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역사적 맥락에서 본 주돈이
<송사宋史>에 따르면 주돈이는 송宋나라 도주 영도 사람이다. 주돈이(1017-73)는 원래 이름이 돈실敦實이었으나 영종 임금의 옛 휘를 피해서 돈이로 개명했다. 외삼촌 덕으로 분녕 주부가 되었으나 병으로 인하여 남강군으로 옮겨갔고 송宋나라 신종神宗 희녕熙寧 6년 57세의 나이로 타계하였다. 일설에 의하면 주돈이는 인품이 매우 고매하여 성품이 초연하고 대담했다고 한다. 주돈이는 도학자道學者로서 <태극도太極圖>와 <통서通書>를 지어 신의 리天理 밝히고 모든 사물의 시작과 끝을 연구했다. 주돈이는 주렴계라고도 알려져 있다.
2. <태극도太極圖>
주돈이의 <태극도>는 하나의 상象으로서 형상形象을 통하여 리理를 표현한 것이다. 주돈이는 말하기를 "무극無極은 태극太極이다無極而太極. 태극太極은 운동하여 양陽을 낳고 운동이 극極에 달하여 정지하면 음陰을 낳는다. 정지가 극極에 달하면 다시 운동한다. 한번 운동하고 한번 정지하는 것이 각각의 근원이다. 양陽과 음陰으로 나누어지면서 양의兩義가 세워진다. 양陽이 변화하여 음陰에 합함으로써 수水, 화火, 목木, 금金, 토土, 즉 오행五行이 생성되고 5기氣가 순조롭게 펼쳐지며 사계절이 진행된다. 오행五行은 음양陰陽으로 통일되고 음양은 태극太極으로 통일되는데 태극太極의 본本은 무극無極이다. 오행五行은 각자 그 성性을 갖고 생성된다. 무극無極의 참됨과 음양 오행의 정수가 오묘하게 합하여 응축하면 하늘의 도乾道는 남성이 되고 땅의 도坤道는 여성이 되어 두 기氣가 서로 감응하여 모든 사물을 생성시킨다. 모든 사물은 끝없이 생성되고 무한히 변화한다. 인간은 그 가장 빼어난 영靈을 갖고 생성되므로 정신은 그 형상을 밝힐 수 있다. 오성五性의 감정은 운동하여 선과 악善惡을 나누면서 모든 일萬事을 시작한다. 성인聖人은 중정인의中正仁義를 정定하여 정지를 주主로하여 인극人極을 세운다. 따라서 성인과 세계天地는 그 덕德을 합하고 해와 달은 그 빛을 합하고 사계절은 그 질서와 합하고 귀신은 그 길흉과 합하므로 군자는 인극人極을 닦으므로 길하고 소인은 거스르기 때문에 흉하다. 따라서 신의 도天道로써 음과 양을 세우고 세계地의 도로써 강함剛과 부드러움柔을 세우고 인간의 도人道로써 인仁과 義를 세웠다고 했다. 또 흘러나온 것은 마침내 되돌아가니 생사生死를 아는 것이라고 했은즉 위대하다. <역易>이로구나. 여기에 지극한 이치가 있다."고 하였다. 인간은 모든사물萬物의 영장으로서 태극의 리理와 오행의 성性을 타고났다. 태극의 리理는 순수지선至善이기 때문에 따라서 인간의 성性은 선善하다. 주돈이의 태극설은 <역易>에 나오는 태극설과 조금 다르다. <역易>에 따르면 "역易에는 태극이 있고 태극이 양의兩義(음양)를 낳고 양의는 4상四象을 낳고 4상은 8궤를 낳으며 8괘가 길흉을 결정하고 길흉이 대업을 낳는다."고 하였다.
3. <통서通書>
주돈이가 지은 <통서通書>의 본래 이름은 <역통易通>으로서 <역易>을 논한 저작이다. 주돈이는 말하기를 "운동하므로 정지하지않고 정지하므로 운동하지않는 것이 사물物이다. 운동하지만 운동이 없고 정지하지만 정지가 없는 것이 정신神이다. 운동하지만 운동이 없고 정지하지만 정지가 없다는 것은 운동하지 않는다거나 정지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사물은 통하지 못하나 정신은 모든 사물을 신묘하게 통한다."고 하였다. 태극太極은 정신으로서 사물의 운동법칙과는 다른 차원으로 사물에 작용한다. 이것이 주돈이의 포인트이다. 주돈이는 말하기를 "음양의 두 기氣와 오행은 모든 사물을 생성시킨다. 다섯五은 둘二로 귀착하고 둘二의 근본은 하나一이다. 즉 모든 사물은 하나一이고 하나一의 실재는 모든 사물에 나누어졌다. 모든 사물과 하나一는 각기 정닫하고 대소大小가 정해졌다."고 하였다. 하나一란 태극으로서 또한 리理이다. 음양의 두 기氣와 오행은 기氣이다. 주돈이는 송명도학宋明道學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리理와 기氣의 개념을 도입하였고 주희는 리理와 기氣을 완성하였다. 주돈이는 말하기를 "성誠은 성인의 근본本이다. 위대하도다, 처음 하늘乾元이여. 모든 사물이 그로부터 시작되었다함은 성誠의 시원을 말한 것이다. 하늘 도乾道의 변화에 따라 모든 사물이 각기 본연의 성性을 따를 때 성誠이 실현된다. 이것이 순수지선純粹之善이다. 따라서 한번一 음陰이 되고 한번一 양陽이 되는 것이 도道이다. 도道를 승계한 것이 선善이고 도道로 이루어진 것이 성性이라고 했다. 원형元亨이란 성性이 관통한 것이고 이정利貞이란 성性이 드러난 것이다. 위대하도다, <역易>이여, 성性의 계시命가 여기에 있도다."라고 하였다. 도道는 태극의 다른 이름이다. 주돈이는 말하기를 "성인聖人은 무엇보다 무욕無慾을 원한다. 무욕하면 텅비어 정지한 채로, 바로 행동할 수 있다. 텅비어 정지해있다는 것은 빛이 들어왔다는 것이고 밝아지면 통하게 된다. 바로 행동하면 공정公하고 공정하면 널리퍼진다. 빛이 통하여 공정함이 널리 퍼지면 성인에 가깝다."라고 하였다. 성인의 도道는 사욕私慾이 없으므로 지극히 공정하다. 재미있게도 세계天地의 도道 또한 지극히 공정하다. 이것이 주돈이의 포인트이다.
4. 장재張載
<송사宋史>에 따르면 장재張載는 송宋나라 장안 사람이다. 장재(1020-1077)는 젊어서 병법의 논의를 좋아하였다. 장재는 <중용>을 읽어보았지만 만족하지 못하여 불교와 도가道家를 전전하였으나 역시 만족하지 못하여 다시 육경六經을 공부하였다. 장재는 정명도 정이천 형제와 함께 도학을 정립하고 이단의 학설을 폐기하였다. 장재는 <정몽正蒙>을 지었고 송宋나라 신종 희녕 10년인 1077년 타계하였다. 장재는 장횡거張橫渠라고도 알려져있다.
+ 태허太虛
장재에 따르면 태허太虛는 무형無形이고 기氣의 본체本體이다. 장재는 말히기를 "태허에 기氣가 모이고 흩어지는 것은 마치 물에 얼음이 생기고 녹는 것과 같다. 태허太虛가 바로 기氣임을 안다면 무無는 없다."라고 하였다. 허공이 사물이 없는 태허太虛같이 보이는 이유는 아직 기氣가 응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장재의 포인트이다. 장재는 말하기를 "한 사물이면서 양체兩體인 것이 기氣이다. 하나이므로 정신神이고 둘이므로 변화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태허太虛는 한 사물이고 태허太虛의 기氣에 따라 음양陰陽의 두 성性이 작용한다. 기氣에 따라서 두 성性이 서로 부딪히면서 응측하여 모든 사물이 변화한다. 장재는 말하기를 "기氣은 아득히 태허에 퍼져있다. 기氣는 오르내리고 드날리면서 잠시도 멈추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또 장재는 말히기를 "기氣가 모이면 눈으로 볼 수 있는 형체가 생기고 기氣가 흩어지면 눈으로 볼 수 없는 무형에 머문다."라고 하였다. 기氣가 모여서 모든 사물이 생성되므로 모든 사물은 기氣를 함유하고 있다. 기氣의 본체는 태허太虛이고 태허는 무형無形이다. 장재는 말하기를 "사물의 생성에 선후가 있는 것이 신의 질서天序이다. 작고 크고, 높고 낮은 것이 서로 어울려 상형相形을 이루는 것이 신의 질서天秩이다. 신天은 순서에 따라 사물을 생성하고 사물이 형形을 띄는 데는 질서가 있다."고 하였다. 또 장재는 말하기를 "세계天地의 기氣가 취산공취聚散攻取하는 것은 백가지로 다르지만 그 리理는 순조롭고 망령됨이 없다."고 하였다. 사물이 생성되고 완성되는 데는 신의 순서와 질서가 따르는데 이것이 리理이다. 사물은 질료이고 리理는 형상이다. 즉, 질료에 형상이 들어가면 사물이 생성되어 완성된 것이다. 장재는 말하기를 "기氣는 본래 허虛하여 심연의 바닥에는 그 형상이 없다. 기氣는 감동하여 생기고 모이면 상象을 이룬다. 상象이 있으먼 그 대립하는 것이 있고 그것은 반드시 상반된다. 상반되므로 원수가 생기고 원수는 반드시 화합하고 화해한다. 따라서 사랑과 증오의 감정은 똑같이 태허太虛로부터 나와서 결국 사물화物慾된다. 갑자기 생겨 홀연히 완성되고 털끝 만큼의 틈도 용납하지 않는 것이 정신神이다."라고 하였다. 기氣가 모여서 상象이 생기고 이 상象은 상반하는 물질과 합하여 완성되기를 기다린다. 즉 사랑과 증오의 감정이 생성되면 그 상반된 것, 즉 물질과 합하여 사랑과 증오는 사물화된다. 이것이 장재의 포인트이다. 장재는 말하기를 "조화造化에 의하여 사물화된 것들은 똑같은 것이 하나도 없다. 이로부터 사물화된 것들은 많지만 어느 한 사물도 음양이 없는 것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이로써 세계天地의 변화는 이단二端뿐임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기氣는 본래 음양의 성性, 즉 이단二端을 내포하고 있으므로 기氣가 모여서 생성되고 완성된 사물에는 음양陰陽이 없을 수 없다. 장재는 말하기를 "태허太虛에는 기氣가 없을 수 없다. 기氣가 모이면 사물이 되지 않을 수 없고 사물이 흩어지면 태허太虛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다. 이렇듯 나오고 들어가는 순환은 모두 필연적으로 그러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기氣가 모이면 사물화되고 기氣가 흩어지면 사물이 소멸한다. 이러한 쉼없는 순환은 세계의 보편현상이다.
+ 성性
장재는 말하기를 "인간의 호흡은 강함剛과 부드러움柔이 서로 마찰하는 것으로, 하늘乾과 땅坤이 닫히고 열리는 형상形象이다. 깨어있을 때는 그 형상形象이 열려서 외부와 교섭하고자 하고 꿈을 꿀 때는 그 형상形象이 닫혀서 기氣가 내부로 모인다. 깨어있는 때는 눈,귀 등의 인식능력으부터 새것이 나타나고 꿈에서는 기억習心의 인연緣으로부터 옛것이 나타난다."고 하였다. 또 장재는 말히기를 "태허太虛로부터 신天이라는 이름이 생겼고 기화氣化로부터 도道라는 이름이 생겼다. 허虛와 기氣를 합하여 성性이라는 이름이 생겼고 성性과 지각知覺이 합하여 마음心이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하였다. 아주 멋진 말이다. 장재는 말하기를 "형形이 있고 난 후에 기질氣質의 성性이 생겼으니, 그것이 잘 상반된 것이 세계天地의 성性이다. 따라서 기질氣質의 성性에 따라서 군자君子가 되는 것이다."고 하였다. 인간은 기氣가 모여 형形이 생기고 그 형形에는 성性이 새겨져있다. 그래서 기질지성氣質之性이다. 그 기질지성은 세계天地의 짝 상象을 갖고 있는데 그것이 세계지성天地之性이다. 장재에 따르면 신天과 도道가 합하여 성性을 생성시켰다. 신天는 태허太虛이고 도道는 기화氣化이다. 장재는 허虛와 기氣를 합한다는 말이 기氣와 기氣를 합한다는 말과 모순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장재는 말하기를 "신天으로부터 나온 성性은 도道가 통하여 이루어진 것이므로 희미하거나 밝은 기氣에 의해서 은폐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신天이라는 이름은 태허로부터 생겼다. 따라서 신天은 태허太虛이다. 태허는 기氣의 본체이므로 기氣의 밖에는 신天이 존재할 수 없다. 기氣의 상象과 형形은 기질지성氣質之性과 세계지성天地之性으로 이원화된다. 장재는 말하기를 "모양狀이 있는 것은 전부 유有이고 모든 유有는 전부 상象이다. 그리고 모든 상象은 전부 기氣이다. 기氣의 성性은 본래 허虛이고 정신神이니 정신神과 성性은 기氣에 붙어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기氣에는 그 성性이 있다. 기氣가 모여서 인간이 되므로 인간은 성性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장재의 포인트이다. 장재는 말하기를 "신의 성天性이 인간에 놓여있는 것은 마치 물의 성性이 얼음에 놓여있는 것과 같다. 얼고 녹는 것은 다르지만 똑같이 물이다."라고 하였다. 신의 성天性은 기氣의 성性이다. 장재는 말하기를 "신天의 능력良能은 본래 나의 양능인데, 다만 나에 의해서 상실되었을 뿐이다."고 하였다. 또 장재는 말하기를 "기氣는 본래本 하나됨을 즐기고湛一 공격하고 쟁취하는 것을 바란다. 입과 배는 음식을 바라고 코와 혀는 냄새와 맛을 바라는 것이 공취지성攻取之性이다. 덕德을 아는 자는 그것들을 누릴 따름이고 욕구 때문에 마음이 얽매이지 않으므로 작은 것 때문에 큰 것에 피해를 주거나 말단 때문에 근본을 상실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기氣가 모여 인간이 된다. 인간은 기氣의 성性을 갖고있다. 인간은 그 성性을 신天과 공유한다. 기질지성氣質之性과 천지지성天地之性이 바로 그렇다.
+ 신인합일天人合一
장재는 말하기를 "자기 마음을 확대大其心하면 현상세계의 사물과 일체體를 이룰 수 있다. 사물과 일체되지 않는 것은 마음이 일체되지 않은 것이다. 세상사람들의 마음은 좁은 견문에 갇혀있다. 그러나 성인은 성性을 다하여 견문에 갇혀있지 않으므로 현상세계의 모든 사물이 자기 아닌 것非我이 없다고 본다. 그래서 맹자는 마음을 다 발휘하면 성性을 알고 신天을 안다고 말했다. 신天은 무한無限하여 밖이 없으나 인간의 마음은 밖이 있으므로 신의 마음天心과 합일할 수 없다. 견문지지見聞之知는 사물과 접촉하여 얻은 지식이고 덕성을 통한 지식이 아니다. 덕성지지德性之知는 견문에서 싹트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성인聖人은 자기만을 아我로 여기지 않고 모든 사물을 자기로 여기므로 비아非我가 없다. 성인은 현상세계인 인간의 세계와 본체세계인 신의 세계 전체를 대아大我로 여긴다. 이런 경지에 이르면 인간과 신은 합하여 하나가 된다. 장재는 말하기를 "성性이란 모든 사물의 일원一源이므로 나의 사유물이 아니다. 오직 대인大人만이 그 도道를 발휘할 수 있다. 따라서 대인은 설 때는 반드시 남과 함께 서고, 알 때는 반드시 널리 같이 알고 사랑할 때는 반드시 모두를 사랑하므로 성취할 때 홀로 성취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성인은 현상세계에서 신인합일天人合一의 도道를 실천하면서 성인성性人性을 드러낸다. 장재는 말하기를 "성誠을 비추는 빛明에 의하여 알게된 지식은 신덕天德에 의한 양지良知로서 견문에 따른 사소한 지식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그럼, 성誠을 비추는 빛明이란 무엇인가. 장재는 말하기를 "신과 인간이 다르게 작용하면 성誠을 논할 수 없고 신과 인간이 다르게 인식하면 아직 다 빛나지 않은 것이다. 성誠을 비추는 빛明이란 성性과 신도天道에 조금의 차별도 없을 만큼 드러낸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성誠이란 신인합일天人合一이 현실화된 경지이고 명明은 그 기능이다. 장재는 말하기를 "하늘乾을 부친으로 땅地을 모친으로 둔 미미한 자식이 그 가운데 살고 있으니 세계天地의 터는 나의 몸體이고 세계天地의 지도자는 나의 성性이다."라고 했다. 세계天地 내內 존재인 인간은 세계天地性을 발견하면서 인간성人間性을 실현하게 된다는 것이다. 장재는 말하기를 "도리를 어기는 것이 패덕悖德이요. 인仁을 해치는 것이 도둑賊이다. 악惡을 행하는 자가 못난 자이고 형形을 실천하는 자는 세계天地를 닮는자肖子이다."라고 하였다.
+ 불교와 도교와 비판
장재에 따르면 불교는 무생無生을 추구하므로 윤회를 벗어나서 한 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으려고 한다. 그리고 도교는 장생長生을 추구하므로 삶을 좇아 존재에 집착하므로 변화를 거부한다. 반면에 도학道學은 기氣가 모여서 인간이 되고 기氣가 흩어지면 더 이상 인간이 아니되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굳이 무생無生을 추구하지 않으며, 죽음도 필연적인 것으므로 장생長牲을 추구하지 않는다. 살아서는 인간사에 충실하고 죽어서는 편안히 쉬는 것이 도학道學의 입장이다. 도학자들은 비록 불교와 도교의 영향을 받았지만 불교와 도교를 배척하고 유가儒家로 자처했다.
5. 정호程顥와 정이程?
<송사宋史>에 따르면 주돈이가 남안에서 아전 노릇을 할 때 통판군사인 정향程珦이 주돈이의 비상한 용모와 학식을 보고 사귀었고 자기 아들인 정호程顥와 정이程?를 그에게 보내어 공부시켰다. 주돈이는 늘 정호와 정이 형제에게 공자와 안자의 뜻을 좇게하였으니, 이것이 이정二程 학문의 원류가 되었다. 정호程顥(1032-1085)는 대대로 중산에 살았지만 나중에 개봉을 거쳐 다시 하나으로 이사했다. 정호는 성품이 뛰어나고 도道를 지녔고 온화하고 순수한 기풍이 몸에 베어 있었는데 15-16세 때부터 주돈이의 학문에 들어가 구도求道의 뜻을 품었다. 정호는 여러 학파의 책을 널리 읽으며 거의 10년 넘게 도교와 불교에 출입하다가 육경六經으로 돌아와 마침내 도道를 터득하였다. 정호는 정명도라고도 불린다. 정이(1033-1107)는 정호의 동생으로서 읽지 않은 책이 없었으며 육경六經에 통달하였고 성誠에 근본을 두었다. 정이는 <역易>과 <춘추春秋>에 대한 전傳을 지어 후세에 전했다. 정이는 정이천이라고도 불린다. 정호와 정이의 도학은 나중에 송명도학에서 리학理學과 심학心學으로 갈라져서 정주程朱파와 육왕陸王파로 나누어졌다. 동생인 정이, 즉 정이천은 주희 성리학의 선구가 되었다. 반면에 형인 정호, 정명도는 육상산과 왕양명 심리학의 선구가 되었다.
+ 리理
언급했다시피, 기氣의 개념을 확립한 학자는 장재였다. 정호와 정이 형제 즉, 이정二程은 리理의 개념을 확립했다. 이정二程은 말하기를 "신의 리天理라고 하는 저 도리는 무한함 만이 있을 뿐이다. 신의 리天理는 요堯임금 같은 선인 때문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걸傑임금 같은 악인 때문에 소멸하는 것도 아니다."고 하였다. 리理는 영원한 존재이고 그 양量의 증감이 없으므로 부족하지도 않고 넘치지도 않는다. 사람이 리理를 인식하거나 말거나 리理는 영원한 존재이다. 이정二程은 말하기를 "사람이 자신을 반성하지 않으면 신의 리天理는 소멸한다고 했거니와 신의 리天理는 온갖 이치를 구비하고 있고 원래 조금도 부족하지 않으므로 누구나 자신身을 반성하면 성誠이 실현된다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요堯임금이 발휘한 도道나 순舜임금이 발휘한 도道는 모두 하나의 리理에서 나온 것이므로 보편적 준칙이다. 그 보편적 리理는 모든 인간의 마음에 조금도 부족하지 않게 구비되어 있으므로 누구나 자신을 성찰하면 성誠이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이정二程은 말하기를 "'모든 사물이 나我로부터 나온 것이다.'라는 것은 인간 만이 그러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물이 그러한데, 모든 것은 리理에 따라 나오고 들어간다. 단 다른 사물은 리理를 이용推할 수 없지만 인간은 이용할 수 있다. 리理는 이용되더라도 조금도 증가하거나 감소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리理는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사물에 구비되어있지만 인간 만이 그 리理를 이용할 수 있다. 리理는 이용되더라도 줄거나 늘지않고 변하거나 동요하지 않는다. 이것이 적연부동이다. 이정二程은 말하기를 "리理는 현상세계天下에 있는 단 하나의 리理이므로 세상의 기준으로 이용된다. 세계天地와 삼왕三王에게 묻더라도 변하지 않는 것이 리理이다."라고 했다. 또 이정二程은 말하기를 "리理는 인仁으로 간주되어 오기도 했고 지知로 간주되어 오기도 했다."고 했다. 이정二程은 말하기를 "'리理는 고요하여 운동하지 않으므로 느낌感으로 통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신의 리天理가 구비되어 있어서 조금도 부족함이 없기 때문이다. 리理는 운동하지 않으므로 고요하다. 비록 운동하지 않지만 느낌으로 통하게 되면 그 느낌은 리理의 밖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이정二程은 말하기를 "사물이 있으면 반드시 법칙이 있다. 부친은 자애에 머물고 자식은 효에 머물고 임금은 인仁에 머물고 신하는 공경에 머무는 것이 그것이다. 모든 사물과 모든 일은 저마다 제자리가 있으니 저마다 제자리를 얻으면 편안하고 제자리를 잃으면 어그러진다. 성인은 모든 사물을 순리에 따라 다스리는 것이지 사물의 법칙을 새로 만드는 것이 아니니, 오직 각 사물이 제자리에 머물게 할 따름이다."고 하였다. 모든 사물은 당위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성인은 사물의 당위성을 찾아서 그에 따라 다스리면 모든 사물은 리理의 법칙에 따르게 된다는 것이다. 리理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플라톤에 따르면 구체적인 사물은 볼 수 있지만 사유할 수 없고 이데아는 사유할 수 있지만 볼 수 없다고 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사물을 질료와 형상으로 나누었다. 질료는 시공내에 존재하는 구체적 사물 또는 그 원질原質이고 형상은 시공을 초월하여 존재하므로 영원 불변하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술어로 하자면 리理는 형상이고 기氣는 질료이다. 이정二程은 말하기를 "소는 짐을 싣기위한 것이고 말은 사람이 타기위한 것이다. 이것은 그들의 그 성性 때문이다. 왜 소를 타지않고 말에게 짐을 싣지 않는가. 리理에 합당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나중에 보겠지만 정호程顥의 심학心學은 구체적 사물을 떠난 리理의 영원불변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심학心學과 리학理學
심학心學의 선구자인 정호程顥는 형이상자形而上者로서의 리理를 부정하면서 오직 자연自然적인 형이하자로서의 리理만을 인정하였다. 정호는 곽상郭象과 맥락을 같이 한다. 곽상에 따르면 대붕이 구만리를 날고 뱁새는 나무사이를 나는 것에 불과한 것은 어떤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자연적 신체조건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즉 곽상과 정호는 자연自然을 리理로 보았다. 이러한 관점은 나중에 심즉리心卽理이론으로 이어진다. 반면에 리학理學의 선구자인 정이는 형이상자로서의 리理를 인정한다. 정이는 왕필과 맥락을 같이 한다. 왕필에 따르면 모든 사물이 존재하는 것은 반드시 그 사물의 리理에 따른 결과이다. 따라서 모든 사물은 리理에 따라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정호와 정이는 송명도학을 창건했는데 그 도학의 양대파벌은 심학心學과 리학理學인 것이다.
+ 불교비판
정호程顥는 불교를 비판하면서 말하기를 "성인聖人은 공정한 마음에 전념하고 세계天地의 모든 사물萬物의 이치를 탐구하여 각 사물이 그 본분에 합당하도록 한다. 그러나 불교도는 자기의 사심私心에 전력하니 어찌 성인과 같겠는가. 성인의 순리는 평이하여 쉽게 나아가나 이단異端은 조작을 일삼아 크게 소모적이므로 자연自然이 아니다. 따라서 매우 잘못 되었다."고 하였다. 정이程? 또한 불교를 비판하면서 말하기를 "부처의 교설은 식견이 없다고 할 수 없고 오히려 심오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그 핵심은 자기이익自私自利을 벗어나지 못한다. 세계사이天地間에는 탄생이 있으면 죽음이 있고 즐거움이 있으면 슬픔이 있건만 불교는 간교와 거짓을 꾸며 생사윤회를 벗어나 번뇌를 없애고자한다. 그것은 결국 자기이익으로 귀결되는 것이다."고 하였다.
+ 형이상과 형이하
정호程顥는 형이상과 형이하의 구분을 중시하지 않았다. 정호程顥는 말하기를 "<계사繫辭>에 형이상의 존재가 도道이고 형이하의 존재는 기器라고했다. 또 신天의 도道로써 음양을, 땅地의 도로써 강함剛과 부드러움柔을, 인간의 도道로써 인仁과 義을 세웠다고 하였고 하나一가 음陰이 되고 하나一가 양陽이 되는 것 즉, 일음일양一陰一陽이 도道라고 하였다. 음양은 형이하의 존재이고 또 도道 또한 언급했으니 이야말로 상하上下를 뚜렷이 밝힌 것이다. 원래 음양만이 도道일 뿐이니 이것을 묵묵히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였다. 또 장재는 말하기를 "위의 신上天의 일은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으니 지극하다고 했다(중용). 신天의 본체體가 역易이요, 신天의 리理가 도道요, 신天의 기능이 정신神이요, 신天의 계시命가 성性이다. 그 성性에 따르는 것이 도道요, 도道를 실천하는 것이 교敎이다. 맹자는 그 중에 크게 발하는 기氣 즉, 호연지기浩然之氣가 있다고 했으니 가히 완벽하다. 맹자는 마치 정신神이 위에서 임하 듯 좌우에 서있는 듯 하다고 하면서 기적과 같은 일에 대하여 말하기를 "성誠이 은폐될 수 없는 것은 이와같은 것이다."라고 했던 것이다. 상하上下를 관통한다는 것은 이것을 넘지 않는다. 형이상形而上은 도道이고 형이하形而下는 기器라고 말해야 하지만 기器역시 도道이고 도道역시 기器이다. 도道의 존재를 얻기만 하면 지금과 나중, 자기와 타인에 얽매이지 않게된다."고 하였다. 정호는 도道가 리理인지 기氣인지, 헝이상학적 존재인지 형이하학적 존재인지 명확히 구별하지 않았다. 반면에 정이는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을 명확히 구별하였다. 정이는 말하기를 "일음일양一陰一陽이 도道라고 했으나 도道는 음양이 아니고 한번 음이되고 한번 양이 되는 판所이다."라고 하였다. 정이는 음양은 도道가 아니라고 못박으면서 음양은 도道의 판所에서만 드러나게 된다고 하였다. 정호가 이해한 도道는 구체적인 형이하적 도道이고 정이가 이해한 도道는 추상적인 형이상적 도道이겠다.
+기氣
정호는 기氣를 그다지 많이 언급하지 않았지만 정이는 모든 존재는 기화氣化에 따라서 사물화된다고 하였다. 정이는 말하기를 "운석隕石은 기氣로부터가 아니면 사물화種될 수 없고 기린 역시도 기화氣化되지 않으면 사물화될 수 없다. 태초에 사람이 생길 때도 이와 같았다. 바닷가의 모래사장이 드러나면 생기는 온갖 생물과 초목은 이전에 사물화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인류는 이미 생겼은즉 기화氣化에 의하여 태어나는 사람은 없다."고 하였다. 정이는 말하기를 "열리고 닫히며 오고가는 기氣의 현상이 호흡에 나타나는데 들숨이 반드시 날숨과 같다고 볼 수 없다. 기氣는 저절로 생기는 것이고 인간의 기氣도 진원眞元으로부터 생긴다. 신天의 기氣 또한 끊임없이 생기고 또 생긴다."고 하였다. 진원眞元 또한 기氣이다. 정이는 말하기를 "진원의 기는 기氣가 생기는 판所으로서 외기外氣와는 서로 섞이지 않지만 외기外氣에 의해서만 함양된다. 인간이 세계天地의 기氣속에 사는 것은 물고기가 물 속에 사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하였다. 인간이 세계天地의 기氣 속에 살면서 호흡하는 기氣가 외기外氣이다. 인간이 내쉬는 기氣는 들이마신 후에 생긴 기氣가 아니라 진원眞元으로부터 나온 기氣이다. 재미있게도, 정이는 진원眞元의 기氣의 속성에 대하여 명확히 말하지 않았다.
+ 성性
정호는 성性에 관하여 간략하게만 언급하였다. 정호는 말하기를 "신天이 스스로 그러한 것自然을 가리켜 신의 도天道라고 한다. 신天이 모든 사물에 부여한 것이 신의 계시天命이다."고 하였다. 정호는 말하기를 "하나一로부터 음陰이 나오고 하나一로부터 양陽이 나오는 것이 도道이니 스스로 그러한自然 도道이다. 도道를 이어받은 것이 선善이다. 선善은 도道에서 나온 것이므로 기능用이 있는데 원元은 선善의 으뜸이다. 도道에 이르는 것은 오직 성性 뿐이니 각각의 성명性命으로 바르게 한다."라고 하였다. 신天이 모든 사물에 부여한 것이 명命이다. 즉, 각 사물이 신申으로부터 부여받은 계시命가 성性이다. 따라서 명命과 성性은 관점에 따라서 나누어졌을 뿐 같은 개념이다. 이러한 각 사물의 성性, 명命은 신의 도天道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성性은 도가에서는 덕德이라고 하는데 덕德은 득得이라는 뜻이다. 정호는 말하기를 "타고난 것이 성性이라고 했는데 성性은 기氣이고 기氣는 성性이다. 이것이 생성生性이다. 생성된 인간의 기품氣稟은 선악이 있지만 성性 가운데 두 선악의 물질이 대립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어려서부터 선한 사람이 있고 악한 사람이 있으니 기품이 저절로 그러한 그러한 것이다. 선善은 물론 성性이지만 악惡 또한 성性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인간은 구체적 사물로서 성性을 타고난다. 이러한 생성은 도道에 따른 것으로서 인간은 또한 도道에 의하여소멸한다. 또 성性은 기氣이다. 이것이 정호의 포인트이다. 반면에 정이는 말하기를 "신의 계시天命는 형식義의 측면에서는 리理이고 인간의 측면에서는 성性이고 몸의 측면에서는 마음心이지만 실제로는 하나이다. 마음은 본래 선善하지만 일단 생각이 발현되면 선善도 있고 불선不善도 있다. 이미 발현된 것은 정情이지 마음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명命, 리理, 성性, 심心은 다 같은 말로서 신天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이것이 정이의 포인트이다. 성性은 가능성으로 있을 때 미발未發이라 불리고 성性이 현실화되었을 때 이발已發이라 불린다. 이발已發은 곧 정情이다. 주희는 장재張載의 심통성정心通性情 개념을 마음의 미발未發과 이발已發로 해석하였다.
+ 정호程顥의 수양법
정호에 따르면 인간은 실제로 세계의 모든 사물과 일체이지만 자신에 집착함으로써 나와 세계를 나누게 되었다. 정호는 말하기를 "학문하는 사람은 먼저 인仁을 인식해야한다. 인仁이란 사물과 혼연일체가 되는 것으로 의義, 예禮, 지智, 신信이 모두 인仁이다. 이 리理를 인식한다는 것은 경敬이 성誠으로 실현되는 것이므로 그것을 막거나 애써 찾을 필요가 없다... ... 맹자는 모든 사물이 내게 구비되어 있으니 자신을 돌아보아 성誠을 이루게 되는 것이 큰 즐거움이라고 했다. 성誠이 이루어지지 못하면 여전히 두 사물이 대립하게 되므로 자기가 타자와 합하려고 해도 이룰 수 없으니 어찌 즐겁겠는가. 장재張載의 <정완訂頑>은 이 본체에 대하여 풀이하고 있다. 바르게도 말고 잊어버리지도 말고 덧붙여 늘이지도 말고 추호의 억지도 부리지 않음으로써 이 본체의 도道가 실현된다. 이것이 실현되면 합일合一이 경지가 현실화된 것이다."라고 하였다. 세계의 모든 사물은 나와 일체임을 알기 위해서는 인仁의 인식이 필요하다. 이 인仁은 자기와 타자가 합일되는 것으로서 그 실현된 것이 성誠이다. 장재張載는 말하기를 "도道가 있고 리理가 있는 곳에서 신天과 인간은 통일一된다. 크게 피어나는 기운 즉, 호연지기浩然之氣는 나의 기氣이다. 그 기氣를 길러 해를 끼지지 않으면 온 세계天地에 퍼져나갈 것이다. 조금이라도 사심私心에 가려지면 꺼림직하여 기氣가 죽게 되는데 자신이 작아짐을 느끼기 때문이다. 사악하지 않게 생각하고 불경不敬하지 않게 나아간다면 어찌 합일合一을 못 이루겠는가."라고 하였다. 호연지기는 본체의 기氣이므로 이 기氣를 잘 길러야 신인합일天人合一에 도달한다. 이것이 정호의 포인트이다.
+ <정성서定性書>
<정성서定性書>는 정호程顥가 장재張載에게 보낸 답장편지이다. 정호는 편지에서 말하기를 "선생께서는 성性을 정定했더라도 운동하지 않을 수 없고 여전히 외부사물에 잡혀있다고 했는데 현명하게 생각하셨으니 제가 뭘 더 말하겠습니까. 그러나 저의 소견을 좀 더 덧붙일까 합니다. 이른바 정定이란 운동動도 정定이고 정지靜도 정定으로서 거부하거나 받들지도 않으면서 안밖內外의 구별이 없음을 말합니다. 만일 외부사물을 자신 밖의 존재로 여겨 억지로 그것과 부합하려한다면 이는 자기의 성性을 안밖으로 구분하는 것입니다. 또 성性이 외부사물을 좇아간다면 당연히 성性은 밖에 놓일 텐데, 안에는 무엇이 남아 있겠습니까. 이는 외부의 유혹을 끊으려고 해보지만 성性은 내외內外가 없다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성性을 내외의 두 본本으로 나누면서 어찌 정定을 논하겠습니까. 세계天地는 그 마음心으로써 모든 사물을 펼치지만 무심無心하고 성인은 정情으로써 모든 일을 처리하지만 무정無情하므로 군자는 준비하면서 대담하게 도래하는 사물에 순응하는 것을 먼저 배워야 합니다. <역易>에 따르면 정직하면 길하고 재앙이 없지만 마음이 왔다갔다하면 오직 현재 생각에먼 쏠리게 된다고 했으므로 외부 유혹의 제거에만 골몰하면 하나를 없애더라도 또 다른 하나가 생기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니 날마다 애써도 부족할 뿐이고 더우기 유혹의 씨는 무한하므로 제거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정情은 폐단이 있으므로 도道에 도달하지 못하고 이기심自心과 편견用智를 낳습니다. 이기심이 있으면 일의 목적에 따라 사물에 응할 수 없고 편견이 있으면 자연스럽게 깨달을 수 없으니 이제 외부사물이 악하다는 마음을 갖고서, 있지도 않은 사물을 비추려는 것은 거울을 돌려놓고 사물을 비추는 격입니다. <역易>에 따르면 등을 구부려 자기를 보지 못한 채로 정원을 거닐면 자신을 볼 수 없다고 했고 맹자에 따르면 편견智을 미워하는 이유는 큰 오점鑿을 남기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밖을 부정하고 안을 긍정하는 것보다는 안밖의 구별을 무시하는 것이 낫고 안밖이 무차별화 되면 저절로 문제가 없어집니다. 문제가 없어지면 정定하게 되고 정定하게 되면 빛明나게 되니 빛나게 되면 사물들을 응하는 데 무슨 장애가 있겠습니까. 성인의 기쁨은 기쁨에 해당하는 사물에서 오고, 분노는 분노에 해당하는 사물에서 오니 성인의 기쁨과 슬픔은 마음으로부터가 아니라 사물로부터 이어져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성인이 사물로부터 나오는 것에 불응하겠습니까. 또 어찌 밖을 따르는 것이 잘못이고 안에 있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 옳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이기심과 편견에서 나온 기쁨과 분노를 어찌 성인의 기쁨과 분노에 견주겠습니까. 인간의 정情 가운데 가장 쉽게 발동하고 제어하기 어려운 것이 분노입니다. 그러나 분노할 때 그 분노를 잊고 그 리理의 시비是非를 관찰할 수 있게되면 외부의 유혹은 미워할 것이 못됨을 알 것이므로 도道의 과반은 깨달은 것일 겁니다."라고 하였다. 정定이란 마음의 안밖內外를 무차별화하는 것이다. 마음을 정定하라는 것은 마치 거울처럼 모든 사물을 비추지만 거울 자체는 동요함이 없는 경우와 같다. 인간의 마음이 세계天地의 마음과 합하면 내외의 구별이 없어지므로 주관과 객관의 구별도 사라지게 된다. 장자에 따르면 지인至人이 마음쓰기用心는 거울과 같아서 거절도 환영도 않고 응대하면서 담아두지 않기에 사물을 제압할 뿐 상처받지 않는다고 하였다. 또 정이에 따르면 군자는 사물을 부리지만 소인은 사물에 부림당한다고 하면서 분노하거나 기뻐할만한 일을 발견하고 그것에 빠져드는 것은 고역이므로 성인의 마음은 고요한 물과 같다고 하였다. 성인은 정감으로 모든 사물에 응하여 기쁨과 분노를 나타내지만 그 기쁨과 분노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물에서 나오는 것이다. 성인이 이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이기심과 편견이 없기 때문이다. 이기심이 없으면 준비된 채로 공정하게 되고 편견이 없으면 사물이 도래할 때 순응할 수 있게 된다. 즉, 마음은 고요하지만 항상 빛나고 빛나면서도 항상 고요하게 된다. 수양을 통하여 사물과 일체가 되면 그것이 최고경지로서 인간의 성性은 진성盡性이 된다. 정호는 말하기를 "리理를 바라보며 성性을 다함으로써 명命에 이른다. 이 세가지는 한꺼번에 이루어지는 것이니 원래 순서가 없다."고 하였다. 이것이 인仁이고 인仁이 실현된 것이 성誠이다.
+ 정이의 수양법
정이는 경敬을 통하여 리理를 찾을 것을 특히 강조하였다. 정이는 말하기를 "경敬을 써서 함양해야 하니 배움의 진보는 앎知에 달려있다."고 하였다. 경敬이란 마음을 바로 잡는 것이다. 정이는 말하기를 "안內을 바로잡음으로써 경敬하면 마음의 주인은 비어虛 있게 되고 저절로 부정한 마음이 없어지니 어찌 비우虛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반드시 정진하되 경敬을 바탕으로 도모해야한다. 이 도道는 가장 간단하고 가장 쉽고 게다가 공부를 덜 수 있다."고 하였다. 경건敬하면 마음이 비게 되는데 마음이 꽉 찯다고도 말할 수 있다. 정이의 스승인 주돈이는 정靜를 강조하였고 정호는 정定을 강조하였는데 경敬은 정靜과 정定 모두와 다르다. 정호의 정定은 동動과 정靜을 모두 통괄한 개념이었다. 정이는 수양법에 관하여 말하기를 "정심正心과 성의誠意를 가장 먼저 해야한다. 성의성誠意는 치지致知에 달려있고 치지致知는 격물格物에 달려있다. 격格은 이른다至는 뜻이다. 예컨대 조상신이 와서 이른다祖考來格는 격格과 같다. 사물은 저마다 그 리理가 있으니 그 리理를 연구하여 밝혀야 한다. 리理를 연구하는 데는 여러가지가 있다. 책을 읽어서 리理의 형식義을 밝히거나 고금의 인물을 논하여 잘잘못을 따지거나 일상사에 합당하게 대처하는 일 등이 모두 리理를 연구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럼, 격물格物은 모든 사물을 연구해야 하는가 아니면 한 사물만을 연구하여 리理에 관통하는가. 정이는 말하기를 "어찌 한 사물을 격格하여 모든 리理를 알겠는가. 한 사물을 격格하여 온갖 리理에 통달한다는 것은 비록 안자顔子의 경우라도 감히 이 도道와 같지 않을 것이다. 오늘 한 가지 격格하고 내일 또 한 가지 격格하여 습관이 오래 누적된 후에라야 저절로 관통하는 공간이 생길 것이다."라고 하였다. 격물格物은 사물의 리理를 알게 한다. 정이는 말하기를 "실리實理란 실제로 바른 것是을 알아 보게됨으로써 실제로 그른 것非을 본 것이다. 무릇 마음으로부터 실리實理를 얻으면 저절로 판단別이 선다. 귀로 듣고 입으로 말하는 것은 마음이 실제로 보지 못한 것이다. 만약 봐서 알았다면 불편한 것에 안주하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 물과 불을 밟으면 사람은 모두 피하게 되는데 이것이 실제로 봐서 아는 것이다. 만약 불선不善을 마치 끓는 물 만지듯 피하는 마음가짐이라면 저절로 판단別이 설 것이다. 일찌기 호랑이에 물려 본 적이 있는 사람은 보통사람들과는 다르게 정신과 낯빛이 전율하며 참으로至誠으로 두려워하는데 이것이 실제로 알아보는 것實見得이다."라고 했다. 격물치지는 사물의 리理를 실제로 봄으로써 완성된다. 즉 격물의 목적은 실리實理 즉 실재를 보는 것이다. 이것이 정이의 포인트이다. 정이에 따르면 누구나 물과 불을 밟지 않으려고 하고 부자附子는 먹지 않으려는 것이 바른 앎을 실천하는 것이다. 사람이 선하지 않은 것不善은 오직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정이의 지행합일설知行合一設이다. 격물이 오래되면 저절로 관통하는 경지에 이를 수 있는 이유는 인간의 마음에 본래부터 리理가 구비되어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궁리窮理란 사물의 리理 뿐만아니라 마음의 리理를 연구하는 것이다. 정이는 말하기를 "사물物과 나我의 통일이 리理이다. 저쪽이 밝혀지면 곧 이쪽도 밝아지는 내외합일內外合一의 도道인 것이다."라고 했다. 사물에 대한 궁리가 극에 달하면 자기 마음을 저절로 알게 되는데 그 마음은 곧 세계天地의 마음이다. 정이는 말하기를 "한 인간의 마음이 세계天地의 마음이고 한 사물이 리理가 모든 사물의 리理이며 하루의 운행이 곧 한 해의 운행이다."라고 했다. 재미있게도 인간은 한 사물의 리理를 깨달음으로써 세계天地의 마음을 알 수 있게된다. 정이는 말하기를 "리理를 연구한 것과 성性을 다한 것과 명命에 이른 것은 다 같은 일이다. 리理를 연구해냈으면 성性을 다한 것이고 성性을 다 발휘했으면 명命에 이른 것이다."라고 하였다.
+ 심학心學과 리학理學
정호, 즉 정명도의 심학과 정이, 즉 정이천의 리학은 큰 차이가 없다고 보겠다. 정호의 심학은 경敬을 통하여 마음의 리理를 인식할 것을 강조한다. 이것이 성誠이다. 성誠이란 마음과 사물이 통일하여 인仁이 현실화 된 것이다. 이것이 후대 심학心學 일파가 강조한 대체大體를 확립한다는 의미이다. 정이의 리학理學은 한 사물의 리理를 연구하여 즉, 격물格物하여 세계天地의 마음理을 저절로 알게致知되는 지행합일知行合一을 강조한다. 후대의 주자는 정이의 리학理學을 더욱 발전시켰다. 후대의 육상산과 왕양명은 정호의 심학心學을 더욱 발전시겼다.
<참고문헌>
평유란. 중국철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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