀납법을 이용하여 도덕성을 정립하였다. 반면에 공자는 인간 행위의 기준을 정명正名으로 보았고 인仁을 통하여 정명正名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보았다. 잘 알다시피. 소크라테스 사후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학통을 이어받고 서양철학의 기초를 다졌듯이 공자의 사후 맹자와 순자는 그의 학통을 이어받고 동양철학의 기초를 다졌다.
3. 공자의 하늘天
중국 문화는 주周나라 때 완성되었다. 공자의 노나라는 주나라의 후손국이었다. 공자는 말하기를 "주나라는 이전의 두 왕조를 거울삼았으니 나는 주나라의 빛나는 문화를 추종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공자는 주周나라 문왕文王과 주공周公의 업적을 받드는 것이 평생의 사명이었다. 재미있게도, 공자는 말하기를 "만약 내가 임용된다면, 나는 동주東周를 건설할 것이다."라고까지 하였다. 그럼, 공자는 하늘天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갖고있었을까. 한번은 왕손가가 묻기를 "안방 귀신보다는 부엌 귀신에게 잘 보여야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다. 공자는 답하기를 "하늘天에 죄를 지으면 빌 곳이 없다."라고 하였다. 또 공자는 제자 안연이 죽자, 통곡하기를 "하늘天이 나를 멸하는구나, 하늘天이 나를 멸하는구나."라고 말하였다. 하늘天이란 주재지천主宰之天에서 알 수 있듯이 의지를 가진 인격신, 즉 상재上帝이다. 따라서 공자가 말하기를 "나는 마흔에 미혹하지 않았고 쉰에 천명天命을 알았다."고 했을 때 천명天命이란 하늘의 계시이다. 또 공자는 말하기를 "도道가 실현되는 것도 계시命에 달려있고 실현되지 못하는 것도 계시命에 달려있다."고 하였다.
4. 정명론正名論
자로가 공자에게 묻기를 ''위나라에서 정치를 하게 된다면 무엇부터 하겠습니까."라고 물었다. 공자는 먼저 정명正名부터 하겠다고 답하였다. 정명正名이란 실재와 그 현상한 사물이 바른 이름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 이름은 사물의 본질이자 아이디어이다. 공자에 따르면 정政이란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비는 아비답고 자식은 자식다운 것이다. 즉, 정政이란 정正으로써 도道가 현상세계天下에서 현실화되는 것이다. 노나라의 실권자인 계강자가 묻기를 "도道를 위하여 무도無道한 자를 죽이면 어떻겠는가."라고 묻자, 공자는 답하기를 "위정자는 살인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善을 추구하면 백성도 선善하게 될 것이다. 군자의 덕德은 바람이고 소인의 덕德은 풀이므로 바람이 불면 풀은 저절로 수그러진다."고 하였다. 공자는 정명론을 실행하고자 <춘추>를 지었던 것이다. 춘추는 역사서로서 선善을 찬양하고 악惡을 물리치는 대의大義를 표상하므로 난신적자들을 경계할 수 있는 지침서였다
5. 인간 본성과 인仁
공자에 따르면 인간은 태어나면서 정직直하다. 정직이란 자신을 속이지 않고 남을 기만하지 않는 것이다. 만약 아버지가 양을 훔치자 아들이 그것을 일러바쳤다면 그 아들은 정직한가. 정직은 아버지가 아들을 감싸고 아들이 아버지를 감싸는 가운데 있다. 이것이 공자의 포인트이다. 미생고는 다리아래에 한 여자를 만나기로 했다. 시간이 지나도 그 여자는 보이지 않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다리고 있다가 강물이 불어서 미생고는 빠져죽었다. 공자는 미생고는 정직하지않다고 하였다. 어떤 사람이 식초를 빌리러오자 집주인은 이웃에서 빌려다가 그에게 주었다. 그럼, 이 집주인은 정직한가. 집에 식초가 없다면 사양해도 될 일이다. 공자에 따르면 정직한 사람은 자신에게 물어보는 사람이고 부정직한 사람은 남을 의식하는 사람이다. 공자는 교언영색巧言令色을 수치로 여겼다. 재미있게도 공자는 정직은 예禮에 따라서 행해야 한다면서, 말하기를 "용기도 예禮가 없으면 난폭이 되고 정직도 예禮가 없으면 난잡해진다."고 말하였다. 예禮란 모든 풍속, 관습, 사회 정치제도 등을 말한다. 따라서 정직의 포인트는 개인의 자유이고 예禮의 포인트는 사회 규범적 제제이다. 공자에 따르면 바탕質과 형식文이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군자가 된다. 바탕과 형식을 조율하는 것이 중용中傭이기 때문이다. 이 중용은 仁에 따라 이루어진다. 이것이 공자의 포인트이다. 안연이 인仁에 대하여 묻자, 공자는 답하기를 "인仁이란 극기복례克己復禮이다."라고 답하였다. 즉 인仁이란 자기를 이겨내고 예禮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럼, 인仁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행하는가. 인仁의 포인트는 자기마음에 비추어 남을 이해하는 것 즉, 추기급인推己及人이다. 공자는 자기가 싫어하는 것을 남에게 강요하지 않는 것을 서恕라고 하였다. 그리고 자기가 원하는 것을 남에게도 해주는 것이 충忠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서恕와 충忠을 살행하는 것이 바로 인仁을 실천하는 것이다. 공자는 스스로 밝히기를 자신의 도道는 하나의 도道로 일관되어있다 즉, 오도일이관지吾道一以貫之라고 하였다. 그 도道가 바로 인仁인 것이다. 인仁은 완전한 덕德이다. 공자는 인仁은 극기복례에서 나온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재미있게도 공자는 같이 배우더라도 전부 도道를 얻을 수는 없고 도道를 얻었더라도 전부 예禮를 닦을 수 없고 예禮를 닦았더라도 전부 다 실천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 공자에 따르면 뜻을 반드시 이루겠다고 집착하거나 고집부리는 것은 금기이다. 왜냐하면 군자는 의義에 밝고 소인은 이利에 밝기 때문이다.
6. 묵자墨子
사마천에 따르면 묵자墨子(470-391 B.C.)는 송宋나라 대부로서 방어술에 능하고 절약을 주장하였다. 공자와 같은 시기의 노나라 사람이라고도 하고 그 후 사람이라고도 한다. <회남왕서>에 따르면 묵자는 육예六藝에 공자의 사상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묵자는 유가의 예禮는 번잡하다면서 싫어하였고, 후한 장례는 재물을 낭비하고, 오랜 복상은 생업을 방해하므로 주도周道를 반대하였고 하夏나라의 정강을 따랐다. 묵자는 음악도 반대하였다. 따라서 묵자의 아이디어는 당시 대부나 군자의 생활양식과는 거리가 먼 평민의 수준이었다. 그러나 묵자의 의義는 실용적인 면이 있다. 묵자는 말하기를 "어떤 사람이 열 아들이 있는데 그 중 아홉은 놀고 한명만 일한다면 그 자는 더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먹는 사람은 많은데 일하는 사람은 적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묵자는 백성들이 서로 투쟁하는 이유는 서로를 차별하기 때문이라면서 겸애兼愛할 것을 주장하였다. 겸애의 도道는 타인에게 유리할 뿐만 아니라 자기에게도 이롭다. 이것은 다분히 공리주의적인 것으로서 인도仁道를 주장한 공자와구별된다. 묵자에 따르면 현상세계天下의 가장 큰 이익은 사람들의 겸애에 있고, 가장 큰 해악은 투쟁하는데 있으므로 전쟁을 방지해야한다고 하였다. 묵자墨子는 말하기를 "초나라, 오나라, 제나라, 진나라의 군왕들은 전쟁을 통하여 봉토를 늘리고 인구를 불렸지만 몇몇 나라가 이익을 얻었다고 해서 전쟁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의사가 병자에게 약을 처방하였는데 1만명 가운데 4-5명만 혜택을 입었다면 마땅한 약이라 할 수 없다."고 하였다. 벤담은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주장하면서 법과 도덕의 목적은 공리功利이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전쟁을 반대한 학자로서 맹자가 있다. 맹자는 전쟁을 좋아하는 자는 극형에 처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묵자는 전쟁이 이利롭지 못하기 때문에 반대했던 반면에 맹자는 전쟁이 의義롭지 못하기 때문에 반대하였다. 재미있게도 묵자는 하늘天의 뜻에 따르는 자는 겸애하고 서로 이롭게하므로 하늘로부터 상을 받고, 하늘天의 뜻을 거스르는 자는 서로 차별하고 해롭게 하므로 벌을 받을 것이라고 하였다. 묵자는 말하기를 "삼대三代의 성왕聖王인 우왕, 탕왕, 문왕, 무왕은 하늘의 계시天命에 순종하여 상을 받았고, 삼대의 폭군인 걸왕, 주왕, 유왕, 여왕은 하늘의 뜻天命을 거슬러 하늘天로부터 벌을 받았다."고 하였다. 묵자는 하늘로부터의 상벌은 개인의 행위에 의해 초래된 것이지 숙명에 따른 것이 아니라면서 숙명론을 부정하였다. 묵자의 정치론은 홉스와 유사한 면이 있다. 묵자에 따르면 하늘天은 신의 세계뿐만아니라 인간세계에도 존재해야한다. 태초에 사람들은 자기이익만을 좇아서 행동하였다. 그러자 부모와 자식들은 원망하고 뿔뿔이 흩어졌다. 백성들은 능력이 있어도 남을 돕지않고 남는 재물이 있어도 서로 나누지 않았다. 세상은 짐승의 세계처럼 혼란해졌다. 이제, 사람들은 혼란을 타계하기 위하여 덕망있고 유능한 인물을 우두머리로 세워서 천자天子로서 옹립하게 되었다. 천자天子은 명령을 내리고 백성들은 그 명령에 복종하게 되었다. 천자天子는 하늘天과 화동하고, 아랫사람은 윗사람과 화동하는 만큼 서로 사랑하고 서로 이익을 얻는다. 이것이 묵자의 포인트이다. 홉스에 따르면 인간은 태초에 자연상태에 있었다. 따라서 사람들은 만인이 만인에 대한 투쟁을 하였다. 이제 인간은 이 투쟁을 방지하기위하여 절대적인 지배자를 세우고 그에 복종하기로 약속한다. 이것이 국가의 기원이다. 묵자와 홉스에 따르면 종교는 국가 밖에서 독립적인 권력을 행사해서는 안된다.그렇지 않으면 국가가 분열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묵자의 천자天子는 군주와 교황을 겸한 존재이겠다.
7. <대학大學>
공자 사후, 춘추시대 말기와 전국시대를 지나, 한대漢代 초기에 이르기까지 유학자들의 저작들은 대씨戴氏의 <예기禮記>에 편집되었다. 송나라 때 주희는 <예기>에 편집된 <대학>의 저자를 증자曾子로 보았다. 증자曾子(505-435BC.)에 따르면 <대학>의 도道는 덕德을 밝히는 데 있다. 덕德있는 자는 자기의 덕德을 다스리고 난 후에 가정의 덕德을 다스리고 그 후에 나라의 덕德을 다스리고 그 후 현상세계天下의 덕德을 다스린다. 이것이 <대학>의 포인트이다. 그럼, 덕德은 어떻게 알게 되는가. 덕德은 격물치지, 즉 사물의 본질을 이해하는 지식에 이르렀을 때에 얻게 된다. 덕德을 위해서는 몸을 길들여야 한다. 즉, 수신修身을 하는 주된 이유는 덕德을 얻기 위하여 마음을 바르게 하는 데 있다. 마음에 분한 감정이나, 두려운 감정, 희열의 감정, 또는 근심과 걱정이 남아있으면 바를 수 없다. 증자는 마음이 딴 데 있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고, 먹어도 맛을 모른다고 하였다. 덕德을 제대로 보면 그것이 바로 성誠이다. 성誠이란 덕德이 참되게 실현된 것으로서 마음이 바르면 성誠을 실현하게 된다. 군자는 신독愼獨한다고 하는데 신독이란 홀로 있을 때에도 참된 것을 돌아보며, 그 덕德을 지키는 것이다.
8. <중용中庸>
<예기禮記> 중의 <중용中用>은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481-402 B.C.)의 저작이다. 사마천은 <사기史記>의 <공자세가孔子世家>편에서 자사가 <중용>을 지었다고 하였다. <중용中用>은 공자를 중심으로한 대화체로 되어있다. 공자에 따르면 군자는 중용에 따르고 소인은 중용에 역행한다. 군자가 중용에 따른다는 것은 시중時中을 추구한다는 말이고, 소인이 중용에 역행한다고 하는 것은 소인은 기탄없이 소인小人다운 것을 말한다. 시중時中은 때에 따라 적절하게 변화하는 것이다. <중용>에 따르면 현상세계天下의 도道는 다섯가지이고 덕德은 세가지이다. 다섯가지 도道란 군신, 부자, 부부, 형제, 친구이다. 그리고 세가지 덕德은 지知, 인仁, 용勇이다. 공자는 말하기를 "배움으로써 앎知에 이르고, 힘써서 인仁에 이르고, 창피함을 알면서 용기勇에 이른다고 하였다. <중용>는 신비주의적이다. 인간이 천명天命를 받은 것이 성性이고 성性을 따르는 것이 도道이고, 도道를 생활화하는 것이 교敎이다. 또 성誠은 천도天道이고 성誠의 실현은 인仁의 완성인 것이다. 성誠으로써 자기를 발견하고 또 사물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자기를 발견하는 것이 인仁이고, 사물을 발견하는 것이 지智이다. 성誠이란 인간 성性의 덕德이 내외합일의 도道로써 때에 맞게 드러난 것이다. 이것이 <중용>의 포인트이다. <중용>은 말하기를 "지성至誠으로써 자신의 본성을 최대한 발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타인의 본성과 사물의 본성도 최대한 발견할 수 있다."고 하였다.
<참고문헌>
풍우란. 박성규 역, 중국철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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