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6월 23일 토요일

7. 승조: 부진공不眞空, 반야무지般若無知. 도생: 돈오성불頓悟成佛

1. 역사적 맥락에서 본 승조

<고승전>에 따르면 승조僧肇는 남북조 시대 때 경조京兆 사람이다. 승조는 집이 가난하여 책을 베껴주는 일로 생계를 꾸리면서 경전과 역사책을 섭렵했고 노장老莊을 핵심으로 가르쳤다. 승조는 대승 경전을 깊이 배웠고 삼장三藏, 즉 경經, 율律, 론論에도 통달했다. 구마라집이 감숙성의 고장姑藏에 왔을 때 승조는 멀리서 찾아와 그를 따랐다. 구마라집은 인도 사상을 체계적으로 중국에 소개한 최초의 인물이다. 구마라집의 <대품반야경>이 나온 후에 승조는 <반야무지론>을 지어 구마라집에 바쳤다. 승조는 진晋나라 의희 10년인 414년 장안에서 타계하였다. 향년 31세였다.


2. 세계의 기원

승조는 세계를 이원화하여 본체세계와 현상세계로 나누었다. 승조는 말하기를 "무릇 본제本際란 모든 중생의 막힘없는 열반涅槃의 성性이다. 어찌하여 망심妄心과 전도顚倒가 홀연히 일어나는가. 그것은 일념一念에 미혹된 까닭이다. 그런데 그 일념은 하나로부터 일어났고 그 하나는 생각없이 일어났는데 그 생각없는 것은 터가 없다. 도道는 처음에 하나를 낳는데 하나는 무위無爲이다. 하나가 둘을 낳는데 둘이 망심妄心이다. 둘이 음양陰陽을 낳았는데 음양은 동정動靜이다. 양은 맑淸고 음은 탁濁하다. 따라서 맑은 기氣는 안으로 허虛하여 마음이 되고 탁한 기氣는 밖으로 모여 물질色이 되었으니 마음과 물질의 두 법法이 생성되었다. 마음은 양陽에 대응하고 양陽은 움직임動에 대응한다. 물질은 음陰에 대응하고 음은 고요함에 대응한다. 고요함靜은 곧 현빈玄牝, 즉 본체와 상통하므로 세계天地가 교합한다. 모든 중생은 음양陰陽 허기虛氣를 타고났다. 따라서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셋을 낳고 셋은 모든 현상萬法을 낳는다. 이미 무위無爲에 연緣하여 마음이 생기고 마음이 생김으로 인하여 물질色이 생긴다. 그러므로 경經에는 개별적인 마음과 개별적인 물질이라고 밝혔다. 그런즉, 마음이 모든 염려를 낳고 물질色은 모든 씨를 튀우므로 업業의 인자들이 서로 합하여 삼계三界의 종種이 생겼다. 삼계三界가 생긴 이유는 마음이 본원을 집착한 나머지 진일眞一에 미혹되어 탁한 욕망이 망기妄氣를 낳았기 때문이다. 망기妄氣가 맑고 깨끗해짐에 따라 무색계無色界가 되니 이것이 마음이다. 망기가 탁하게 나타나면 색계色界가 되니 이것이 몸이다. 망기가 흩어져 티끌이 되어 떠돌면서 욕계欲界가 되니 이것이 진경塵境이다. 따라서 경經에 따르면 삼계는 허망虛妄하여 진실되지 않아서 오직 하나의 망심이 변화해나갈 뿐이라고 했다. 무릇 마음 안에서 하나가 생긴다는 것은 밖에 무위無爲가 있다는 것이고 마음 안에서 둘이 생긴다는 것은 밖에 유위有爲가 있다는 것이고 마음 안에서 셋이 생긴다는 것은 밖에 삼계가 있다는 것이다. 이미 안과 밖이 상응하여 모든 개별적 현상法들이 생기고 모래알 만큼 많은 번뇌가 생긴다."고 하였다. 승조가 말하는 본제本際는 본체세계의 측면이고 삼계三界 즉, 무색계無色界, 색계色界, 욕계慾界는 현상세계의 측면이다. 승조는 중국 고유의 철학과는 구별지으면서 마음과 몸을 음양으로 나누었다. 승조는 말하기를 "미혹迷이란 자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아를 세워 안으로 자아가 전도된 상태이다. 자아가 전도된 상태에서는 성스러운 이치를 깨닫지 못한다. 때문에 밖으로 편견이 생긴다. 그런즉 안팍으로 장애가 생긴다. 때문에 사물에 대한 리理를 깨치지 못한다."고 하였다. 원래 인간은 무아無我임에도 불구하고 미혹되면 하나의 자아를 세우게 된다. 따라서 비아非我가 생겨나고 주관과 객관이 대립하면서 현상세계가 일어난다. 이것이 승조의 포인트이다.


3. 부진공不眞空

현상세계는 현상에 불과하므로 거짓이라 볼 수 있다. 따라서 현상셰계는 무無라고 할 수 있지만 현상이 드러난 이상 유有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승조에 따르면 현상세계는 참되지 않은 부진공不眞空이다. 사람과 사물은 모두 하나의 생멸生滅이므로 연緣이 합하여 생기고 연緣이 분리되면 멸한다. 따라서 모든 사람과 사물은 공허하고 환상적인 것으로서 진실되지 못하다. 진실되지 못하기 때문에 공空인 것이다. 승조는 말하기를 "모든 사물은 유有이기도 하고 무無이기도 하다. 모든 사물이 무無인 이유는 사물의 유有도 유有가 아니기 때문이다. 또 모든 사물이 유有인 이유는 사물의 무無도 무無가 아니기 때문이다. 유有는 유有가 아니므로 유有는 진유眞有가 아니고 무無도 무無가 아니므로 무無는 절대무絶對無가 아니다. 유有가 진유眞有라면 스스로 영원히 유有이므로 연緣에 연연할 필요가 없겠다. 무無가 진무眞無라면 스스로 영원히 무無이므로 연緣에 연연할 필요가 없겠다. 유有가 연緣에 의존하여 유有가 되면 참된 유有가 아니므로 유有도 유有가 아닌 것이다. 모든 사물이 무無라면 흥기하지 말아야 하는데 흥기하므로 무無가 아닌 것이다. 모든 현상萬法을 유有라고 하자니 그 유有는 참된 것이 아니고 무無라고 하자니 이미 나타나 있다. 모습이 나타났으니 무無는 아니지만 참되지 않으므로 실유實有가 아니다. 그러므로 부진공不眞空이다. <방광반야경放光般若經>에 따르면 모든 현상諸法은 거짓 명칭일 뿐이고 진실이 아니므로 환화인幻化人, 즉 허깨비와 같다. 환화인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참된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현상계의 모든 사물은 인연에 따라 생기기도 하고 멸하기도 하므로 환화인과 같다. 이런 면에서 환화인幻化人은 무無라고 볼 수 있으나 환화인은 없는 것은 아니므로 유有라고 볼 수도 있다. 승조는 환화인은 무無이기도 하고 유有이기도 하지만 참되지는 않으므로 공空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승조의 포인트이다. 이것이 승조가 말하는 부진공不眞空이다. 즉, 그 공空은 공空이지만 참되지 않은 공空이라는 것이다. 

4. 물불천物不遷

현상세계에 이미 있었던 사물은 비록 소멸되었더라도 있었던 사실 자체는 멸할 수 없다. 승조는 말하기를 "사물은 운동動할뿐 정지靜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과거의 사물이 현재에 계속되지 않는다고 본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사물은 운동하지않고 정지해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과거의 사물은 현재에도 소멸되지 않는다. 이렇듯 논의의 주제는 같으나 소견은 다를 수 있다. 진리에 어긋난 것이 막힘塞이고 진리에 합치한 것이 통달通이다. 미혹된 사람들은 이미 지나간 사물이 현재에 계속되지 않음을 알면서도 미래에 지속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과거의 사물이 계속되지 않거늘 현재의 사물이 어찌 미래에 지속되겠는가. 과거의 사물은 현재에 없으므로 계속되지 않은 것이고 또 과거 속에 남아있으므로 소멸되지는 않은 것이다. 현재의 사물은 현재에 있을 뿐 과거로부터 현재로 연속된 것이 아니다. 공자는 말하기를 "안회야, 항상 현재를 보아라. 아까의 어깨 스침도 과거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따라서 사물은 시간의 간격을 지속하지 않음이 분명하므로 사물에 무슨 운동動이 있겠는가. 그런즉, 광풍도 언제나 고요했고 강물도 흐른 적이 없고 해와 달도 회전한 적이 없다. 사물이 과거와 현재에 각각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이유는 운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사물은 계속되지 않기 때문에 과거와 현재를 반복하지 않으며 사물의 성性은 매 시간 다르다. 과거는 더 이상 현재가 아니다. 그러나 과거를 되돌아 볼 수 있으므로 소멸된 것은 아니다. 현재가 과거로부터 연속된 것이라면 과거 안에 현재가 있어야 하고, 현재에서 과거로 되돌아 간다면 현재 안에 과거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현재에는 과거의 사물이 없으니 되돌아 갈 수 없고 과거 안에는 현재 사물이 없으니 과거 사물은 소멸되지 않은 것이다. 과거가 현재로 연속되지 않았고 현재도 과거로 되돌아 갈 수 없으므로 사물의 性성은 시간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어찌 연속하거나 소멸되는 사물이 존재하겠는가. 그런즉, 춘, 하, 추, 동이 바람처럼 달리더라도 진리를 이해하고 나면 아무리 빠른 것도 운동하지 않음을 알게된다."고 하였다. 과거, 현재, 미래는 각각 독립적인 시간 안에서 정지해 있다. 따라서 모든 사물은 영원常토록 불변하므로 무상無常이 아닌 것이다. 승조는 말하기를 "여래如來의 업적功은 만세토록 항상 존재하고 도道도 만세토록 통通한다. 산을 만드는 일은 한 줌의 흙을 쌓는 데서 시작하고 먼 길도 첫 걸음에서 시작한다. 결과果는 공업功業이 썩어 없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난다. 공업功業은 썩어 없어지지 않으므로 꽃피지도 않는다. 꽃피지 않으므로 변천遷하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변천하지 않은 원리는 명백하다. 진실로 말세의 삼재三災, 즉 전쟁, 질병, 기근이 휩쓸어도 자기가 쌓은 업業은 그대로 남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불변성이란 운동을 떠나서 정지를 구하지 않고 반드시 운동 속에서 정지를 구하는 것이다. 따라서 운동을 떠나서 정지를 구하지 않으므로 정지하더라도 운동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과果에는 인因이 들어있지 않으나 인因으로 인하여 과거가 생긴다. 따라서 인因은 과거에 소멸된 것이 아니다. 또 과果에는 인因이 들어있지 않으므로 인因은 현재로 연속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인因은 소멸되지도 않고 계속되는 것도 아니므로 사물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승조가 말하는 물불천物不遷의 포인트이다. 인因은 과果를 낳고 과果는 인因에 따른 결과이다. 따라서 인因은 과거에 소멸되지 않은 것이다. 또 현재 과果안에는 과거 인因이 없으므로 인因은 현재로 연속되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인因은 소멸하지도 연속하지도않으므로 확실히 불변하는 것이다.


4. 성인聖人

승조에 따르면 현상세계는 유有라고도 볼 수 있고 무無라고도 볼 수 있고, 또 비유非有라고도 볼 수 있고 非無라고도 볼 수 있다. 또 상相이라고 볼 수 있고 무상無相이라고 볼 수도 있다. 승조는 말하기를 "상相이 무상無相인 경우는 상相이면서 무상無相인 경우이다. 색즉시공色卽是空 즉, 색色은 공空이지만 색色의 소멸이 공空인 것은 아니다. 마치 물이 흐를 때 바람이 쳐서 거품이 일어나므로 거품은 물이지만 거품의 소멸이 비로소 물이 되는 것은 아닌 것과 같다. 또 무상無相이 상相인 경우는 무상無相이면서 상相인 경우이다. 공즉시색空卽是色, 즉 공空은 곧 색色이지만 색色은 끝이 없다. 마치 거품이 꺼지면 물이 되는데 물이 곧 거품이고 물이 거품과 분리되는 것이 아닌 것과 같다. 거품과 같은 유상有相에 집착하고 물과 같은 무상無相을 두려워하는 유상有相은 바로 무상無相임을 알지 못하는 것이고 무상無相에 집착하고 유상有相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무상無相이 바로 상相임을 알지 못한다. 깨달은 사람은 부처이니 미망妄이 일어나지 않는다. 미망이 일어나지 않으면 그것이 본래의 진실이다."라고 하였다. 리理를 아는 사람은 현상 속에서 본체를 본다. 승조는 말하기를 "황금 보물 창고 안에서 황금의 본체만 관조하고 각종 형상을 보지 않고, 또 보더라도 형상에 미혹되지 않고 본체만을 관조한다면 허망한 그릇됨이 없어지는데 진인眞人의 경우가 그렇다. 각종 형상을 보더라도 진일眞一만을 관조하여 편견에서 벗어나고 진실의 경지에 머무르면 그가 바로 성인聖人이다. 반면에 황금의 각종 현상만 보고 본체는 보지 못하면 잡생각으로 쟁론을 일삼게 되니 그가 어리석은 자이다. 항상 잘생기고 못생긴 남녀의 외모만 보고 차별을 일으키고 본성을 미혹시켜 마음의 형상에 집착하므로 망상이 진일眞一을 가리운다. 어리석은 자는 현상에 집착하므로 현상 속에 갇히지만 성인聖人은 현상에 집착하지 않으므로 진실과 합일한다. 이미離微한 사람은 육신과 마음이 없으므로 두루 확대되어 모든 사물에 미친다. 육신과 마음에 집착하는 자는 광대한 지혜를 상실한다. 모든 경론은 육신과 마음의 집착을 깨뜨려야 진실에 들어갈 수 있다고 가르친다. 그것은 마치 대장장이가 광석을 녹여 금을 얻는 것과 같다. 육신에 집착하면 육신의 살에 얽매여 법신法身이 드러나려 하지 않고 마음에 집착하면 마음의 염려로 인하여 진지眞智가 은폐하여 숨는다. 그런즉, 큰 도道는 통하지 못하여 오묘한 리理가 침몰하므로 육신六神은 안에서 혼란하고 육경六境은 밖에서 주야로 허둥대며 쉬지를 못한다. 이離란 그 실체가 외물과 합하지도 않고 분리되지도 않음을 말한다. 마치 맑은 거울은 모든 사물을 비추지만 그 거울은 영상과 합하지도 않고 영상의 몸과 분리되지도 않는 것과 같다. 또 허공虛空처럼 모든 것을 빨아들이지만 오염되지 않고 집착되지 않으며 얽매이지 않고 뒤섞일 수 없기 때문에 이離이다. 미微란 그 실체가 오묘하여 무형無形, 무색無色, 무상無相하여 그 쓰임이 모든 사물에 미치나 그 공功을 드러내지 않으므로, 보아도 볼 수 없고 들어도 들을 수 없지만 그 덕德은 갠지스 강의 모래알처럼 영원하지않으면서도 단절되지 않고 더 이상 분리되지 않으므로 흩어질 수 없기 때문에 미微이다. 따라서 이離와 미微. 두 글자는 도道의 핵심이다. 육신六神과 六境이 그 흔적이 없는 것이 이離이고 모든 사물이 무아無我에 따라 작용하는 것이 미微이다. 미微하므로 이離하고 이離하므로 미微하다. 다만 이미離微는 작용에 따라 그 이름이 나뉘었을뿐 그 본체는 하나이다."라고 하였다. 이미離微란 탈존의 경지이다. 성인은 더 이상 미망에 휘둘리지 않는 사람으로서 무상無相의 상相을 이미離微로써 경험한 자이다. 이것이 성인에 대한 승조의 포인트이다.


5. 반야무지般若無知

승조에 따르면 성인聖人의 마음은 맑은 거울과 같아서 항상 비추기를 멈추지 않고 그 본체 자체는 비어虛있다. 승조는 말하기를 "성인聖人은 마음을 비워서 항상 비추고 종일 알아도 더 알고자하고 마음은 능히 묵요박도墨耀韜光, 즉 빛을 감춰 암흑이 드러나게 하므로 마음은 비워지면 바닥이 드러玄鑑나므로 지혜와 총명을 쓰지 않고 최고의 깨달음을 얻은 자이다. 성인은 바닥鑒의 신비를 얻었으므로 무를 인식無知하였고 때 마다 그 정신을 사용하여 무無를 생각한다. 無무로써 사유하는 정신은 세상을 능히 드러낸다. 무無를 인식한 지혜는 밖으로부터 능히 어둠玄을 빛춘다. 지혜는 만사를 초월해있으나 만사를 떠난 적이 없고 지혜의 본체身, 즉 반야는 현상세계로부터 떨어져 있으나 항상 현상세계로 초월한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피어나고 끝없이 조응한다. 신비로운 무無에 힘쓰지 않으면서도 무無가 빛난다. 이것이 무지無知의 인식능력이고 성스러운 정신神의 경지이다. 그 물질은 실재實하지만 유有가 아니고 공허虛하지만 무無가 아니다.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로 논할 수 없는 것이 성스러운 지혜이다. 왜 그런가. 유有라고 말하자니 무상무명無狀無名이고 무無라고 하자니 성인聖人의 영靈이기 때문이다. 성인의 영靈은 공허虛하나 항상 비추고, 무상무명하나 비추면서도 항상 비어있다. 비추나 항상 공허虛하므로 혼동되어도 달라지지 않는다. 비어있음에도 비추므로 항상 외물을 조응하면서 운동한다. 성지聖智는 한번도 멈춘 적이 없고 형상形相은 손으로 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보적寶積>에 따르면 무심無心한 뜻이 드러난다고 했던 것이고 <방광放光>에 따르면 부동不同의 깨달음이 모든 현상諸法을 드높인다고 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모든 사물은 성스러운 빛에 따라 하나一에 이를 수 있다. 그런즉, 반야般若는 공허虛하나 비추고, 어려우나 능히 알고 운동하면서도 정지하므로 성인은 무無에 조응하여 이루어낸다. 그런즉 모르不知나 아는 것이고 이루지않으不爲나 이루는 것이다. 따라서 어찌 다시 알려고 하고 어찌 다시 이루려고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승조에 따르면 현상세계는 망념妄念에서 시작한다. 성인은 무無를 통하여 망념적 유有를 극복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무無의 지혜가 반야이다. 반야는 현상세계를 초월하여 존재하고 항상 현상세계를 비추면서도 그 자체는 비어있다. 그럼, 비어虛있으므로 무無인가. 무無인 듯이 보이나 무無가 아니라고 말한다. 이것이 승조의 포인트이다.



6. 도생의 돈오성불頓悟成佛

도생道牲(355-434)은 승조와 동시대 사람이다. <고승전>에 따르면 축도생竺道生의 성은 위魏이고 거록사람으로서 팽성에서 살았다. 도생은 장안에 유학하여 구마라집 밑에서 수학하였다. 승려들은 그의 신통함에 놀랐다. 한번은 도생이 말하기를 "상象으로써 의미意를 전달하니 의미를 얻으면 상象은 잊어도 되고, 말로써 리理가 전달되니 리理가 들어오면 말은 그친다. 경전이 동쪽으로 전래된 이래 문자에 얽매어 온전한 의마가 제대로 파악되지 못했다. 통발을 잊고 물고기를 잡아야 비로소 도道를 논할 수 있다."고 하였다. 도생은 선善은 응보를 받지 않는다는 선불응보善不應報와 돈오성불頓悟成佛, 즉 문득 깨달아 부처가 된다는 설을 주장하였다. <열반경>이 처음 들어왔을 때 도생은 일천제一闡提, 즉 불법을 믿지 않는 사람도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하였다. 사람들은 도생을 비웃었으나 <대열반겯>이 수입되자 거기에는 일천제도 성불이 있다고 쓰여있었다. 도생은 송나라 원가元嘉 11년(434)에 타계하였다. 한편, 일천제도 음양의 두 기를 타고나므로 누구나 열반에 이르는 인因이 들어있고 또 삼계三界에 탄생하는 이유는 미혹의 결과果 때문이다. 도생은 경전의 말과 글을 통발에 비유하면서 말과 글에 집착하지 않아야 도道의 깨달음을 얻고 즉시 성불할 수 있다고 말했다. 나중에 선종禪宗은 문자를 중시하지 않고 마음의 깨달음을 중시하였다.

+ 돈오성불
도생은 말하기를 "모든 사물을 꿈속의 사물로 간주하면 유有의 세계에 살더라도 무無의 세계에 사는 것과 같아진다. 이 경지에 이르면 어찌 현재의 몸에 구애되거나 생명에 미련을 두겠는가. 무명無明은 모든 미혹의 근원이고 탐애貪愛는 모든 고뇌의 근원이다. 무명과 탐애에 빠지면 정신神이 흐려지고 길흉과 재앙을 불러온다. 무명無名은 빛을 엄폐하므로 정욕은 외부사물이 혼란을 일으키는 것이다. 탐애貪愛는 성性을 따라서 형形을 이루고 형形은 자아와 피아를 구별하는데 감정이 선악을 구별하는 이유는 자아와 피아의 구별로부터 나온 것이다. 자아와 피아를 구별하다보니 육신에 얽매어 육신만을 돌보게 된다. 선악에 관한 주관으로 인하여 생生에 연연하여 윤회전생하는 것이다. 그런즉 큰 단 꿈에 빠지면 미혹하여 혼미하고 긴 밤속에서 득실을 따지고 화복禍福이 따라다닌다. 악을 쌓아 하늘의 재앙을 불러오고 죄를 지어 그 벌로 지옥에 이른다. 이것이 필연의 이치數임은 의심할 바가 없다. 그러므로 죄와 복의 보응은 그 감感에 따른 것이다. 감感에 따라 그대로 되는 것이 자연自然이다. 자연이란 나의 그림자나 메아리같은 것이다. 따라서 어찌 자연이 본질, 현재玄宰이겠는가."라고 하였다. 마음의 감정은 외부사물과 접촉하여 보응한다. 보응은 마음이 외부사물과 접촉하여 생산한 감정내용이다. 따라서 무심無心으로 사물과 접촉한다면 감정내용이 없게되므로 업業을 이루지 않고 윤회에서 벗어나게 된다. 사령운謝靈運은 도생의 돈오성불과 관련하여 <변종론辯宗論>에서 말하기를 "부처에 따르면 성인의 도道는 멀리 떨어져 있으나 배움을 축적하여 능히 깨달음에 이르고 번뇌累를 다하여 바닥鑒이 드러나면 점오漸悟와 만난다고 했다. 공자에 따르면 성인의 도道는 오묘하여 안회도 도道에 근접함으로 그쳤으나 사실, 무無의 본체를 두루 느껴야感만이 일극一極으로 돌아가는 리理이다."라고 하였다. 불교에 따르면 성인의 도道는 배움을 쌓아 마음의 무명無明, 즉 번뇌累가 사라지는 진심眞心의 빛明이 드러나는 것이다. 즉 성불成佛은 점진적인 학습, 즉 점수漸修의 결과이다. 반면에 공자에 따르면 도道란 단번에 무無를 체득하여 일一로 돌아가는 것이다. 따라서 공자는 갑작스런 깨달음, 즉 돈오頓悟를 주장한 셈이다. 사령운은 <변종론>에서 말하기를 "신론도사新論道士, 즉 도생은 거울鑒 바닥의 신비하고 오묘함은 단계적 접근을 허용하지 않고 또 배움의 축적은 끝이없으니 언제 종결되겠는가. 이제 부처의 점오漸悟를 버리고 능지能至를 취하여야겠다. 또 공자의 태서殆庶를 버리고 일극一極을 취하여야겠다."고 하였다. 사령운은 도생을 분석하면서, 부처가 점수漸修를 통한 배움의 축적을 주장하였지만 결국 능히 이를 수 있는 경지, 즉 능지能至로 환원되었고 공자가 도道에 근접한 태서를 주장하였지만 결국 돈오頓를 통한 완전 정복의 일극一極으로 환원되었다. 그럼, 왜 부처는 배움의 축적을 강조하고 공자는 돈오에 치중하였는가. 사령운에 따르면 인도인은 이치를 깨닫지 못하면서도 쉽게 교화된다. 따라서 돈오를 폐기하고 점수를 권장하였던 것이다. 반면에 중국인은 쉽게 이치를 깨달으면서도 좀처럼 교화되지 않는다. 따라서 일극一極의 돈오를 권장하고 배움의 누적인 점수를 폐기했던 것이다. 최고의 경지인 무無는 일단 터득하면 완전해지므로 점진적으로 터득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배움의 축적은 예비공부에 불과하고 단번의 깨달음이 중요하므로 돈오頓悟가 필수적인 것이지 점오漸悟는 무無의 체득과 무관하다. 그러나 승유僧維는 사령운을 반박하면서 말하기를 "배움을 통하여 유有의 극한極을 해명하면 자연히 무無로 나아가는 것이니 어찌 무無를 언급할 필요가 있겠는가. 유有를 다 소진함으로써 무無가 드러난다면 어찌 점오漸悟라고 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승유는 배움을 통하여 유有의 극한을 규명하면 무無와 합일하니 점오가 존재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에 대하여 사령운은 반박하기를 "번뇌累가 없어지지 않으면 무無를 터득할 수 없으므로 번뇌가 다 소진된 것이 무無이다. 번뇌를 소진하려면 가르침에 의지해야 하지만 유有에 거하는 동안時의 학습은 깨달음悟이 아니다. 깨달음은 유有가 표상된 것으로서 배운 것이 드러난 것이다. 단계적 접근은 어리석은 논설이고 단번의 깨달음一悟으로 무無를 습득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무無는 배운다고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배운 것이 표상된 것이므로 배운 것을 포함한 모든 번뇌가 사라져야 습득될 수 있다. 이에 대하여 승유는 반박하기를 "깨달음은 유有가 표상된 것이므로 점진적으로 습득될 수 없다. 그런데 배움을 통하여 나아간다는 것은 그 빛이 진행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만약 그 빛에 의하여 나아가지 않는다면 배우지 않은 것과 같다. 나날이 그 빛이 진행한다면 점오漸悟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라고 하였다. 승유는 배움을 통해서 나아간다는 것은 그 신성한 빛이 진행하는 것이므로 배움은 점오漸悟라고 보았다. 이에 대하여 사령운은 반박하기를 "빛明은 점진적으로 나아가지 않으나 믿음信은 가르침에서 일어난다. 가르침으로부터 배운 믿음은 빛으로 인하여 나날이 진행한다. 그 빛은 점진적으로 나아가지 않으므로 무無를 밝히는 것이 아니다. 도道를 향하면 자연히 선심善心이 일어나므로 번뇌가 줄어들고 더러움이 숨는다.그 더러움이 숨음으로 인하여 무無처럼 보이고 악惡이 떠난듯이 보이나 근본적으로 번뇌累가 없어진 것이 아니다. 그러나 단번의 깨달음一悟에 이르면 모든 번뇌가 동시에 사라진다."고 하였다. 배움으로부터 나온 믿음은 번뇌를 감소시키고 더러움을 숨길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무無를 습득한 것이 아니다. 무無는 빛明에 의하여 단번에 터득되는 것이다.그러한 깨달음은 돈頓이지 점漸이 아니다. 이것이 사령운의 포인트이다. 그럼, 참된 깨달음과 거짓 깨달음은 어떻게 구별하는가. <변종론>은 말하기를 "거짓 인식假知은 번뇌가 잠복해 있으므로 깨달음이 항구적이지 않다. 참된 인식眞知은 고요히 빛나며 항상 리理에 머물면서 작용한다. 번뇌는 저절로 없어지지 않는데 어찌 번뇌를 없앨려고 리理를 구하겠는가. 리理가 마음에 머물러도 번뇌가 없어지지 않으니 장차 어떻게 해야하는가. 번뇌는 마음으로 인因하여 일어난다. 마음이 번뇌를 일으키는 이유는 마음이 어둡기 때문이다. 배운 자는 번뇌를 매일같이 숨긴다. 숨은 번뇌가 오래되면 번뇌는 소멸한다. 번뇌가 소멸되었다는 것은 번뇌가 숨어있었기 때문이다. 숨은 번뇌와 소멸된 번뇌는 겉모습은 동일하나 그 속은 다르므로 살피지 않으면 안된다. 소멸된 번뇌의 본체는 자신의 질료와 형상物我를 완전히 잊고 유무有無를 일관一觀하는 것이지만 숨은 번뇌의 상태는 자기와 타자를 구별하면서 실實과 공空에 차이를 둠으로서 속박에 빠지는 것이다. 무無와 유有가 하나로 통일되고 질료와 형상物我이 동일하게 되는 것은 빛에 따른 것이다."고 하였다. 깨달음은 유有를 초월하지만 유有를 통해서 배운 것이 표상된 경지이다. 배움을 통해 나온 믿음은 날로 진행하는 것이지만 빛明에 의하지 않고는 믿음이 드러나지 않는다. 잠복된 번뇌는 유有와 무無, 질료와 형상物我, 실實과 공空, 자기와 타자가 통일됨으로써 소멸하여 믿는 내용이 드러나는 것이다. 도생은 말하기를 "배움으로부터 믿음이 생기므로 모르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지식을 알더라도 자아을 표상하는 리理가 드러나지 않으면 쓸모없다. 자아에 다다름으로써 피아를 습득하니 어찌 나날이 발전이 없겠는가. 그러나 아직 자아를 아는 데 미치지 못했다면 어찌 빛이 유有를 갈라 밝히겠는가. 밖에서 리理를 본 것만으로는 몽매와 다름없다. 지식이 자기 안에 있지 않으므로 능히 비출 수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다. 배움으로부터 믿음을 얻고 그 믿음을 통해 리理를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믿음은 단지 지식일뿐 자신의 경험과는 상관없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을 통하여 결국 자아를 알게 된다. 그러한 앎은 반드시 빛을 통한 지식이다. 도생에 따르면 그러한 지식을 얻으면 나날이 발전하게 된다. 이것이 도생의 포인트이다. 혜림慧琳에 따르면 부처가 점오漸悟를 강조한 이유는 육체의 수양때문이었고 공자가 점오漸悟를 논하지 않은 이유는 도道의 관점에 섰기 때문이었지 오랑캐夷만이 점오漸悟에 구속되고 중국인만이 돈오頓悟를 신봉하는 것이 아니다. 또 혜원에 따르면 부처는 중생의 자질이 얄팍하고 깨달음의 길이 멀기 때문에 점오설漸悟說을 수립했으나 중생은 한번 도약하여 큰 깨달음을 얻을 수 있으니 돈오설頓悟設 또한 수립했다고 보았다.





<참고문헌>

펑유란. 박성규 역, 중국철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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