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역사적 맥락에서 본 순자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따르면 순자荀子(B.C298)는 전국시대 말기 조趙나라 사람이다. 순자의 이름은 황況이고 자는 경卿이다. 순경荀卿은 쉰 살이 넘어서 제濟나라에 유학했다. 순경은 제濟나라에서 이름을 떨쳤으나 참소를 받고 초楚나라로 가게 되었다. 초楚나라 춘신군은 순경을 난릉蘭陵의 장군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춘신군이 사망하자 순경도 면직되었지만 그대로 난릉에 머물렀다. 얼마후 순경의 제자 이사李斯는 진秦나라의 재상이 되었다. 순경은 세상의 정치가 혼탁해지고 무도한 군주들이 나타나 대도大道를 좇지않고 무당들에 현혹되어 귀신의 복을 빌고, 유생들이 천박해지고 장주莊周같은 학자들이 가치체게를 어지럽히고 사회기풍을 문란시키는 것을 보면서 현실을 한탄하였다. 순경은 유가 묵가 도덕가의 사상을 체계적으로 저술한 후 B.C.238년 난릉에서 타계하였다.
2. 순자의 맹자 비판
알다시피, 맹자는 공자를 숭상하였다. 순자 또한 공자를 숭상하였다. 순자는 공자와 그의 제자들을 칭송하며 말하기를 "그들은 치국의 방책을 마련하고 언행을 일치하고 개별과 보편을 통일하고 천하天下의 영재들을 끌어모아 대도大道를 일깨우고 순리順理를 가르쳤으며, 항상 성왕聖王의 가르침을 보존하며 태평성세의 습속을 일으켰다."고 하였다. 또 순자는 공자를 칭송하면서 말하기를 "편견을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의 인식체계는 도道의 전모를 깨달을 수 없다. 따라서 도道의 일면 만을 본 인간은 자신을 혼란에 빠뜨리고 타인을 미혹하고, 윗사람을 가리우고 아랫사람 또한 가리운다. 그러나 공자는 인仁으로서 지식을 터득하고 슬기로워 막힘이 없었다. 통치에 대한 공자의 학술은 선왕先王에 비해서 손색이 없었고 주도周道의 핵심을 잘 파악하고 널리 전파하였다. 공자의 덕德은 주공周公에 비견될만하고 그의 이름은 삼왕과 더불어 나란하게 되었으니 그것은 그의 막힘없는 복福에 기인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순자는 공자의 학문學文을 높이 평가했다. 반면에 맹자는 공자의 덕德을 높이 평가한 것이었다. 순자筍子는 자사子思와 맹자를 비난하면서 말하기를 "그들은 선왕들의 근본정신을 무시한 채 지엽적인 것만을 갖고 오행五行을 창설하였다. 이 새 학설은 기묘하고 모순되어 기준이 없고 논리적 근거가 약하여 난삽하다. 그들의 학설은 어리석은 유생들을 유혹하고 있으니 이것이 바로 자사와 맹자의 죄이다."라고 하였다. 윌리암 제임스에 따르면 철학자는 그 기질에 따라 강경파와 온건파로 나누어진다. 플라톤은 온건파를 대표하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강경파를 대표한다. 순자는 강경파로서 유물적 성향이었다. 반면에 맹자는 온건파로서 유심론적 성향이었다. 재미있게도, 전국시대 유가의 맹자, 순자 두 학파의 쟁론은 송명시대 신유가의 정주程朱, 육왕陸王 두 학파의 쟁론과 비슷하다.
3. 순자와 주도周道
순자는 주周나라 문화를 옹호하면서 말하기를 "왕제王制의 도道는 하, 은, 주 삼대三代를 벗어나지 않으며 그 법法은 후왕後王과 다르지 않다. 도道는 삼대三代를 벗어나면 황당하고 법도法道는 후왕後王과 다르면 부정하다. 의복에도 규정이 있고 건축에도 법도가 있다. 아전들도 차등이 있고 상례나 제례에도 등급과 법식이 있다. 음악과 색채, 기물은 전통에 비추어 바른 것이 아니면 모두 폐기하니 이것을 두고 복고復古라고 한다. 이 복고가 곧 왕제王制이다."라고 하였다. 공자는 주周의 제도를 옹호한 만큼 늘 문왕文王과 주공周公을 언급하였다. 재미있게도 묵자墨子는 주周문화에 반발하여 하夏문화를 본받으면서 우禹왕을 내세웠고 문왕과 주공을 하시보았다. 이어서 등장한 맹자는 더 오래된 요堯, 순舜을 내세워 우왕禹王을 하시보았다. 또 노장老莊의 문도들은 더 오래된 전설상의 인물을 내세워 요, 순을 하시보았다. 순자 시대에 이르러서야 문왕과 주공은 후왕後王으로서, 그리고 주도周道는 후왕後王의 법法으로서 인식되었다.
4. 신天, 성性
공자의 신天은 주재지천主宰之天이고 맹자의 신天은 주재지천, 운명지천運命之天, 의리지천義理之天이었다. 반면에 순자의 신天은 자연지천自然之天이다. 순자의 신天 개념은 노장의 사상에서 비롯되었다. <장자>에 따르면 천지일월의 운행은 기계적이고 부득이한 바, 그 돌고 도는 운행이 저절로 그칠 수 없는 것이락 하였다. 이러한 노장의 자연주의적 우주관은 순자에게 영향을 주었다. 순자는 말하기를 "신의 운행天行은 영원불변하여 사회에 선인善人이 있어서 생성하는 것도 아니고 사회에 악인惡人이 있어서 소멸하는 것도 아니다. 안정으로 신의 도天道에 응하면 길하고 혼란으로 신의 도天道에 응하면 흉할 따름이다. 따라서 신天과 인간 간의 직분을 명확히 인식한다면 가히 지인至人이라 할 수 있다. 작위하지 않으나 성취하고, 추구하지 않으나 획득하는 것을 가리켜 신의 직무天職라고 한다."고 하였다. 즉, 자연계의 법칙은 인간사회의 법칙으로부터 독립해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종교에서 말하는 신비주의적 천인감응설天人感應說은 순자에게는 완전히 허구이다. 순자는 말하기를 "신天은 인간이 추위를 싫어한다고 해서 겨울을 물리치지 않으며 인간이 먼 거리를 싫어한다고 해서 광야를 좁히지 않는다."고 하였다. 순자의 신天은 자연지천自然之天으로서 도덕적, 인격적 신이 아니다. 반면에 맹자는 의리지천義理之天을 말하면서 인간의 성性을 신天의 부여한 것으로서 보았으므로 신天은 성선설의 형이상학적 근거였다. 그러나 순자는 인간본성과 관련하여 말하기를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 인간이 선善하게 됨은 위僞 덕분이다."라고 하였다. 위僞란 훈련을 말한다. 순자는 성性과 위僞를 구별하면서 말하기를 "배울 수도 없고 도모할 수도 없는 천성天性적인 것을 성性이라 하고 배워서 얻을 수 있고 도모하여 성취할 수 있는 인위적인 것을 위僞라 한다."고 하였다. 순자는 말하기를 "성性은 본태적인 질료이고 위僞는 가공된 문례文禮이다. 성性이 없으면 위僞를 가할 데가 없고 위僞를 가하지 않으면 성性은 스스로 아름다워질 수 없다."고 하였다. 성性은 신天에 속한 것이다. 신天은 영원불변하지만 도덕적 원리가 없다. 따라서 성性에도 도덕적 원리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도덕은 인위적인 것, 즉 위僞이다. 이것이 순자의 포인트이다. 순자는 말하기를 "인간의 성性은 날 때부터 이익을 좋아하는 바 투쟁이 발생하고 사양지심이 없다. 이 성性을 좇기 때문에 질투와 증오심으로 남을 해치고 비방하므로 충직과 도덕은 사라진다. 이 성性 때문에 눈과 귀는 고운 색과 고운 목소리를 좋아하고, 때문에 음란이 발생하고 예의문리禮義文理(예절, 정의, 관습, 도리)는 사라진다. 그런즉, 본래의 성性을 따르고 정情을 좇으면 반드시 투쟁이 발생하고 신분질서가 무너지고 사회기강이 문란하게 되어 폭동에 귀착하게 된다. 따라서 반드시 선생과 법으로 교화하고 예禮와 의義의 도道를 세워야 사양지심이 생기고 관습과 도리에 부합하고 안정에 귀착한다. 따라서 인간의 성性은 악함이 분명하고 선善하게 되는 것은 오직 위僞 덕분이다."라고 하였다. 맹자에 따르면 인간은 사단四端, 즉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의 선단善端을 가지고 있고 이것을 깨닫고 덕德을 쌓으면 누구도 성인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순자는 사단四端을 부정하였다. 순자는 인간 본성은 사단四端이 없을지라도 누구나 예禮와 의義를 학습할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 따라서 인간은 예禮와 의義를 학습하여 성인이 될 수 있다. 이것이 순자의 포인트이다. 순자는 말하기를 "거리의 모든 사람은 우禹임금처럼 될 수 있다. 우禹임금은 인의법정仁義法正(어짐, 정의, 법, 정당)을 실행했다. 인의법정에는 깨닫고 행할 수 있는 리理가 존재한다. 모든 사람은 인의법정을 알 수 있는 질료를 가지고 있으므로 인의법정을 실현할 수 있다. 따라서 모든 사람은 요堯임금처럼 될 수 있다. 도道를 받들어 학문하고 일심전력으로 사색하고 쉬지않고 선善을 쌓으면 마침내 신명神明에 통하고 세계天地와 합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성인聖人이란 인간 노력의 결과이다."라고 하였다.
5. 성악설性惡說설
+ 성性, 정情
순자는 말하기를 "자연스럽게 타고나는 것이 성性이다. 성性은 조화롭게 발생하고 정밀하게 감응된 것이다. 따라서 애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 성性이다. 성性 중의 호好, 오惡, 희喜, 노怒, 애哀, 락樂이 정情이다. 마음은 정情 중의 하나를 취사선택하면 그것이 사려慮이다. 사려慮에 따라 행위하는 것이 인위僞이다. 인위僞는 사려가 축적되고 능히 습관화된 후에 이루어진 행위이다. 바른 이익을 좇는 행위가 사事이고, 바른 의義를 좇는 행위가 덕德이다. 인간의 인식능력이 지知이고, 지知가 외부 사물과 접촉하는 행위가 지智이다. 지智를 발휘하는 행위가 능能이다. 능能으로써 외부사물과 접촉한다. 성性이 손상된 것이 병病이고, 성性과 우연히 조우하는 것이 명命이다."라고 하였다. 인간이 자연스럽게 타고나는 것이 성性이다. 성性에는 감정이 들어있고 이 정情을 다스리는 것이 위僞이다. 순자는 위僞로써 덕德을 쌓을 것을 강조한다. 성性이 손상된다는 의미는 정情, 위僞, 덕德에 모두 손해이다.
+ 욕망
순자는 말하기를 "다스림의 도道를 논하면서, 욕망제거를 주장하는 자는 욕망을 다스릴 수 없을 뿐만아니라 욕망 때문에 곤혹을 겪는다. 또 다스림의 도道를 논하면서 욕망축소를 주장하는 자는 욕망을 절제할 수 없을 뿐만아니라 욕망 때문에 곤혹을 겪는다. 인간은 욕망을 실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나, 그 추구하는 자는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욕망의 실현 여부는 신天으로부터부여된 것이다. 따라서 그 추구하는 자는 마음의 지시를 따른다. 천성天性에는 욕망이 있으나 마음이 절제를 하는 것이다. 인간의 가장 큰 욕망은 생生이고 가장 큰 혐오는 사死이다. 인간이 삶을 버리고 죽음을 택하는 이유는 삶을 욕망하지 않고 죽음을 욕망하기 때문이 아니라 삶이 불가능하고 죽음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욕망이 넘치지만 행동이 못미치는 이유는 마음이 저지하기 때문이다. 욕망은 못미치지만 행동으로 옮기는 이유는 마음이 시키기 때문이다. 성性은 신天의 의지이고 정情은 성性의 질료質이다. 욕망이란 정情이 외부세계에 응하는 것이다. 욕망의 실현이 가능하다고 보아 추구하는 것은 정情의 부득이한 측면이고 그 욕망의 가능성을 도道에 비추어보는 것은 지知에 따른 결과이다. 인간은 선택을 통하여 선호대상을 불러올 수 있고 혐오대상을 물리칠 수 있다. 따라서 힘權을 갖추어야 한다. 저울衡이 바르지 않을 경우 무거운 물건도 가볍다고 간주되고 가벼운 물건도 무겁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때문에 인간은 무겁고 가벼움에 미혹되는 것이다. 마음의 저울衡이 바르지 못할 경우 선호대상 속에 화禍가 깃들어 있어도 복福으로 여기고 혐오대상 속에 복福이 깃들어 있어도 화禍로 여길 수 있다. 때문에 인간은 화禍,복福에 미혹되는 것이다. 도道는 고금의 올바른 힘正權이다. 도道를 벗어나 오직 주관적인 힘權에 따라서만 선택하면 화禍, 복福의 소재를 알 수 없다."라고 하였다. 순자에 따르면 인간은 욕망이 없을 수 없으나 또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므로 마음으로 욕망을 절제할 것을 강조한다. 마음은 사려慮와 인식知을 통해서 욕망을 절제할 수 있다. 순자가 말하는 도道는 올바른 힘正權으로서 신天의 도道가 아니라 인간의 도道이다. 따라서 순자의 도道는 예의문리禮義文理, 인의법정仁義法正 등과 같은 인간의 도道이다. 그 도道란 욕망과 증오, 처음과 끝, 멈과 가까움, 심오와 천박, 과거와 현재를 측량하는 저울衡이다.
+ 허일이정虛壹而靜
그럼, 도道는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 순자는 말하기를 "마음을 비워서 고요하게 함으로써 도道를 알 수 있다. 마음은 대립적인 것들이 없을 수가 없지만 한결같은 것이 있다. 마음은 잠시도 활동하지 않을 때가 없지만 고요함靜이 존재한다. 인간은 선천적으로 인식능력知이 있고 인식하면 의지志가 생기는데 그 의지는 축장臧 되지만 그 축장에는 허虛가 존재한다. 마음은 인식능력으로써 차이를 구별한다. 인식능력이 동시同時에 차이를 파악하는 것이 통일一이다. 이 통일一이 서로를 방해하지 않는 것을 가리켜 일壹이라 한다. 마음은 잠을 자면 꿈을 꾸고 내버려두면 멋대로 생각하고 사용하면 도모謀한다. 정靜이란 이러저러한 잡생각, 즉 몽극夢劇이 인식능력知을 어지럽히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허심虛心하면 도道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 이 허일이정虛壹而靜의 상태에서 사물의 현상과 이치가 막힘없이 파악될 수 있다. 이 허일이정의 경지는 대청명大淸明이라고도 한다."라고 하였다. 마음은 생각慮하고 인식知능력이 있다. 마음은 욕망을 절제하면서 힘權과 기준衡을 세우면서 큰 이익과 적은 손해을 선택하려고 한다. 이러한 순자筍子의 학설은 묵자墨子의 공리주의와 일치한다. 순자는 마음을 비우는 평정심을 통하여 도道를 알 수 있다고 하였다. 비어있는 평정심, 즉 허일이정虛壹而靜은 노장사상과 순자의 포인트이다. 장자는 말하기를 "수면이 평정하면 그 맑음은 수염과 눈썹을 비출 수 있다. 물이 평정해도 사물을 밝게 비추거늘 하물며 정신의 경우임에랴. 성인의 마음은 세계天地의 거울이요, 모든 사물의 거울이다. 허정虛靜, 염담舌淡, 적막寂漠, 무위無爲란 세계의 기준이자 도덕道德의 정점이다. 제왕과 성인은 이 안에서 쉰다. 쉬면 허虛해지고 허虛하면 실實해지고 실實하면 윤倫하다. 또 허虛하면 정靜하고 정靜하면 동動하고 동動하면 득得한다. 또 정靜하면 무위無爲하고 무위無爲하면 신하들이 스스로 책임진다. 무위無爲하면 유유자적하고 유유자적하면 우환이 깃들 수 없어 장수한다."라고 하였다. 순자에 따르면 마음의 허虛란 이미 축장된 것이 장차 받아들일 것을 방해하지 않는 상태이다. 마음의 정靜은 잡생각 즉, 몽극이 마음을 어지럽히지 않는 상태이다. 반면에 장자의 허虛는 거울과 같은 상태이므로 순자의 정靜과는 조금 다르다고 하겠다.
+ 성誠, 변화變化
순자는 말하기를 "마음의 수양은 참됨, 즉 성誠보다 더 좋은 것이 없으니 성誠에 도달하면 더 할 일이 없으니 오직 인仁을 지키고 의義를 행할 따름이다. 성심誠心으로 인仁을 지키면 밖으로 현현形되고 현현되면 신명神해지고 신명해지면 사물화化시킬 수 있다. 성심으로 의를 행하면 이치理있고 밝고明 변화變시킬 수 있다. 사물화와 변화가 교대로 나타나는 것이 신의 덕天德이다. 도道에 익숙한 사람은 성誠으로써 전일全一하고 전일全一된 것은 밖으로 나타난다. 세계天地는 위대하지만 성誠이 실현되지 않으면 사물화될 수 없고 성인은 지혜롭지만 참誠되지 않으면 만민을 교화할 수 없다. 부자지간은 친밀하지만 참誠되지 않으면 소원해진다. 임금은 존엄하지만 참誠되지 않으면 비천해진다."라고 하였다. 순자에 따르면 인의도덕仁義道德은 본래 인성人性속에 없다. 따라서 성性을 변화시켜 인위僞를 일으킴으로서만이 가능하다. 그것은 물을 거슬러 배를 젓는 것과 같은 것이므로 노력하지 않으면 성性을 인의도덕仁義道德으로 변화시킬 수 없다. 성性이 인의도덕으로 변화되어 제 2의 천성이 된다. 맹자와 같은 성선론자들은 인간을 원래의 자연상태로 되돌리고자 하였다. 반면에 순자와 같은 성악론자는 인간을 원래의 자연상태로 되돌아가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것이 맹자와 순자의 차이점이다.
6. 국가의 기원
순자에 따르면 인간이 선善을 바라는 이유는 성性이 악惡하기 때문이다. 그럼, 왜 인간은 성性이 악惡함에도 불구하고 선善을 바라는가. 알다시피, 선善이란 예의문리禮義文理이고 인의법정仁義法正이다. 인간은 본래 이러한 선을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부득이하게 욕망할 따름이다. 이것이 순자의 포인트이다. 순자는 말하기를 "모든 사물은 같은 것으로부터 나오나 형체를 달리한다. 이것들은 인간을 위하여 생성되니 수數이다. 인간은 더불어 살면서 각가 다른 도道를 통하여 욕망의 대상을 추구한다. 같은 것을 욕망하면서도 달리 인식한다. 이것이 생生이다. 현자나 어리석은 자나 모두 존재를 바라지만 분수에 따라 그 현현이 다르다. 의욕은 같으나 인식이 다르므로 이기적으로 행동하여 화를 면하려하고 욕망을 좇으며 만족하려하므로 민심의 문란이 불가피하다. 신하를 제어할 군주가 없고 아랫사람을 다스릴 윗사람이 없으면 천하의 사람들은 맘대로 욕망을 추구하다보면 반드시 해악이 발생한다. 욕망하는 사람은 많으나 그 대상이 부족하므로 반드시 쟁탈이 발생한다. 공동사회에서는 분업이 없으면 분쟁이 생긴다. 가난함은 재난이고 분쟁은 재앙이다.재난과 재앙을 막으려면 분업을 통하여 공동사회를 이루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강자가 약자를 위협하고 현자가 아둔한 자를 겁주고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거스르고 젊은이가 어른을 깔보며 덕으로써 정치하지 않고, 노약자들은 근심에 젖고 장정들은 분쟁한다. 사람들은 일하기 싫어하고 영예와 이득만을 좋아한다. 분업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사업을 성취하다가도 재난을 겪고 공적을 다투어 화를 입는다. 남녀의 분업과 혼인의 예禮가 없으면 남녀가 결합하지 못하고 여색을 쟁탈한다. 따라서 지자知者는 분업分業을 도모한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예교禮敎에 따른 공리주의로서 묵자의 주장과 동일하다고 볼 수 있다. 순자에 따르면 지자知者는 분업과 예禮를 도모한다. 인간이 예禮를 추구하는 이유는 원래 인간본성 중에 예禮가 있었기 때문은 아니다. 순자는 말하기를 "물과 불은 기氣는 있으나 생生이 없다. 초목은 생生이 있으나 지각知이 없다. 금수는 지각이 있으나 의義가 없다. 인간은 기氣, 생生, 지知, 의義를 모두 갖추고 있으므로 현상세계天下에서 가장 귀한 존재이다. 인간의 힘은 소보다 못하고, 인간의 달리기는 말보다 못하지만 인간은 소와 말을 부린다. 그 까닭은 인간은 공동사회를 이루나 소와 말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분업을 통하여 공동사회를 이룬다. 인간은 의義를 바탕으로 분업을 이루고 서로 화합하면서 통일하고 힘이 증대되면 강해지고 모든 사물을 제압한다. 그래서 가옥을 짓고 삶을 영위한다. 분업과 의義 덕분으로 인간은 사계절이 운행질서를 정리하고 모든 사물을 이용하고 그 이익을 향유한다. 따라서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사회를 떠날 수 없다. 사회내의 분업이 없으면 다투게 되고 혼란해지고 흩어지고 약해지고 모든 사물을 다스릴 수 없고 가옥을 짓고 삶을 영위할 수 없다. 그런즉, 인간은 예禮와 의義를 버릴 수 없다."라고 하였다. 현상세계에서 인간이 인간다움은 분업과 예禮에 따른 결과이다. 이것이 순자의 포인트이다
+ 예禮
순자에 따르면 인간은 태어나면서 욕망이 있고 그 욕망을 추구하려 한다. 욕망을 추구할 때 일정한 법도와 한계가 없으면 분쟁과 혼란이 발생한다. 선왕先王은 이러한 혼란을 우려하여 예禮오 의義를 제정하고 분업을 설정하였다.인간은 예禮, 의義, 그리고 분업에 조화를 이루면서 욕망을 충족하게 되었다. 이것이 예禮의 기원이다. 예禮는 분업을 정하고 인간의 욕구를 절제한다. 이것이 순자의 포인트이다. 공자는 개인의 성정性情의 자유를 중시하면서 외부규범 또한 중시했다. 맹자는 개인의 성정과 도덕적 판단을 사회규범보다 더 중시하였다. 반면에 순자는 예禮, 즉 사회규범을 인간 개인의 성정性情보다 더 중시하였다. 재미있게도 순자에 따르면 학문의 순서는 경전을 암송하는 데서 시작해서 예禮에 관한 책을 읽는 데서 끝난다고 하였다. 순자는 공리주의적인 측면에서 묵자와 비슷하다. 그러나 묵자墨子는 실용에 과도하게 기울어진 나머지 형식의 가치에 무지하였다.
+ 왕도王道와 패도覇道
순자는 말하기를 "성인聖人은 윤리倫에 밝은 자이며 왕王은 제도制 밝은 자이다. 윤리와 제도에 밝은 성인과 왕은 현상세계天下를 지배할 만하다."라고 하였다. 순자에 따르면 성인이 왕이 되어야만 최선의 국가를 이룰 수 있다. 순자는 말하기를 "그러므로 천자天子가 바로 그 인물이다. 현상세계天下는 지극히 무거우므로 강한자가 아니면 감담할 수 없고 현상세계天下는 지극히 거대하므로 능력이 없으면 나누어 다스릴 수 없고 현상세계天下는 수 많은 인구이므로 능력이 없으면 결집시킬 수 없다. 이 세가지 경지에 밝은 성인이 아니면 왕이 될 수 없다."고 하였다. 성인이 왕이 되는 것이 왕도정치王道政治이다. 이것이 순자의 포인트이다. 순자는 왕도정치와 패도정치를 구별하면서 말하기를 "공자의 제자들은 오패五覇(제 환공, 진 문공, 초 장왕, 오 합려, 월 구천)를 찬양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오패는 정치적 교화를 근본으로 한 것도 아니고, 예의禮義를 받든 것도 아니고 문리文理를 좇은 것도 아니고 민심을 얻은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오직 방침과 책략으로 백성들의 노동을 통제하여 물자를 비축하고 전술로써 적을 타도하고 기만과 술책으로 승리했던 것이다. 그러나 왕자王者는 지극히 지혜로우면서도 못난 사람을 도우며 지극히 강하며서도 약자를 관용하며, 이길 수 있더라도 싸우는 것을 수치로 여기며 덕德을 천하에 펼쳐서 강포한 나라들을 교화하고, 재앙을 반복하는 경우에만 벌주었으니 성왕聖王이 벌주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고 하였다. 성인이 왕이 되어야 왕도정치이다. 그렇지 않으면 패도정치일 뿐이다. 순자의 왕도정치는 맹자의 경우와 조금 다르다, 맹자의 왕도정치란 남에게 모질지 못하는 마음에서 시작한다.
+ 토지 조세 제도
순자는 말하기를 "왕은 세금을 차등 부과하고 모든 일을 바로잡고 모든 사물을 재량한다. 들판의 소출은 10분의 1의 세금을 거두고 관문과 시내 상가는 감찰만 하고 세금은 부과하지 않는다. 산림의 채벌과 여울의 통발은 절기에 따라 금지 또는 개방하지만 과세하지 않는다. 토지는 등급에 따라 차등 과세하고 운송로의 원근을 고려하여 공물내용을 결정하며 재물과 곡물을 유통시켜 적체되는 일이 없도록 한다."고 하였다.
7. 정명론正名論
이미 보았듯이, 공자에 따르면 정명正名이란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부친은 부친답고 자식은 자식다운 것을 말한다. 또 맹자는 정명론과 관련하여 부친도 무시하고 임금도 무시하면 다름아닌 금수라고 하였다. 공자와 맹자의 정명론은 윤리적인 측면을 강조하였지만 논리적인 측면은 없었다. 순자에 따르면 인간은 생각하고 인식하는 마음과 욕망만이 존재한다. 순자는 말하기를 "인간이 가진 인식능력이 지知이고, 이 지知가 외부 사물과 접촉하는 것이 지智이다. 눈은 색깔, 형체, 무늬를 변별하고 귀는 퉁소 연주 소리를 변별하고 입은 달고 쓰고 짜고 싱겁고 매운 맛을 변별하고 코는 향기 악취 꽃내음 썩은내 노린내 비린내를 변별하고 몸은 아프고 가렵고 싸늘하고 덥고 매끄럽고 가볍고 무거운 느낌을 변별하고 마음은 쾌활과 우울, 희노애락애오욕을 변별한다. 마음心은 징지徵知를 갖고있는데 마음은 들어온 인상에 의미를 부여해야만 귀로 소리를 인식하게 되고 눈으로 형체를 인식하게 된다. 징지徵知는 신의 기관天官이 외부사물을 유類에 따라 접수한 후에야 기능한다. 따라서 '모른다'는 것은 오관五官이 접수했지만 마음이 분류하지 못하고 마음이 증명徵하려해도 할 수 없는 경우이다."라고 하였다. 마음은 텅 비어있는 상태에서 오관五官을 다스리는데 그것이 바로 신의 기관天官이다. 신의 기관天官은 선천적인 사유기관이다. 마음에는 징지徵知가 있는데 징徵이란 증명을 말한다. 이를테면 어떤 나무를 볼 때 그 형태를 감각하면 마음은 그것이 나무임을 안다. 이것이 징지의 작용이다. 따라서 징지가 있으므로 귀로 소리를 알게 되고 눈으로 형제를 알게 된다. 만약 징지가 없다면 소리를 듣고 형체를 볼 수 있을 뿐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나무가 나무임을 알게 되는 것은, 마음이 개체 사물을 나무의 유類속에 접수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의 경험 속에 나무의 유類가 없었다면 그 개체 사물이 나무임을 알지 못한다. 즉, 오관이 접수했지만 분류하지 못하고 마음이 증명하려해도 설명할 수 없는 경우를 가리켜 모른다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신의 기관天官이 작동하여야먄 사물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순자의 포인트이다.
+ 명名
순자는 이름의 기원과 기능에 관하여 말하기를 "이름으로 실재를 지칭하면 위로는 귀천이 구별되고 아래로는 같음과 차이를 변별할 수 있다. 따라서 뜻이 전달 안될리 없고 일이 막힘이 없음으로 재앙이 사라지게 된다. 이것이 이름이 존재하는 목적이다. 이것이 저것과 다른 이름을 갖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신의 기관天官 때문에 그러하다. 모든 사람은 동일한 유類에 대하여 동일한 신의 기관天官을 공유하기 때문에 비슷하게 모사하고 소통한다. 따라서 지각된 외부사물에 대하여 동일한 이름을 붙이기로 함께 약정하는 것이다. 신의 기관天官은 눈이 색깔을 변별하고 귀가 퉁소 소리를 분별하는 등, 오관五官에 덧붙어서 같은 것과 다른 것을 생성한다. 그런 연후에 이름이 사물에 부착되는데 사물이 같으면 이름이 같고 사물이 다르면 이름이 다르다. 이름자체에는 본래의 합당성이 없고 단지 약정에 의한 것일 뿐이다. 약정이 확립되어 습관화 된 것이 합당한 이름이다. 약정과 다르면 합당히지 못한 이름이다. 이름 자체에 실재가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약정에 의하여 실재가 결정된다. 약정이 확립되어 습관화 된 것이 실명實名이다. 이름에 선善이 부착되면 편하고 쉽고 꼭 알맞다."고 하였다. 인간은 모든 사물의 각 유類에 대하여 동일한 신의 기관을天官을 공유한다. 이름은 실제상의 개체의 모든 속성들을 지칭할 수 없다. 따라서 이름은 개체에 대하여 비슷하게 모사하여 소통할 따름이다. 실제로 같은 실상의 것들이 동일한 이름을 갖음으로 사물의 동이同異를 변별할 수 있게 된다. 이름과 실상의 이중적 본체는 최대의 공명共名, 즉 유개념이다. 공자의 정명正名은 이름을 바르게 한다는 것으로서 임금은 임금이라는 이름에 부합하고 신하는 신하라는 이름에 부합하게 하는 것이다. 순자는 이에 덧붙여 이름으로서 귀천을 밝히고 동이同異를 변별하고자 하였다. 본래 이름은 합당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임의로 약정된 것이다. 따라서 이름이 이미 습관화되었다면 임의로 고칠 수 없다.
+ 사辭
순자는 말하기를 "이름은 실상을 전달한다. 이것이 이름의 효용이다. 이름을 합하여 문장을 이루는 것이 문법麗이다. 이름을 안다는 것은 이름의 효용과 문법을 터득하는 것이다. 이름이란 서로 다른 실상을 표시하는 것이다. 명제辭란 서로 다른 실상의 이름들을 나열하여 표현하는 것이다. 변설辨說이란 이름과 실상을 통하여 일관된 법칙을 논구하는 것이다. 남을 이해시키는 것이 변설의 작용이다. 변설이란 분석하는 마음의 상도象道이다. 마음은 도道를 제작하는데 도道는 다스리는 보편법칙이다. 성인의 마음은 도道와 합하고 말說은 마음과 합하고 명제는 말과 합하고 이름이 정확히 사물을 표시하고 참모습을 쉼게 표현하고 분석이 그릇되지 않고 유추가 모순되지 않고 남의 말을 듣고 합리적으로 받아들이고 논변하면 논거를 밝힐 수 있다. 따라서 먹줄로서 곡직曲直을 바로잡듯 정도正道로써 궤변을 변별하기 때문에 사설邪說은 횡행할 수 없고 백가百家는 달아날 데가 없다. 이것이 바로 성인의 변설이다."라고 하였다.
+ 일반 백성
순자는 말하기를 "사설邪說은 정도를 벗어나 멋대로 조작된 것이다. 따라서 현명한 군주는 그의 본분을 깨닫고 더불어 논변하지 않는다. 일반백성은 도道로써 통일시키기는 쉬어도 더불어 리理를 논할 수는 없다. 그런즉, 현명한 군주는 위세로써 군림하고 도道로써 계도하고 칙명으로써 천명하고 논의로써 밝히고 형벌로써 금지시킨다. 그러므로 백성들은 귀신같이 도道에 교화된다. 여기에 변설 따위가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그러나 성왕聖王은 이미 돌아가셨고 현상세계天下는 혼란하여 간교한 주장이 일어났으나 군자에게는 권세가 없고 형벌권이 없기 때문에 변설辨說을 행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따라서 판단, 명명, 논변, 논증은 변설의 중요한 형식이 되었다."고 하였다.재미있게도 순자는 백성들을 가리켜 도道로써 통일시키기는 쉬워도 함께 이치를 논할 수는 없다고 보았다. 이것은 공자가 말한 "백성은 따라오게 할 수는 있어도 깨우칠 수는 없다."는 것과 상통한다. 순자의 제자 이사는 이 말을 근거로 진시황의 사상정책의 통일을 수립하였다.
<참고문헌>
펑유란. 박성규 역, 중국철학사.
2012년 5월 31일 목요일
2012년 5월 29일 화요일
3. 맹자: 왕도王道, 성선性善, 사덕四德, 호연지기浩然之氣
1. 역사적 맥락에서 본 맹자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맹자의 이름은 가軻이다. 맹가孟軻(B.C.371)는 공자의 고향인 노魯나라 근처의 추鄒나라 사람이다. 맹가는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의 제자로부터 학통을 전수받았다. 재미있게도, 맹자는 제濟나라에 가서 선왕을 섬겼으나 선왕은 맹자를 등용하지 않았다. 당시 진秦나라는 상앙을 등용하여 부국강병을 추진하였고, 초楚나라와 위衛나라는 오기를 등용하여 약소국을 상대로 전쟁을 하였고, 제濟나라의 위왕과 선왕은 각각 손자와 전기를 등용하여 제후국들 굴복시키면서 패주가 되어있었다. 당시, 온 천하는 합종연횡하면서 정벌전쟁을 능사로 여기고 있었다. 이런 형편에 맹자는 요순과 삼대 성왕의 덕德으로 계몽하려 했으니 잘 될 리가 없었다. 맹자는 결국 은퇴하였고 제자들과 함께 <시詩>와 <서書>를 재해석하고 공자의 사상을 전파하면서 <맹자孟子> 7편을 지었다. 공자는 육예六藝로써 제자들을 가르쳤는데 맹자도 그러하였다.
2. 맹자의 정치철학
맹자는 정치에 대해서 말하기를 "인정仁政은 토지의 경계를 획정하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정전井田의 토지분할이 균등하지 못하면 봉록의 수입도 공평하게 되지 못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토지의 경계가 바르게 되면 토지분배와 봉록제정은 저절로 해결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주周나라 왕실에서 제정한 관작과 봉록제도에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즉, 맹자는 전통과 선왕의 법도를 좇아갔음으로 보수적이었다.
+ 왕도와 패도
맹자는 왕도王道를 숭상하고 패도覇道를 천시하였다. 왕도는 백성들의 자발적 복종을 통하여 인仁을 이끌어내는 것이고, 패도는 억압과 무력으로 백성들을 굴복시키는 인仁인 것이다. <논어>에 따르면 공자는 말하기를 "제나라 환공이 제후들 간의 맹약을 주재하여 전쟁을 종식시킨 것은 관중의 역량이었다. 그것은 바로 관중의 인덕仁德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맹자는 말하기를 "무력으로 인仁을 가장하는 것은 패도이다. 덕德으로 인仁을 실현하는 것이 왕도王道이다. 백성들이 무력 때문에 복종한다면 그것은 마음으로부터의 복종이 아니라 힘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덕德에 의한 복종이 진정한 복종이니 공자의 70제자는 마음으로부터 공자에게 복종하였다."고 하였다. 또 맹자는 말하기를 "백성이 제일 귀중하다. 사직社稷(토지와 곡식 신)은 그 다음이고 군주는 가볍다. 따라서 천자天子가 되고싶은 자는 백성을 얻을려고 하고 제후가 되고싶은 자는 천자를 얻을려고 하고 대부가 되고싶은 자는 제후를 얻을려고 한다."고 하였다.
+ 정명론正名論
맹자는 말하기를 "인仁의 파괴자는 적賊이고 의義의 파괴자는 잔殘이므로 역적과 잔인한 자는 단지 잡배일 따름이다. 나는 주紂라는 잡배가 처단되었다는 말은 들었어도 군주가 시해되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고 하였다. 알다시피, 주紂는 은나라의 마지막 군주였다. 주周나라 무왕은 포악한 주紂를 죽이고 은왕조를 멸하였다. 맹자는 이 일을 두고 군주시해로 볼 수 없다고 한 것이었다.
+ 성세와 난세
맹자는 말하기를 "현상세계天下에 도道가 서 있으면 소덕小德이 대덕大德을 떠받들고 소현小賢이 대현大賢을 떠받든다. 반면에, 도道가 없으면 작은 것小이 큰 것大을 떠받들고 약한 것이 강한 것을 떠받든다. 이것이 신의 계시天命이다. 신天을 따르는 자는 살고 신天을 거역하는 자는 망한다."고 하였다. 이것이 성세와 난세 때의 노동분업에 대한 맹자의 포인트이다. 대덕大德과 대현大賢은 사회의 최고지배자를 말한다. 이 대덕과 대현을 구비한 자가 신의 아들天子이다.
3. 이상적인 정치
맹자의 이상적인 정치 모델은 요堯, 순舜 두 임금의 선양禪讓이었다. 요堯 임금은 순舜을 추천하고 난 후 붕어했다. 그러자 순舜은 요堯임금의 아들인 단주가 천하天下를 승계하도록 남쪽으로 피했다. 그러나 제후들과 판관들은 천자天子를 조회하려고 단주丹朱에게 가지않고 순舜에게로 갔다. 정치인들도 단주丹朱를 찬양하기보다 순舜을 찬양하였다. 맹자는 이것을 가리켜 신天을 따르는 것이라고 하였다. 또 순舜임금이 우禹를 추천한 후에 붕어하였다. 그러자 우禹는 삼년 상을 마치고 순舜임금의 아들인 상균商均이 천하를 승계하도록 몸을 피하였다. 그러나 천하天下의 백성들은 상균商均을 따르지 않고 우禹를 따랐다. 그후 우禹임금은 익益을 추천하고 붕어하였다. 익益은 삼년상을 마치고 우禹임금의 아들인 계啓 위해서 북쪽으로 피했다. 그러나 조회나 재판하는 자들은 익益에게 가지않고 우禹임금의 아들인 계啓에게로 갔다. 맹자에 따르면 신의 계시天命을 위하든 위하지 않든, 신의 계시天命는 이루어지거나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필부로서 천하를 얻고자 하는 자는 덕망이 순舜, 우禹같아야 하고 천자天子의 추천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맹자의 포인트이다.
+ 토지 조세 제도
맹자에 따르면 토지는 9등분으로 나누어서 8가구의 농민이 각각 경작하고 남은 중간의 토지는 공동으로 경작하여 토지소유자에게 세금으로 바친다는 것이다. 이것이 정전제井田制의 조助이다. 대체로 고대의 토지는 군주와 귀족의 사유재산이었고 농민은 귀족의 토지를 수급받는 농노이자 경작자였다.
4. 사단四端과 사덕四德
맹자에 따르면 인간은 누구나 남에게 모질지 못하는 마음이 있다고 하였다. 맹자는 말하기를 "막 우물에 빠지려는 아이를 보면 누구라도 깜짝놀라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생긴다. 측은지심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요, 수오지심羞惡之心이 없어도 사람이 아니요, 시비지심是非之心이 없어도 사람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측은지심은 불쌍한 것을 아는 마음이고, 수오지심은 창피한 것을 아는 마음이고, 사양지심은 사양할 줄 아는 마음이고, 시비지심은 옳고 그른 것을 아는 마음이다. 맹자는 이 네가지를 사단四端이라고 하면서, 모든 인간은 몸에 사지가 있는 것처럼 인간본성은 사단四端을 갖고있다고 하였다. 맹자는 이 사단四端이 능히 발전되면 사덕四德이 된다고 하였다. 즉 측은지심의 덕德은 인仁이요, 수오지심의 덕德은 의義요, 사양지심의 덕德은 예禮요, 시비지심의 덕德은 지智이다. 맹자는 말하기를 "인의예지仁義禮智는 외부로부터 주입된 것이 아니라 본디 있던 것이다. 인의예지는 구하면 얻고 버려두면 잃는다. 사람간의 격차가 무한히 벌어지는 이유는 각자의 재질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공도자公都子가 맹자에게 묻기를 "다 같은 사람인데도 왜 어떤 사람은 대인大人이 되고 또 다른 사람은 소인小人이 됩니까."라고 하였다. 맹자는 답하기를 "대체大體를 따르면 대인이 되고 소체小體를 따르면 소인이 된다."고 하였다. 여기서 대체大體란 마음이고 소체小體란 귀, 눈 등 감각기관을 말한다. 맹자에 따르면 귀와 눈 등 감각기관은 사고력이 없으므로 외물과 접촉하면 이끌릴 따름이다. 그러나 마음의 기능은 사유이므로 사유하면 합당함을 얻고 사유하지 않으면 합당함을 얻지 못한다. 이것은 신天이 각자에게 부여한 것이다. 따라서 대자大者를 확립하면 소자小者는 점령해들어올 수 없다. 이것으로 대인大人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맹자의 포인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에 따르면 인간과 동물은 모두 성욕과 식욕을 갖고있지만 인간이 동물과 구별되는 것은 이성을 갖고있기 때문이다. 이성의 기능은 사유이다. 인간은 이성적 사유를 통하여 감각을 제어할 수 있다.
+ 성선性善
고자告子는 생긴 그대로가 성性이라고 주장하면서 말하기를 흰 깃털의 흼은 하얀 눈의 흼과 같고, 흰 눈의 흼은 흰 옥의 흼과 같다." 고 하였다. 그러자 맹자는 고자告子에게 반문하기를 "그렇다면 개의 성性이 소의 성性과 같고 소의 성性이 인간의 성性과 같다는 말입니까."라고 물었다. 재미있게도 흼白은 한가지 이지만 성性은 한가지가 아니다. 인간의 성性은 소의 성性과 다르다. 인간의 성性은 인간다움을 포함한다. 따라서 그 성性을 포기하면 동물과 같아질 것이다. 맹자는 말하기를 "인仁은 인간의 마음이요, 의義는 인간의 길이다."라고 하였다. 즉 인仁에 거하지 않고 의義를 따르지 않으면 인간이 아니라는 것이다. 재미있게도, 맹자는 양주楊朱와 묵자墨子를 비판하면서 말하기를 "양주楊朱의 위아爲我주의는 군주의 존재를 부정한 것이요, 묵자墨子의 겸애주의는 아버지의 존재를 부정한 것이므로 군주도 아버지도 없다면 금수이다."라고 일갈하였다.
+ 인간관계
맹자에 따르면 사단四端, 즉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이 사회 속에서 발현된 것이 인륜人倫이다. 맹자는 말하기를 "인仁의 실제는 부모를 섬기는 데 있고, 의義의 실제는 형을 따르는데 있고, 지智의 실제는 이 두 도리를 아는 데 있고, 예禮의 실제는 이 두 도리의 내용을 형식화하는 데 있다. 락樂의 실제는 이 도리를 즐거워하는 데 있다."고 하였다. 한편 오륜이란 군신君臣, 부자父子, 형제兄弟. 부부夫婦, 붕우朋友의 인간 관계이다. 맹자는 누구든 스스로 노력하기만 한다면 순舜임금처럼 될 수 있다고 말하면서 인仁에 거하고 의義를 따를 능력이 없다면 자포자기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맹자는 개인의 성정을 극히 중시하면서 개인의 자유를 강조하였다. 맹자는 말하기를 "대인大人은 예禮답지 않은 예禮, 의義답지 않은 의義를 행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미 언급했듯이 맹자가 말하는 인의예지는 외부로부터 각자에게 주입된 것이 아니라 각자에게 본디부터 있던 것이다. 따라서 맹자는 개인의 판단을 중시하였다. 그럼, 누구나 다 성인 군자가 될 수 있는가. 맹자는 말하기를 "성공 여부는 신天에 달려 있을 따름입니다. 군주인들 어쩌겠습니까. 선善을 행하는 외에 별 도리가 없지요."라고 하였다.
+ 운명運命
맹자는 말하기를 "죽은 사람을 곡하고 슬퍼함은 산 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다. 도덕에 따라 행하는 것은 벼슬자리를 얻기위해서가 아니다. 모든 말을 신실하게 함은 내 행실을 정당화하기위해서가 아니다. 군자는 법도에 따라 행함으로써 명命을 기다릴 뿐이다."라고 하였다. 아무도 도모하지 않았지만 행해지는 것이 신의 뜻天命이고 아무 때나 닥치는 것이 운명運命이다. 따라서 인간의 행위에는 그 정당성 여부만을 물을 수 있으므로 마땅히 해야하는 행위는 하지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맹자는 자강불식의 선善을 행할 따름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 반-공리주의反-功利主義
맹자에 따르면 모든 인간은 본성적으로 측은, 수오, 사양, 시비의 마음인 사단四端이 있다. 인간은 이 사단四端의 인간본성을 발전시켜 인, 의, 예, 지의 사덕四德을 갖출 수 있다. 인간은 사덕四德이 이利롭기 때문에 갖추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도리理이기 때문에 갖추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맹자의 포인트이다. 맹자는 의義를 주장하면서 이利를 완강히 반대하였다. 반면에 묵자墨子는 이利를 강조하면서 공리주의 편에 섰다. 묵자가 후장厚葬과 구상久喪을 비판하면서 절장節葬과 단상短喪을 주장한 것은 다분히 공리주의적이다.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는 장례를 정중히 하고 조상제사에 정성을 다하면 덕德이 두터워진다고 하였다." 이러한 자사의 발상 또한 공리주의적이다. 반면에 맹자는 후장과 구상은 다만 인간이 도리理를 다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의義를 강조하였다.
5. 천성天性
맹자는 말하기를 "자신의 마음을 다 발휘하면 성性을 알게되고 성性을 알게되면 신天을 알게된다. 자신의 마음을 보존하고 본성本性을 배양하는 것이 신을 섬기는事天 방법이다. 단명과 장수에 상관하지 않고 오직 수양함으로써 신의 뜻天命을 기다린다."고 하였다. 인간의 본성은 신天이 부여한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대체大體인 마음을 다하면 본성을 알게된다. 인간 본성을 아는 것은 신을 아는 것知天이다. 맹자는 말하기를 "군자가 지나가는 곳은 신天이 머무는 곳이어서 천상天上과 지상地上이 함께 관통하므로 도움이 적지않다."고 하였다. 이것은 다분히 신비주의적이다. 또 맹자는 말하기를 "모든 사물은 자기로부터 비롯된다. 자신을 돌이켜 그것을 찾으면 그보다 더한 기쁨이 없다. 따라서 서恕를 부단히 실행하는 것이 인仁을 구하는 가장 빠른 길이다. 서恕란 자신의 마음에 타자를 비추어보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맹자의 포인트는 서恕를 통하여 인仁을 추구하고, 인仁을 얻는 것이 성誠이고 성誠이 이루어질때 자기와 타자의 구별이 소멸되므로 자기와 모든 사물은 일체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맹자가 말하는 호연지기浩然之氣이다. 인간의 마음心과 인간의 본성性과 신天은 본래 일체이다. 그럼, 호연지기는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 맹자는 말하기를 "그 기氣는 바로 의義와 도道가 함께 배합되어야먄 이루어진다. 그 기氣는 의義를 축적하여 생기는 것이지 단 한번의 의義를 취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이미 언급했다시피, 인仁 인간의 본성인 측은지심에서 나온 덕이다. 이 덕德을 집적함으로써 호연지기를 얻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맹자의 포인트이다.
6. 공손룡公孫龍
공손룡(B.C.320)은 조趙나라 사람이다.
+ 공손룡의 백마론
공손룡은 '흰말은 말이 아니다白馬非馬.'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말馬이 지시하는 것은 형태이고 흼이 지시하는 것은 색깔이다. 따라서 색깔이 지시하는 것은 형태를 지시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말은 흰 것과는 다르므로 흰말은 말이 아니다. 말馬은 본래 색깔이 있기 때문에 흰말이 존재한다. 만약 말馬에 색깔이 없다면 말馬 자체만 존재하게된다. 즉, 흰말白馬은 말馬과 무관한 것이다. 흰말이란 흼白과 말馬의 결합이므로 말馬이 아니다. 즉, 흰말은 말이 아니다. 흼 자체는 아직 대상을 한정하지 않지만 현상세계의 흰말의 경우 흼은 대상을 한정한다. 따라서 대상을 한정한 것은 본체세계의 흼 자체는 아닌 것이다. 현상세계에 존재하는 흰말의 흼은 보편적인 흼이 아니다. 공손룡은 지指와 물物을 구별하면서, '말馬'과 '흼白' 그리고 '흰말白馬' 등 물物이 지시하는 대상은 지指라고 하였다. <공손룡자>에 따르면 세계天地와 그 안의 모든 사물은 물物이다. 사물은 실제로 시공 가운데 위치를 점하는데 사물의 이름은 실재를 지시한다. 실재의 내용을 바로잡는 것이 정명正名이다. 물物이란 시공간 안에서 위치를 점하는 구체적 개체이다. 지指란 각 사물 개체의 이름이 지시하는 대상이다. 이름은 개체를 지시하기도 하지만 보편자를 지시하기도 한다. 즉, 지指의 외연은 개체이고 지指의 내포는 보편자, 즉 본질이다. 공손룡의 포인트는 말馬의 본질은 흼白에 달려있으므로 휨白을 파악하여만 백마白馬를 알 수 있다는 의미였다. 말馬이라는 이름은 이 말馬, 저 말馬 등의 개체를 지시할 수도 있고 말 그 자체, 즉 보편자를 지시할 수도 있다. 이때 공손룡이 말하는 지指는 플라톤이 말하는 객관적 관념, 즉 이데아와 일치한다.
+ 공손룡의 견백론堅白論
공손룡은 굳음堅과 흼白은 서로 다른 보편자라고 주장하였다. 이를테면 여기 굳고 흰 돌이 있다. 이 돌을 볼 때, 돌의 흼은 포착하지만 돌의 굳음은 포착하지 못한다. 반면에 이 돌을 만질 때, 돌의 굳음은 포착하지만 돌의 흼은 포착하지 못한다. 즉 돌의 흼과 굳음은 서로를 포함하지 않기 때문에 분리된다. 눈으로 돌의 굳음을 감각할 수 없고, 손으로 돌의 흼을 감각할 수 없다고 해서 굳음과 흼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 즉, 돌 속에는 분명 굳음과 흼이 존재한다. 따라서 돌의 굳음과 흼은 분리할 수 없다. 공손룡은 말하기를 "이 때 흼은 그 돌에 한정되지 않는 흼이고, 굳음은 그 돌에 한정되지 않는 굳음이다. 그런즉, 어찌 굳음과 흼이 돌 속에 존재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사물 중에는 굳지만 희지 않은 것이 존재하고, 희지만 굳지 않은 것이 존재하므로 굳음과 흼은 서로 다른 두 보편자이다. 이것이 공손룡의 포인트이다. 공손룡은 말하기를 "굳음은 돌에 깃들어서 그 돌의 속성이 된다. 원래 굳음은 그 자체로서 굳음이다. 그 굳음은 현상세계天下에 존재하지 않고 숨어있다. 또 흼이 스스로 흴 수 없다면 어떻게 돌을 희게 할 수 있는가. 흼은 돌에 의존할 필요없이 저절로 희다. 흼은 돌이 없어도 상관없으므로 흼은 돌에 의존할 필요가 없겠다. 따라서 흼은 돌과 분리되어있다."고 하였다. 정말 멋진 말이다. 굳음과 흼은 모두 독립적으로 자존하는 보편자이다. 이것이 공손룡의 포인트이다. 재미있게도, 인간이 감각하는 것은 돌에 깃든 개체로서의 굳음과 돌에 깃든 개체로서의 흼에 불과하다. 보편자로서의 굳음과 흼은 숨어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말하기를 "개체는 감각할 수 있지만 사유할 수 없고 개념은 사유할 수 있지만 감각할 수 없다."고 하였다.
<참고문헌>
펑유란. 박성규 역, 중국철학사.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맹자의 이름은 가軻이다. 맹가孟軻(B.C.371)는 공자의 고향인 노魯나라 근처의 추鄒나라 사람이다. 맹가는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의 제자로부터 학통을 전수받았다. 재미있게도, 맹자는 제濟나라에 가서 선왕을 섬겼으나 선왕은 맹자를 등용하지 않았다. 당시 진秦나라는 상앙을 등용하여 부국강병을 추진하였고, 초楚나라와 위衛나라는 오기를 등용하여 약소국을 상대로 전쟁을 하였고, 제濟나라의 위왕과 선왕은 각각 손자와 전기를 등용하여 제후국들 굴복시키면서 패주가 되어있었다. 당시, 온 천하는 합종연횡하면서 정벌전쟁을 능사로 여기고 있었다. 이런 형편에 맹자는 요순과 삼대 성왕의 덕德으로 계몽하려 했으니 잘 될 리가 없었다. 맹자는 결국 은퇴하였고 제자들과 함께 <시詩>와 <서書>를 재해석하고 공자의 사상을 전파하면서 <맹자孟子> 7편을 지었다. 공자는 육예六藝로써 제자들을 가르쳤는데 맹자도 그러하였다.
2. 맹자의 정치철학
맹자는 정치에 대해서 말하기를 "인정仁政은 토지의 경계를 획정하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정전井田의 토지분할이 균등하지 못하면 봉록의 수입도 공평하게 되지 못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토지의 경계가 바르게 되면 토지분배와 봉록제정은 저절로 해결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주周나라 왕실에서 제정한 관작과 봉록제도에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즉, 맹자는 전통과 선왕의 법도를 좇아갔음으로 보수적이었다.
+ 왕도와 패도
맹자는 왕도王道를 숭상하고 패도覇道를 천시하였다. 왕도는 백성들의 자발적 복종을 통하여 인仁을 이끌어내는 것이고, 패도는 억압과 무력으로 백성들을 굴복시키는 인仁인 것이다. <논어>에 따르면 공자는 말하기를 "제나라 환공이 제후들 간의 맹약을 주재하여 전쟁을 종식시킨 것은 관중의 역량이었다. 그것은 바로 관중의 인덕仁德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맹자는 말하기를 "무력으로 인仁을 가장하는 것은 패도이다. 덕德으로 인仁을 실현하는 것이 왕도王道이다. 백성들이 무력 때문에 복종한다면 그것은 마음으로부터의 복종이 아니라 힘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덕德에 의한 복종이 진정한 복종이니 공자의 70제자는 마음으로부터 공자에게 복종하였다."고 하였다. 또 맹자는 말하기를 "백성이 제일 귀중하다. 사직社稷(토지와 곡식 신)은 그 다음이고 군주는 가볍다. 따라서 천자天子가 되고싶은 자는 백성을 얻을려고 하고 제후가 되고싶은 자는 천자를 얻을려고 하고 대부가 되고싶은 자는 제후를 얻을려고 한다."고 하였다.
+ 정명론正名論
맹자는 말하기를 "인仁의 파괴자는 적賊이고 의義의 파괴자는 잔殘이므로 역적과 잔인한 자는 단지 잡배일 따름이다. 나는 주紂라는 잡배가 처단되었다는 말은 들었어도 군주가 시해되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고 하였다. 알다시피, 주紂는 은나라의 마지막 군주였다. 주周나라 무왕은 포악한 주紂를 죽이고 은왕조를 멸하였다. 맹자는 이 일을 두고 군주시해로 볼 수 없다고 한 것이었다.
+ 성세와 난세
맹자는 말하기를 "현상세계天下에 도道가 서 있으면 소덕小德이 대덕大德을 떠받들고 소현小賢이 대현大賢을 떠받든다. 반면에, 도道가 없으면 작은 것小이 큰 것大을 떠받들고 약한 것이 강한 것을 떠받든다. 이것이 신의 계시天命이다. 신天을 따르는 자는 살고 신天을 거역하는 자는 망한다."고 하였다. 이것이 성세와 난세 때의 노동분업에 대한 맹자의 포인트이다. 대덕大德과 대현大賢은 사회의 최고지배자를 말한다. 이 대덕과 대현을 구비한 자가 신의 아들天子이다.
3. 이상적인 정치
맹자의 이상적인 정치 모델은 요堯, 순舜 두 임금의 선양禪讓이었다. 요堯 임금은 순舜을 추천하고 난 후 붕어했다. 그러자 순舜은 요堯임금의 아들인 단주가 천하天下를 승계하도록 남쪽으로 피했다. 그러나 제후들과 판관들은 천자天子를 조회하려고 단주丹朱에게 가지않고 순舜에게로 갔다. 정치인들도 단주丹朱를 찬양하기보다 순舜을 찬양하였다. 맹자는 이것을 가리켜 신天을 따르는 것이라고 하였다. 또 순舜임금이 우禹를 추천한 후에 붕어하였다. 그러자 우禹는 삼년 상을 마치고 순舜임금의 아들인 상균商均이 천하를 승계하도록 몸을 피하였다. 그러나 천하天下의 백성들은 상균商均을 따르지 않고 우禹를 따랐다. 그후 우禹임금은 익益을 추천하고 붕어하였다. 익益은 삼년상을 마치고 우禹임금의 아들인 계啓 위해서 북쪽으로 피했다. 그러나 조회나 재판하는 자들은 익益에게 가지않고 우禹임금의 아들인 계啓에게로 갔다. 맹자에 따르면 신의 계시天命을 위하든 위하지 않든, 신의 계시天命는 이루어지거나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필부로서 천하를 얻고자 하는 자는 덕망이 순舜, 우禹같아야 하고 천자天子의 추천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맹자의 포인트이다.
+ 토지 조세 제도
맹자에 따르면 토지는 9등분으로 나누어서 8가구의 농민이 각각 경작하고 남은 중간의 토지는 공동으로 경작하여 토지소유자에게 세금으로 바친다는 것이다. 이것이 정전제井田制의 조助이다. 대체로 고대의 토지는 군주와 귀족의 사유재산이었고 농민은 귀족의 토지를 수급받는 농노이자 경작자였다.
4. 사단四端과 사덕四德
맹자에 따르면 인간은 누구나 남에게 모질지 못하는 마음이 있다고 하였다. 맹자는 말하기를 "막 우물에 빠지려는 아이를 보면 누구라도 깜짝놀라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생긴다. 측은지심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요, 수오지심羞惡之心이 없어도 사람이 아니요, 시비지심是非之心이 없어도 사람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측은지심은 불쌍한 것을 아는 마음이고, 수오지심은 창피한 것을 아는 마음이고, 사양지심은 사양할 줄 아는 마음이고, 시비지심은 옳고 그른 것을 아는 마음이다. 맹자는 이 네가지를 사단四端이라고 하면서, 모든 인간은 몸에 사지가 있는 것처럼 인간본성은 사단四端을 갖고있다고 하였다. 맹자는 이 사단四端이 능히 발전되면 사덕四德이 된다고 하였다. 즉 측은지심의 덕德은 인仁이요, 수오지심의 덕德은 의義요, 사양지심의 덕德은 예禮요, 시비지심의 덕德은 지智이다. 맹자는 말하기를 "인의예지仁義禮智는 외부로부터 주입된 것이 아니라 본디 있던 것이다. 인의예지는 구하면 얻고 버려두면 잃는다. 사람간의 격차가 무한히 벌어지는 이유는 각자의 재질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공도자公都子가 맹자에게 묻기를 "다 같은 사람인데도 왜 어떤 사람은 대인大人이 되고 또 다른 사람은 소인小人이 됩니까."라고 하였다. 맹자는 답하기를 "대체大體를 따르면 대인이 되고 소체小體를 따르면 소인이 된다."고 하였다. 여기서 대체大體란 마음이고 소체小體란 귀, 눈 등 감각기관을 말한다. 맹자에 따르면 귀와 눈 등 감각기관은 사고력이 없으므로 외물과 접촉하면 이끌릴 따름이다. 그러나 마음의 기능은 사유이므로 사유하면 합당함을 얻고 사유하지 않으면 합당함을 얻지 못한다. 이것은 신天이 각자에게 부여한 것이다. 따라서 대자大者를 확립하면 소자小者는 점령해들어올 수 없다. 이것으로 대인大人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맹자의 포인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에 따르면 인간과 동물은 모두 성욕과 식욕을 갖고있지만 인간이 동물과 구별되는 것은 이성을 갖고있기 때문이다. 이성의 기능은 사유이다. 인간은 이성적 사유를 통하여 감각을 제어할 수 있다.
+ 성선性善
고자告子는 생긴 그대로가 성性이라고 주장하면서 말하기를 흰 깃털의 흼은 하얀 눈의 흼과 같고, 흰 눈의 흼은 흰 옥의 흼과 같다." 고 하였다. 그러자 맹자는 고자告子에게 반문하기를 "그렇다면 개의 성性이 소의 성性과 같고 소의 성性이 인간의 성性과 같다는 말입니까."라고 물었다. 재미있게도 흼白은 한가지 이지만 성性은 한가지가 아니다. 인간의 성性은 소의 성性과 다르다. 인간의 성性은 인간다움을 포함한다. 따라서 그 성性을 포기하면 동물과 같아질 것이다. 맹자는 말하기를 "인仁은 인간의 마음이요, 의義는 인간의 길이다."라고 하였다. 즉 인仁에 거하지 않고 의義를 따르지 않으면 인간이 아니라는 것이다. 재미있게도, 맹자는 양주楊朱와 묵자墨子를 비판하면서 말하기를 "양주楊朱의 위아爲我주의는 군주의 존재를 부정한 것이요, 묵자墨子의 겸애주의는 아버지의 존재를 부정한 것이므로 군주도 아버지도 없다면 금수이다."라고 일갈하였다.
+ 인간관계
맹자에 따르면 사단四端, 즉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이 사회 속에서 발현된 것이 인륜人倫이다. 맹자는 말하기를 "인仁의 실제는 부모를 섬기는 데 있고, 의義의 실제는 형을 따르는데 있고, 지智의 실제는 이 두 도리를 아는 데 있고, 예禮의 실제는 이 두 도리의 내용을 형식화하는 데 있다. 락樂의 실제는 이 도리를 즐거워하는 데 있다."고 하였다. 한편 오륜이란 군신君臣, 부자父子, 형제兄弟. 부부夫婦, 붕우朋友의 인간 관계이다. 맹자는 누구든 스스로 노력하기만 한다면 순舜임금처럼 될 수 있다고 말하면서 인仁에 거하고 의義를 따를 능력이 없다면 자포자기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맹자는 개인의 성정을 극히 중시하면서 개인의 자유를 강조하였다. 맹자는 말하기를 "대인大人은 예禮답지 않은 예禮, 의義답지 않은 의義를 행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미 언급했듯이 맹자가 말하는 인의예지는 외부로부터 각자에게 주입된 것이 아니라 각자에게 본디부터 있던 것이다. 따라서 맹자는 개인의 판단을 중시하였다. 그럼, 누구나 다 성인 군자가 될 수 있는가. 맹자는 말하기를 "성공 여부는 신天에 달려 있을 따름입니다. 군주인들 어쩌겠습니까. 선善을 행하는 외에 별 도리가 없지요."라고 하였다.
+ 운명運命
맹자는 말하기를 "죽은 사람을 곡하고 슬퍼함은 산 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다. 도덕에 따라 행하는 것은 벼슬자리를 얻기위해서가 아니다. 모든 말을 신실하게 함은 내 행실을 정당화하기위해서가 아니다. 군자는 법도에 따라 행함으로써 명命을 기다릴 뿐이다."라고 하였다. 아무도 도모하지 않았지만 행해지는 것이 신의 뜻天命이고 아무 때나 닥치는 것이 운명運命이다. 따라서 인간의 행위에는 그 정당성 여부만을 물을 수 있으므로 마땅히 해야하는 행위는 하지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맹자는 자강불식의 선善을 행할 따름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 반-공리주의反-功利主義
맹자에 따르면 모든 인간은 본성적으로 측은, 수오, 사양, 시비의 마음인 사단四端이 있다. 인간은 이 사단四端의 인간본성을 발전시켜 인, 의, 예, 지의 사덕四德을 갖출 수 있다. 인간은 사덕四德이 이利롭기 때문에 갖추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도리理이기 때문에 갖추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맹자의 포인트이다. 맹자는 의義를 주장하면서 이利를 완강히 반대하였다. 반면에 묵자墨子는 이利를 강조하면서 공리주의 편에 섰다. 묵자가 후장厚葬과 구상久喪을 비판하면서 절장節葬과 단상短喪을 주장한 것은 다분히 공리주의적이다.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는 장례를 정중히 하고 조상제사에 정성을 다하면 덕德이 두터워진다고 하였다." 이러한 자사의 발상 또한 공리주의적이다. 반면에 맹자는 후장과 구상은 다만 인간이 도리理를 다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의義를 강조하였다.
5. 천성天性
맹자는 말하기를 "자신의 마음을 다 발휘하면 성性을 알게되고 성性을 알게되면 신天을 알게된다. 자신의 마음을 보존하고 본성本性을 배양하는 것이 신을 섬기는事天 방법이다. 단명과 장수에 상관하지 않고 오직 수양함으로써 신의 뜻天命을 기다린다."고 하였다. 인간의 본성은 신天이 부여한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대체大體인 마음을 다하면 본성을 알게된다. 인간 본성을 아는 것은 신을 아는 것知天이다. 맹자는 말하기를 "군자가 지나가는 곳은 신天이 머무는 곳이어서 천상天上과 지상地上이 함께 관통하므로 도움이 적지않다."고 하였다. 이것은 다분히 신비주의적이다. 또 맹자는 말하기를 "모든 사물은 자기로부터 비롯된다. 자신을 돌이켜 그것을 찾으면 그보다 더한 기쁨이 없다. 따라서 서恕를 부단히 실행하는 것이 인仁을 구하는 가장 빠른 길이다. 서恕란 자신의 마음에 타자를 비추어보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맹자의 포인트는 서恕를 통하여 인仁을 추구하고, 인仁을 얻는 것이 성誠이고 성誠이 이루어질때 자기와 타자의 구별이 소멸되므로 자기와 모든 사물은 일체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맹자가 말하는 호연지기浩然之氣이다. 인간의 마음心과 인간의 본성性과 신天은 본래 일체이다. 그럼, 호연지기는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 맹자는 말하기를 "그 기氣는 바로 의義와 도道가 함께 배합되어야먄 이루어진다. 그 기氣는 의義를 축적하여 생기는 것이지 단 한번의 의義를 취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이미 언급했다시피, 인仁 인간의 본성인 측은지심에서 나온 덕이다. 이 덕德을 집적함으로써 호연지기를 얻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맹자의 포인트이다.
6. 공손룡公孫龍
공손룡(B.C.320)은 조趙나라 사람이다.
+ 공손룡의 백마론
공손룡은 '흰말은 말이 아니다白馬非馬.'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말馬이 지시하는 것은 형태이고 흼이 지시하는 것은 색깔이다. 따라서 색깔이 지시하는 것은 형태를 지시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말은 흰 것과는 다르므로 흰말은 말이 아니다. 말馬은 본래 색깔이 있기 때문에 흰말이 존재한다. 만약 말馬에 색깔이 없다면 말馬 자체만 존재하게된다. 즉, 흰말白馬은 말馬과 무관한 것이다. 흰말이란 흼白과 말馬의 결합이므로 말馬이 아니다. 즉, 흰말은 말이 아니다. 흼 자체는 아직 대상을 한정하지 않지만 현상세계의 흰말의 경우 흼은 대상을 한정한다. 따라서 대상을 한정한 것은 본체세계의 흼 자체는 아닌 것이다. 현상세계에 존재하는 흰말의 흼은 보편적인 흼이 아니다. 공손룡은 지指와 물物을 구별하면서, '말馬'과 '흼白' 그리고 '흰말白馬' 등 물物이 지시하는 대상은 지指라고 하였다. <공손룡자>에 따르면 세계天地와 그 안의 모든 사물은 물物이다. 사물은 실제로 시공 가운데 위치를 점하는데 사물의 이름은 실재를 지시한다. 실재의 내용을 바로잡는 것이 정명正名이다. 물物이란 시공간 안에서 위치를 점하는 구체적 개체이다. 지指란 각 사물 개체의 이름이 지시하는 대상이다. 이름은 개체를 지시하기도 하지만 보편자를 지시하기도 한다. 즉, 지指의 외연은 개체이고 지指의 내포는 보편자, 즉 본질이다. 공손룡의 포인트는 말馬의 본질은 흼白에 달려있으므로 휨白을 파악하여만 백마白馬를 알 수 있다는 의미였다. 말馬이라는 이름은 이 말馬, 저 말馬 등의 개체를 지시할 수도 있고 말 그 자체, 즉 보편자를 지시할 수도 있다. 이때 공손룡이 말하는 지指는 플라톤이 말하는 객관적 관념, 즉 이데아와 일치한다.
+ 공손룡의 견백론堅白論
공손룡은 굳음堅과 흼白은 서로 다른 보편자라고 주장하였다. 이를테면 여기 굳고 흰 돌이 있다. 이 돌을 볼 때, 돌의 흼은 포착하지만 돌의 굳음은 포착하지 못한다. 반면에 이 돌을 만질 때, 돌의 굳음은 포착하지만 돌의 흼은 포착하지 못한다. 즉 돌의 흼과 굳음은 서로를 포함하지 않기 때문에 분리된다. 눈으로 돌의 굳음을 감각할 수 없고, 손으로 돌의 흼을 감각할 수 없다고 해서 굳음과 흼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 즉, 돌 속에는 분명 굳음과 흼이 존재한다. 따라서 돌의 굳음과 흼은 분리할 수 없다. 공손룡은 말하기를 "이 때 흼은 그 돌에 한정되지 않는 흼이고, 굳음은 그 돌에 한정되지 않는 굳음이다. 그런즉, 어찌 굳음과 흼이 돌 속에 존재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사물 중에는 굳지만 희지 않은 것이 존재하고, 희지만 굳지 않은 것이 존재하므로 굳음과 흼은 서로 다른 두 보편자이다. 이것이 공손룡의 포인트이다. 공손룡은 말하기를 "굳음은 돌에 깃들어서 그 돌의 속성이 된다. 원래 굳음은 그 자체로서 굳음이다. 그 굳음은 현상세계天下에 존재하지 않고 숨어있다. 또 흼이 스스로 흴 수 없다면 어떻게 돌을 희게 할 수 있는가. 흼은 돌에 의존할 필요없이 저절로 희다. 흼은 돌이 없어도 상관없으므로 흼은 돌에 의존할 필요가 없겠다. 따라서 흼은 돌과 분리되어있다."고 하였다. 정말 멋진 말이다. 굳음과 흼은 모두 독립적으로 자존하는 보편자이다. 이것이 공손룡의 포인트이다. 재미있게도, 인간이 감각하는 것은 돌에 깃든 개체로서의 굳음과 돌에 깃든 개체로서의 흼에 불과하다. 보편자로서의 굳음과 흼은 숨어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말하기를 "개체는 감각할 수 있지만 사유할 수 없고 개념은 사유할 수 있지만 감각할 수 없다."고 하였다.
<참고문헌>
펑유란. 박성규 역, 중국철학사.
2012년 5월 25일 금요일
2. 노자: 상도常道, 개명開明, 현덕玄德, 진인眞人
1. 역사적 맥락에서 본 노자
사마천의 <사기>의 <노장신한열전>에 따르면 노자는 초나라 사람이다. 성은 이李이고 이름은 이耳이고 또 자는 담聃이다. 노자, 즉 이이李耳는 도덕道德을 수양하면서 스스로 드러내지않고 명성을 좇지 아니하였다. 이이는 전국 시대 사람으로서, 전설상의 인물인 노담과 구별된다. 재미있게도, 당시 고대의 위대한 진인眞人인 노담에 대한 전설이 있었다. 이이는 노담의 이름을 빌려서 자신의 아이디어를 전파하였다. 사마천의 부친인 사마담에 따르면 노자의 도가道家는 인간정신을 무형의 도에 합일시킴으로써 사물의 이치를 깨닫는 것이라고 했다. 또 노자의 도가는 음양가의 순리와 유가와 묵가의 선善을 채택하였고 명가名家와 법가法家의 불비를 충족하였다. 도가道家는 시간에 따라 변해가는 사물을 보면서, 풍속과 질서를 세웠으므로 마땅히 온당하지 않은 바가 없었고, 그 아이디어는 간략하였지만 매우 이로웠다.
2. 초나라
노자, 즉 이이李耳는 초나라 사람이었다. 초나라 사람들은 남방의 신흥 민족으로서 고급문화가 없었고 심한 방언를 썼던 야만인들이었다. 초나라 사람들은 선왕의 도를 경멸했던 민족이었다. 재미있게도, 초나라 사람이 주周문화를 동경할 경우, 북방인 중원으로 유학해야 했다. 초나라 사람 진량陳良은 북방으로 유학했는데 북방의 학자들도 그를 쉽게 능가하지 못했다. <한서>의 <지리지>에 따르면 초나라는 양자강과 풍요로운 산림의 덕택으로 백성들은 먹을 것이 풍족하였고 나약하기는 하였으나 삶을 즐겼고 재산을 축적할 줄 몰랐다. 음식은 서로 나누어 먹었고 추위와 굶주림을 걱정하지 않았지만 큰 부자도 없었다 초나라 사람들은 무속과 귀신을 신봉하고 음사淫祀를 중시했다.
3. 도道, 덕德
고대의 하늘天은 主宰之天, 즉 상재로서 인격신의 성격을 갖고있었다. 공자와 묵자는 고대의 하늘天 개념을 이어받았다. 노자는 하늘과 땅은 인하지 않다天地不仁고 하였다. 노자는 신의 세계와 인간 세계를 이원화했던 것이다. 한비자는 노자를 해석하면서 말하기를 "도道는 사물의 본질을 드러나게하는 리理이다. 리理는 모든 사물의 형식이고, 도道는 모든 사물을 드러낸다. 왜냐하면 도道는 모든 사물의 리理를 관장하기 때문이다. 모든 사물은 각각 다른 리理가 있고 도道는 모든 리理의 주재자이다. 따라서 세계天地가 변화하면 도道 또한 운동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 노자에 따르면 도道란 세계天地에 앞서 이미 소리도 형체도 없이 독립적으로 운행하는 존재이다. 도는 모든 사물을 낳고 모든 사물은 도道에 의존한다. 따라서 사람은 인간 세계에 의존하고 인간세계는 신天을 의존하고 신은 도道에 의존하고 도는 자연自然을 의존한다. 도道는 항상 무위無爲하지만 그것은 단지 무위가 아니다. 이것이 노자의 포인트이다. 도道는 모든 사물의 생성원리이다. 모든 사물은 유有라고 말할 수 있지만 도道는 유有가 아니므로 무無라고만 말할 수 있겠다. 따라서 도道의 체體는 무無이고 도의 용用은 유有이겠다. 노자는 말하기를 "도道는 하나를 낳고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셋을 낳고 셋은 모든 사물을 낳고 모든 사물은 음陰과 양陽이 맞물려 조화를 이룬다."고 하였다. 여기서 하나란 태일太一을 말하고 둘은 천天과 지地를 말하고 셋은 음기陰氣, 양기陽氣, 화기和氣를 말한다. 노자는 말하기를 "도道는 모든 사물의 근거로서 홀연히 형상을 드러내고, 홀연히 질료를 드러내고 홀연히 정념을 드러낸다. 도道는 정념을 너무나 진실되게 드러내므로 인간은 도道를 믿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 노자에 따르면 도道는 영원불변하고 이름도 없지만 사물을 이것 또는 저것으로 결정내는 힘이다. 그럼, 덕德이란 무엇일까. 도道는 모든 사물의 생성원리였다. 반면에 덕德은 한 사물의 생성원리이다. 한비자는 말하기를 "모든 사물은 각각 다른 리理가 있다."고 하였다. 바로 그 리理가 덕德이다. 노자는 말하기를 "덕德은 도道를 따라서 운행한다."고 하였다. 즉, 도道는 모든 사물을 낳고 덕德이 각 사물을 기르면, 사물은 드러내어 완성하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사물은 도道를 우러르고 덕德을 귀하게 여긴다. 이것은 자연의 뜻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관자管子>의 <심술상心術上>은 말하기를 "도道가 머무는 곳이 덕德이다. 모든 사물은 도道 얻어서 생성된다. 각 사물이 얻은 것은 덕德이다. 따라서 무위無爲는 도道이고 머무는 것은 덕德이다."라고 하였다.
4. 사물의 상도常道
한비자는 <해노편>에서 영원불변한 것을 상常이라고 하였다. 노자는 도道라고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상도常道가 아니라고 하면서 상도常道에서 상덕常德이 나온다고 하였다. 노자에 따르면 도道는 상무常無이기도 하고 상유常有이기도 하면서 영원불변하면서 이름이 없지만 항상 작위作爲하지 않으나 이루지 않는 일이 없다고 하였다. 노자에 따르면 모든 사물은 근거根로 되돌아가서 본질을 실현한다. 노자는 이것을 복명復命이라고 하였다. 이 복명이 바로 상常이고 상常을 아는 것이 명明이다. 그럼 상常을 터득하면 어떤 이로움이 있을까. 노자에 따르면 상常을 아는 사람은 관용容적이고 공평公하고 포용周적이고 광대大하고 도道에 맞고 오래久도록 평생 위태롭지 않다고 하였다. 또 이러한 상常을 실천하는 것을 습명襲明 또는 습상習常이라고 하였다. 재미있게도, 노자는 상常을 모르고 멋대로 작위하면 흉凶하다고 하였다. 일반적으로 사물의 상常은 항상 극점에서 되돌아가게 된다. 노자는 이 반복反復하는 것을 도道의 운동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정상이 비정상으로 돌아서고, 경사가 재해로 돌아선다. 구부러지면 온전해지고, 굽으면 곧아지고, 비면 채워지고, 낡으면 새로워지고, 적게 가진 자는 얻게되고, 많이 가진 자는 미혹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즉, 도道의 운동으로 인하여 재앙 속에 행복이 깃들고 행복 속에 재앙이 깃들 수 있다. 노자는 말하기를 "현상세계天下에 물보다 유약한 것은 없지만, 굳센 것을 공격할 경우 물보다 나은 것이 없다."고 하였다. 따라서 모든 사물은 손해이면서도 이익이 될 수 있고, 이익이 되면서도 손해가 될 수 있다. 이것이 노자의 포인트이다.
5. 개명開明
이미 언급했다시피, 개명은 상常을 아는 것이다. 그럼, 개명한 사람은 어떻게 처세하는가. 노자는 말하기를 "장차 누를려면 우선 펴주어야 하고, 장차 약화시킬려면 우선 강하게 해주어야 하고, 장차 폐할려면 우선 융성케 해주어야 하고, 장차 빼앗을려면 우선 주어야한다."고 하였다. 모든 사물은 발전하여 그 극점에 이르면 반드시 그 반대를 향하여 변화한다. 이것이 도道의 운동이다. 따라서 개명한 자는 사물이 그 극점에 이르지 않도록 대처할 수 있어야한다. 노자는 말하기를 "광명한 도道는 마치 어두운 것 같고, 전진의 도道는 후퇴하는 것 같고, 평탄한 도道는 험난한 것 같고, 숭고한 덕德은 낮은 것 같고, 결백한 德은 더러운 것 같고, 큰 덕德은 부족한 것 같고, 건전한 덕德은 나태한 것 같고, 진실은 허구 처럼 보이고 극한의 네모는 모서리가 없다."고 하였다. 따라서 개명한 자는 지나침을 배제하고, 사치를 배제하고, 극단을 배제한다. 헤겔에 비추어 본다면, 곧은 것이 구부러지게 된다는 것은 정正이 반反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합合이란 구부러진 것을 내포한 곧은 것이다. 개명한 자는 합合의 경지에 이르렀으므로 평생 위태롭지 않을 수 있다.
6. 정치철학
사물은 극에 달하면 반드시 반전한다. 물극칙반物極則反, 즉 달은 차면 기운다. 노자는 말하기를 "현상세계天下에 금지와 규제가 많을수록 백성은 궁핍해지고, 백성들에 이로운 도구가 많을수록 국가는 혼란해지고, 기술을 가진 백성이 많을수록 기이한 사물이 늘어나고, 법령이 정비될수록, 도둑은 더 늘어난다."고 하였다. 재미있게도, 노자는 평화를 어렵게 하는 것은 다름아닌 지배자의 작위作爲 때문이라고 하면서 백성들이 죽음을 경시하는 이유는 지배자가 지나치게 생生을 추구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또 노자는 생生에 대한 탐닉은 재앙이라고 말하면서 생生을 추구하다가 사지에 빠지는 경우가 열에 셋이라고 하였다. 노자의 포인트는 법령과 인의仁義를 배제하고 무위無爲로서 작위作爲하고 불치不治로서 통치하는 것이다. 그러면 백성은 저절로 바르게 되고 부유해지고 너그러워진다는 것이다.
7. 욕망
여러 욕망을 만족시키는 것 보다는 근본적으로 욕망을 줄이는 것이 낫다. 이것이 노자의 포인트이다. 노자는 말하기를 "현자를 숭상하지 않으면 백성들의 다툼의 없어지고, 금은보화를 중히 여기지 않으면 도둑이 없어지고, 욕망을 선전하지 않으면 백성이 어지럽지 않게된다. 성인聖人은 백성의 마음을 비워 배를 채우도록 하고, 항상 백성을 무지하고 무욕하게 내버려두어야 한다. 지혜와 지식을 버리면 백성의 이익은 백배 증가하고, 인의仁義를 버리면 자식은 효도하고 부모는 자애로워지고, 기술과 이익을 버리면 도적은 없어진다."고 하였다. 따라서 노자는 소박한 마음을 품어서 단순하게 표현하고 사심私心을 줄여 욕망을 없앨 것을 제안했던 것이다. 지나친 욕망을 줄이는 것이 절제이다. 노자는 만족할 줄 알면 수치를 겪지 않는다고 하였다. 노자는 말하기를 "만족을 모르는 것보다 더 큰 재앙은 없고, 탐욕을 부리는 것보다 더 큰 잘못은 없으므로 만족을 아는 것이 영원한 만족이다."라고 하였다. 재미있게도, 노자는 배우지 않는 것이 배우는 것이라고 하면서 백성들의 지혜가 많아지면 국가는 재앙에 이르게 되므로 국가의 복리는 백성의 지혜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하였다.
8. 사회철학
노자에 따르면 덕德이 두터운 자는 어린아기와 같다. 따라서 상덕常德의 상태는 어린아기처럼 단순하다. 노자는 상덕常德을 수양한 자를 가리켜 어리석은 자에 비유하면서 말하기를 "내 마음은 어리석은 자같이 어리숭하구나. 속인들은 저렇게 총명한데 나만 흐리멍덩하구나. 속인들은 저토록 영리한데 나만 멍청하구나. 모두들 재주가 많은데 나만 홀로 아둔하고 비루하구나."라고 하였다. 노자에 따르면 옛날에 도道를 추구했던 자들은 백성을 개명시킨 것이 아니라 어리석게 했다. 여기서 어리석다는 것은 보통 말하는 어리석은 행위가 아니라 지혜에서 나오는 어리석음으로서 정립과 반정립에서 나오는 긴 여정의 종합으로서의 어리석음이다. 도道를 추구하는 목적은 욕망과 지식을 끊임없이 떨쳐내고 무위無爲에 이르는 것이다. 노자는 말하기를 "국가는 작아야 하고 백성의 수는 적어야 한다. 우수한 기술이 있더라도 사용하지 않고, 죽음을 중시하고, 멀리 이사가지 않으며, 배와 수레가 있어도 사용할 데가 없고, 갑옷과 병기가 있어도 쓸 일이 없다. 결승문자가 다시 부활하고, 맛있게 먹고, 멋지게 입으며, 편안하게 즐긴다. 이웃 나라가 앞에 보이고 닭과 개가 짖더라도 백성들은 늙어죽을 때까지 서로 왕래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것이 노자의 사회철학이다. 이 사회는 문명과 야만이 변증법적으로 합일된 사회이겠다.
9. 장자莊子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장자의 이름은 주周이다. 장주(B.C.369)는 송나라의 몽蒙에서 태어났다. 장주莊周는 탁월한 이해력과 분석력을 통하여 유가와 묵가를 비판하였고 결국 노자의 사상에 귀착하였다. 한때 초나라 위왕은 장자의 명성을 듣고 그를 재상으로 등용하기 위하여 사신을 보냈다. 위왕의 사신은 후한 예물을 장자 앞에 내놓았다. 그러나 장자는 말하기를 "천금은 큰 이익이고 정승은 존귀한 벼슬이지만 교제의 희생소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희생소는 여러 해 잘 먹고 잘 길러지지만, 어느 날 태묘에 보내지는데 그것이 마지막이지요. 그제서야 평범한 돼지의 신세를 부러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나를 더 이상 괴롭히지 마시지요. 나는 평생 벼슬을 안하고 내 뜻대로 살렵니다."라고 하였다. 재미있게도 장자가 논한 도道와 덕德은 노자의 그것과 일치한다. 장자에 따르면 도道는 없는 곳이 없다. 도道는 모든 사물의 생성원리이므로 사물이 있는 어디든지 도道가 있는 것이다. 장자는 말하기를 "도道는 실재하므로 느낄 수 있고 믿을 수 있지만 무위無爲하고 무형無形이다. 도道는 전해질 수 있지만 전수될 수 없고, 얻을 수 있지만 보여줄 수 없다. 또 도道는 스스로 심고 스스로 태어나므로 세계天地가 생성되기 이전에 이미 존재했다. 도道는 세계天地에서 귀신과 상제를 낳고, 태극보다 앞서 있지만 멀지않고, 육극보다 아래있지만 낮지 않다. 세계天地보다 앞서 있지만 오래되지 않았고, 엣날보다 나이가 많지만 늙지 않았다."고 하였다. 장자에 따르면 도道는 자연적이다. 즉 인간의 자질은 생활을 따르고 생활은 정의를 따르고 정의는 덕德을 따르고 덕은 도道를 따르고 도는 신神을 따르게 되는데 이 신神을 무위無爲라고 하였다. 신神은 내재하고 인간은 외재한다. 소나 말이 네발을 가지는 것은 신天의 의지이고 말에 굴레를 씌우고 소 코를 뚫는 것은 인간의 의지이다. 장자에 따르면 도道는 신神이자 신天을 따르는 것이다. 반면에 노자에 따르면 도道는 스스로 그러한 현상, 즉 도법자연道法自然이다. 장자는 바람이 불 때 각 사물이 각각 다른 소리를 내는 이유는 각 사물이 스스로 소리를 골라잡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재미있게도 노자는 도道는 작위하지 않으나 이루지 않는 일이 없다고 하였다. 반면에 장자에 따르면 최초에 무無가 있었는데 이 무無가 도道이다. 이 도道에서 하나가 생성되고 그 하나는 형체가 없지만, 모든 사물이 그 하나를 얻는 것이 덕德이다. 따라서 모든 사물의 생성원리는 도道이고 개별 사물의 생성원리는 덕德이 되는 것이다. 장자는 말하기를 "형상形은 도道없이 생성될 수 없고, 생성되는 것은 덕德없이는 현실화될 수 없다. 도道는 보편적인 것이고 덕德은 개별적인 것이다. 사물은 무형에서 유형으로 형체를 갖게 되는데 이것이 명命이다. 이 명命은 사물의 본질적 속성, 즉 성性을 드러낸다. 선천적인 형체는 생성된 후에 이꼴에서 저꼴로 무쌍하게 변화한다."고 하였다. 장자는 이러한 생성된 사물의 변화무쌍을 천균天均이라고 하였다. 모든 사물은 도道로부터 각기 덕德을 얻으므로 각 사물은 자연의 본성이 내재한다. 따라서 매미와 붕새와 뱁새는 각자의 성性에 만족하므로 서로 교만하지않고 부러워하지 않는다. 이것이 장자의 소요, 즉 행복에 관한 포인트이다. 데카르트는 인간은 각자의 개체적 선천 지식 안에서 자족한다고 하였다. 장자는 공자를 공격하면서 말하기를 "세계天地는 본래 법칙이 있고, 해와 달은 본래의 광명이 있고, 뭇별은 질서가 있고 금수는 본래의 무리가 있고, 나무는 본래의 특성이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덕德에 따라 행하고 도道를 좇아가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인의仁義를 좇는 것은 인간의 천성天性을 어지럽히는 일입니다."라고 하였다. 즉, 덕德에 따라 도道를 좇아가는 것은 인간과 사물의 천성에 순응하는 것이다. 이것이 장자가 말하는 천락天樂이다. 장자에 따르면 물고기는 물속에 있어야 살지만 인간은 물속에 있으면 죽는데, 그 이유는 선천성 때문이다. 따라서 이름이 실제와 부합하고 정의가 바로 서면 그것이 바로 행복이라고 하였다. 장자는 정치적 사회적 법과 제도를 제정하는 데 부정적이었다. 장자에 따르면 불치不治로서 다스리는 것이 정치政治이다. 장자는 말하기를 "인간은 신天을 멸해서는 안되고, 일부러 신의 계시天命을 멸해서도 아니된다."고 하였다. 장자는 절대적 자유를 주장하면서, 모든 인간이 자신의 명命에 따른다면 그것이 절대적 자유라고 하였다. 장자는 현상세계天下의 모든 사물을 선善하다고 보았다. 이것이 장자학과 불학의 차이점이다. 불학에서는 현상세계天下의 모든 사물은 악惡하다. 재미있게도 장자는 유가와 묵가를 비판하면서 말하기를 "시비를 따지는 것은 유가와 묵가에서 비롯되었는데 시비를 따지는 데는 명明을 쓰는 것이 최고이다. 그러나 성인은 시비의 노선을 따르지 않고 신天의 관점에서 비추어본다."고 하였다. 그럼, 장자의 죽음관을 살펴보자. 장자는 말하기를 "내 왼팔이 수닭으로 변하면 나는 새벽을 알리겠고, 내 오른팔이 탄알로 변하면 나는 부엉이 고기를 장만하겠다. 내 정신이 말로 변하고자 한다면 나는 기꺼이 올라탈 것이므로 어찌 마차가 필요하겠는가. 탄생은 때를 만난 것이고, 죽음은 질서에 순응하는 것이므로 만난 때에 조용히 머물다가 질서에 순응하여 돌아가면 애락哀樂이 개입하지 못한다. 이것이 현해懸解, 즉 거꾸로 매달린 상태에서 풀리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애락哀樂이 개입하지 못한다는 것은 정념이 순화된다는 것을 말한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인간을 억압하는 것은 정념이다. 따라서 정념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위해서는 사물 생성의 필연성을 인식하여 정념이 동요되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장자는 노담, 즉 노자의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말하기를 "저토록 슬퍼하는 것은 신의 계시天命을 거역하는 형벌이고 정념을 배가시키는 일이다."라고 하였다.
10. 진인眞人
장자에 따르면 진인眞人이란 현덕玄德으로써 대순大順에 합일한 인간이다. 개체는 순수경험 속에서 세계와 합일할 수 있다. 윌리암 제임스에 따르면 그 순수 경험자는 경험 내용의 그러함만을 지각할 뿐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이것은 단지 액면 가치로서 불가에서 말하는 현량現量이다. 경험은 있지만 그 사물의 있음과 분별과 시비를 모른다는 것인데, 모르면 모를수록 그 경험은 더 순수한 것이다. 왜냐하면 경험대상인 사물은 구체적이지만 그것이 지시하는 바는 추상적이기 때문이다. 장자가 말한 심재心齋와 좌망坐忘은 이 순수경험의 경지이다. 장자는 말하기를 "뜻을 다하여 귀기울이고 귀로 말고 마음으로 들어라. 마음으로 말고 기氣로 들어라. 귀는 듣고 마음은 따라가지만, 기氣는 허虛이므로 만물을 붙들고 있다. 허虛는 도道이다. 허虛는 곧 심재心齋이다.''라고 하였다. 그럼 좌망坐忘이란 무엇인가. 좌망은 마음을 비워 대통大通에 합일하는 순수경험이다. 장자는 말하기를 "성性을 수양하면 덕德을 회복한다. 덕德이 지극하면 태초와 합일한다. 합일合一은 허虛이고, 허虛는 광대함이니 말소리와 새소리가 합한 것이다. 이 합일은 우주의 합일로서 우매하고 혼미한 것 같으나 이것이 현덕玄德이고 대순大順에 합일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현덕玄德은 진인眞人이 경험하는 순수경험의 경지이다. 진인은 사려나 지식이 없고 마음이 비어있어서 대통하여 합일했으므로 따르지 않는 것이 없고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없다. 인간은 이 경지에서 절대적 행복이 가능하다. 장자는 말하기를 "열자列子는 바람을 타고 다니며 보름만에 돌아오곤 했다. 행복에 도달한 사람 가운데 그런 사람은 흔치 않았다. 열자列子는 걷지않아도 되었지만 여전히 무언가에 의존하였다." 재미있게도, 열자列子는 바람을 타고 다녔으므로 바람이 없으면 다닐 수가 없었다. 즉 열자列子의 행복은 바람에 의존한 것이었다. 이것이 장자의 신비주의이다. 서양의 신비주의자로서 스피노자가 있다. 도道와 덕德을 타고 소요하는 인간은 사물을 부릴 뿐 사물에 부림당하지 않을 수 있다. 이것이 장자의 포인트이다.
<참고문헌>
풍우란. 박성규 역, 중국철학사.
사마천의 <사기>의 <노장신한열전>에 따르면 노자는 초나라 사람이다. 성은 이李이고 이름은 이耳이고 또 자는 담聃이다. 노자, 즉 이이李耳는 도덕道德을 수양하면서 스스로 드러내지않고 명성을 좇지 아니하였다. 이이는 전국 시대 사람으로서, 전설상의 인물인 노담과 구별된다. 재미있게도, 당시 고대의 위대한 진인眞人인 노담에 대한 전설이 있었다. 이이는 노담의 이름을 빌려서 자신의 아이디어를 전파하였다. 사마천의 부친인 사마담에 따르면 노자의 도가道家는 인간정신을 무형의 도에 합일시킴으로써 사물의 이치를 깨닫는 것이라고 했다. 또 노자의 도가는 음양가의 순리와 유가와 묵가의 선善을 채택하였고 명가名家와 법가法家의 불비를 충족하였다. 도가道家는 시간에 따라 변해가는 사물을 보면서, 풍속과 질서를 세웠으므로 마땅히 온당하지 않은 바가 없었고, 그 아이디어는 간략하였지만 매우 이로웠다.
2. 초나라
노자, 즉 이이李耳는 초나라 사람이었다. 초나라 사람들은 남방의 신흥 민족으로서 고급문화가 없었고 심한 방언를 썼던 야만인들이었다. 초나라 사람들은 선왕의 도를 경멸했던 민족이었다. 재미있게도, 초나라 사람이 주周문화를 동경할 경우, 북방인 중원으로 유학해야 했다. 초나라 사람 진량陳良은 북방으로 유학했는데 북방의 학자들도 그를 쉽게 능가하지 못했다. <한서>의 <지리지>에 따르면 초나라는 양자강과 풍요로운 산림의 덕택으로 백성들은 먹을 것이 풍족하였고 나약하기는 하였으나 삶을 즐겼고 재산을 축적할 줄 몰랐다. 음식은 서로 나누어 먹었고 추위와 굶주림을 걱정하지 않았지만 큰 부자도 없었다 초나라 사람들은 무속과 귀신을 신봉하고 음사淫祀를 중시했다.
3. 도道, 덕德
고대의 하늘天은 主宰之天, 즉 상재로서 인격신의 성격을 갖고있었다. 공자와 묵자는 고대의 하늘天 개념을 이어받았다. 노자는 하늘과 땅은 인하지 않다天地不仁고 하였다. 노자는 신의 세계와 인간 세계를 이원화했던 것이다. 한비자는 노자를 해석하면서 말하기를 "도道는 사물의 본질을 드러나게하는 리理이다. 리理는 모든 사물의 형식이고, 도道는 모든 사물을 드러낸다. 왜냐하면 도道는 모든 사물의 리理를 관장하기 때문이다. 모든 사물은 각각 다른 리理가 있고 도道는 모든 리理의 주재자이다. 따라서 세계天地가 변화하면 도道 또한 운동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 노자에 따르면 도道란 세계天地에 앞서 이미 소리도 형체도 없이 독립적으로 운행하는 존재이다. 도는 모든 사물을 낳고 모든 사물은 도道에 의존한다. 따라서 사람은 인간 세계에 의존하고 인간세계는 신天을 의존하고 신은 도道에 의존하고 도는 자연自然을 의존한다. 도道는 항상 무위無爲하지만 그것은 단지 무위가 아니다. 이것이 노자의 포인트이다. 도道는 모든 사물의 생성원리이다. 모든 사물은 유有라고 말할 수 있지만 도道는 유有가 아니므로 무無라고만 말할 수 있겠다. 따라서 도道의 체體는 무無이고 도의 용用은 유有이겠다. 노자는 말하기를 "도道는 하나를 낳고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셋을 낳고 셋은 모든 사물을 낳고 모든 사물은 음陰과 양陽이 맞물려 조화를 이룬다."고 하였다. 여기서 하나란 태일太一을 말하고 둘은 천天과 지地를 말하고 셋은 음기陰氣, 양기陽氣, 화기和氣를 말한다. 노자는 말하기를 "도道는 모든 사물의 근거로서 홀연히 형상을 드러내고, 홀연히 질료를 드러내고 홀연히 정념을 드러낸다. 도道는 정념을 너무나 진실되게 드러내므로 인간은 도道를 믿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 노자에 따르면 도道는 영원불변하고 이름도 없지만 사물을 이것 또는 저것으로 결정내는 힘이다. 그럼, 덕德이란 무엇일까. 도道는 모든 사물의 생성원리였다. 반면에 덕德은 한 사물의 생성원리이다. 한비자는 말하기를 "모든 사물은 각각 다른 리理가 있다."고 하였다. 바로 그 리理가 덕德이다. 노자는 말하기를 "덕德은 도道를 따라서 운행한다."고 하였다. 즉, 도道는 모든 사물을 낳고 덕德이 각 사물을 기르면, 사물은 드러내어 완성하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사물은 도道를 우러르고 덕德을 귀하게 여긴다. 이것은 자연의 뜻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관자管子>의 <심술상心術上>은 말하기를 "도道가 머무는 곳이 덕德이다. 모든 사물은 도道 얻어서 생성된다. 각 사물이 얻은 것은 덕德이다. 따라서 무위無爲는 도道이고 머무는 것은 덕德이다."라고 하였다.
4. 사물의 상도常道
한비자는 <해노편>에서 영원불변한 것을 상常이라고 하였다. 노자는 도道라고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상도常道가 아니라고 하면서 상도常道에서 상덕常德이 나온다고 하였다. 노자에 따르면 도道는 상무常無이기도 하고 상유常有이기도 하면서 영원불변하면서 이름이 없지만 항상 작위作爲하지 않으나 이루지 않는 일이 없다고 하였다. 노자에 따르면 모든 사물은 근거根로 되돌아가서 본질을 실현한다. 노자는 이것을 복명復命이라고 하였다. 이 복명이 바로 상常이고 상常을 아는 것이 명明이다. 그럼 상常을 터득하면 어떤 이로움이 있을까. 노자에 따르면 상常을 아는 사람은 관용容적이고 공평公하고 포용周적이고 광대大하고 도道에 맞고 오래久도록 평생 위태롭지 않다고 하였다. 또 이러한 상常을 실천하는 것을 습명襲明 또는 습상習常이라고 하였다. 재미있게도, 노자는 상常을 모르고 멋대로 작위하면 흉凶하다고 하였다. 일반적으로 사물의 상常은 항상 극점에서 되돌아가게 된다. 노자는 이 반복反復하는 것을 도道의 운동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정상이 비정상으로 돌아서고, 경사가 재해로 돌아선다. 구부러지면 온전해지고, 굽으면 곧아지고, 비면 채워지고, 낡으면 새로워지고, 적게 가진 자는 얻게되고, 많이 가진 자는 미혹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즉, 도道의 운동으로 인하여 재앙 속에 행복이 깃들고 행복 속에 재앙이 깃들 수 있다. 노자는 말하기를 "현상세계天下에 물보다 유약한 것은 없지만, 굳센 것을 공격할 경우 물보다 나은 것이 없다."고 하였다. 따라서 모든 사물은 손해이면서도 이익이 될 수 있고, 이익이 되면서도 손해가 될 수 있다. 이것이 노자의 포인트이다.
5. 개명開明
이미 언급했다시피, 개명은 상常을 아는 것이다. 그럼, 개명한 사람은 어떻게 처세하는가. 노자는 말하기를 "장차 누를려면 우선 펴주어야 하고, 장차 약화시킬려면 우선 강하게 해주어야 하고, 장차 폐할려면 우선 융성케 해주어야 하고, 장차 빼앗을려면 우선 주어야한다."고 하였다. 모든 사물은 발전하여 그 극점에 이르면 반드시 그 반대를 향하여 변화한다. 이것이 도道의 운동이다. 따라서 개명한 자는 사물이 그 극점에 이르지 않도록 대처할 수 있어야한다. 노자는 말하기를 "광명한 도道는 마치 어두운 것 같고, 전진의 도道는 후퇴하는 것 같고, 평탄한 도道는 험난한 것 같고, 숭고한 덕德은 낮은 것 같고, 결백한 德은 더러운 것 같고, 큰 덕德은 부족한 것 같고, 건전한 덕德은 나태한 것 같고, 진실은 허구 처럼 보이고 극한의 네모는 모서리가 없다."고 하였다. 따라서 개명한 자는 지나침을 배제하고, 사치를 배제하고, 극단을 배제한다. 헤겔에 비추어 본다면, 곧은 것이 구부러지게 된다는 것은 정正이 반反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합合이란 구부러진 것을 내포한 곧은 것이다. 개명한 자는 합合의 경지에 이르렀으므로 평생 위태롭지 않을 수 있다.
6. 정치철학
사물은 극에 달하면 반드시 반전한다. 물극칙반物極則反, 즉 달은 차면 기운다. 노자는 말하기를 "현상세계天下에 금지와 규제가 많을수록 백성은 궁핍해지고, 백성들에 이로운 도구가 많을수록 국가는 혼란해지고, 기술을 가진 백성이 많을수록 기이한 사물이 늘어나고, 법령이 정비될수록, 도둑은 더 늘어난다."고 하였다. 재미있게도, 노자는 평화를 어렵게 하는 것은 다름아닌 지배자의 작위作爲 때문이라고 하면서 백성들이 죽음을 경시하는 이유는 지배자가 지나치게 생生을 추구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또 노자는 생生에 대한 탐닉은 재앙이라고 말하면서 생生을 추구하다가 사지에 빠지는 경우가 열에 셋이라고 하였다. 노자의 포인트는 법령과 인의仁義를 배제하고 무위無爲로서 작위作爲하고 불치不治로서 통치하는 것이다. 그러면 백성은 저절로 바르게 되고 부유해지고 너그러워진다는 것이다.
7. 욕망
여러 욕망을 만족시키는 것 보다는 근본적으로 욕망을 줄이는 것이 낫다. 이것이 노자의 포인트이다. 노자는 말하기를 "현자를 숭상하지 않으면 백성들의 다툼의 없어지고, 금은보화를 중히 여기지 않으면 도둑이 없어지고, 욕망을 선전하지 않으면 백성이 어지럽지 않게된다. 성인聖人은 백성의 마음을 비워 배를 채우도록 하고, 항상 백성을 무지하고 무욕하게 내버려두어야 한다. 지혜와 지식을 버리면 백성의 이익은 백배 증가하고, 인의仁義를 버리면 자식은 효도하고 부모는 자애로워지고, 기술과 이익을 버리면 도적은 없어진다."고 하였다. 따라서 노자는 소박한 마음을 품어서 단순하게 표현하고 사심私心을 줄여 욕망을 없앨 것을 제안했던 것이다. 지나친 욕망을 줄이는 것이 절제이다. 노자는 만족할 줄 알면 수치를 겪지 않는다고 하였다. 노자는 말하기를 "만족을 모르는 것보다 더 큰 재앙은 없고, 탐욕을 부리는 것보다 더 큰 잘못은 없으므로 만족을 아는 것이 영원한 만족이다."라고 하였다. 재미있게도, 노자는 배우지 않는 것이 배우는 것이라고 하면서 백성들의 지혜가 많아지면 국가는 재앙에 이르게 되므로 국가의 복리는 백성의 지혜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하였다.
8. 사회철학
노자에 따르면 덕德이 두터운 자는 어린아기와 같다. 따라서 상덕常德의 상태는 어린아기처럼 단순하다. 노자는 상덕常德을 수양한 자를 가리켜 어리석은 자에 비유하면서 말하기를 "내 마음은 어리석은 자같이 어리숭하구나. 속인들은 저렇게 총명한데 나만 흐리멍덩하구나. 속인들은 저토록 영리한데 나만 멍청하구나. 모두들 재주가 많은데 나만 홀로 아둔하고 비루하구나."라고 하였다. 노자에 따르면 옛날에 도道를 추구했던 자들은 백성을 개명시킨 것이 아니라 어리석게 했다. 여기서 어리석다는 것은 보통 말하는 어리석은 행위가 아니라 지혜에서 나오는 어리석음으로서 정립과 반정립에서 나오는 긴 여정의 종합으로서의 어리석음이다. 도道를 추구하는 목적은 욕망과 지식을 끊임없이 떨쳐내고 무위無爲에 이르는 것이다. 노자는 말하기를 "국가는 작아야 하고 백성의 수는 적어야 한다. 우수한 기술이 있더라도 사용하지 않고, 죽음을 중시하고, 멀리 이사가지 않으며, 배와 수레가 있어도 사용할 데가 없고, 갑옷과 병기가 있어도 쓸 일이 없다. 결승문자가 다시 부활하고, 맛있게 먹고, 멋지게 입으며, 편안하게 즐긴다. 이웃 나라가 앞에 보이고 닭과 개가 짖더라도 백성들은 늙어죽을 때까지 서로 왕래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것이 노자의 사회철학이다. 이 사회는 문명과 야만이 변증법적으로 합일된 사회이겠다.
9. 장자莊子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장자의 이름은 주周이다. 장주(B.C.369)는 송나라의 몽蒙에서 태어났다. 장주莊周는 탁월한 이해력과 분석력을 통하여 유가와 묵가를 비판하였고 결국 노자의 사상에 귀착하였다. 한때 초나라 위왕은 장자의 명성을 듣고 그를 재상으로 등용하기 위하여 사신을 보냈다. 위왕의 사신은 후한 예물을 장자 앞에 내놓았다. 그러나 장자는 말하기를 "천금은 큰 이익이고 정승은 존귀한 벼슬이지만 교제의 희생소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희생소는 여러 해 잘 먹고 잘 길러지지만, 어느 날 태묘에 보내지는데 그것이 마지막이지요. 그제서야 평범한 돼지의 신세를 부러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나를 더 이상 괴롭히지 마시지요. 나는 평생 벼슬을 안하고 내 뜻대로 살렵니다."라고 하였다. 재미있게도 장자가 논한 도道와 덕德은 노자의 그것과 일치한다. 장자에 따르면 도道는 없는 곳이 없다. 도道는 모든 사물의 생성원리이므로 사물이 있는 어디든지 도道가 있는 것이다. 장자는 말하기를 "도道는 실재하므로 느낄 수 있고 믿을 수 있지만 무위無爲하고 무형無形이다. 도道는 전해질 수 있지만 전수될 수 없고, 얻을 수 있지만 보여줄 수 없다. 또 도道는 스스로 심고 스스로 태어나므로 세계天地가 생성되기 이전에 이미 존재했다. 도道는 세계天地에서 귀신과 상제를 낳고, 태극보다 앞서 있지만 멀지않고, 육극보다 아래있지만 낮지 않다. 세계天地보다 앞서 있지만 오래되지 않았고, 엣날보다 나이가 많지만 늙지 않았다."고 하였다. 장자에 따르면 도道는 자연적이다. 즉 인간의 자질은 생활을 따르고 생활은 정의를 따르고 정의는 덕德을 따르고 덕은 도道를 따르고 도는 신神을 따르게 되는데 이 신神을 무위無爲라고 하였다. 신神은 내재하고 인간은 외재한다. 소나 말이 네발을 가지는 것은 신天의 의지이고 말에 굴레를 씌우고 소 코를 뚫는 것은 인간의 의지이다. 장자에 따르면 도道는 신神이자 신天을 따르는 것이다. 반면에 노자에 따르면 도道는 스스로 그러한 현상, 즉 도법자연道法自然이다. 장자는 바람이 불 때 각 사물이 각각 다른 소리를 내는 이유는 각 사물이 스스로 소리를 골라잡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재미있게도 노자는 도道는 작위하지 않으나 이루지 않는 일이 없다고 하였다. 반면에 장자에 따르면 최초에 무無가 있었는데 이 무無가 도道이다. 이 도道에서 하나가 생성되고 그 하나는 형체가 없지만, 모든 사물이 그 하나를 얻는 것이 덕德이다. 따라서 모든 사물의 생성원리는 도道이고 개별 사물의 생성원리는 덕德이 되는 것이다. 장자는 말하기를 "형상形은 도道없이 생성될 수 없고, 생성되는 것은 덕德없이는 현실화될 수 없다. 도道는 보편적인 것이고 덕德은 개별적인 것이다. 사물은 무형에서 유형으로 형체를 갖게 되는데 이것이 명命이다. 이 명命은 사물의 본질적 속성, 즉 성性을 드러낸다. 선천적인 형체는 생성된 후에 이꼴에서 저꼴로 무쌍하게 변화한다."고 하였다. 장자는 이러한 생성된 사물의 변화무쌍을 천균天均이라고 하였다. 모든 사물은 도道로부터 각기 덕德을 얻으므로 각 사물은 자연의 본성이 내재한다. 따라서 매미와 붕새와 뱁새는 각자의 성性에 만족하므로 서로 교만하지않고 부러워하지 않는다. 이것이 장자의 소요, 즉 행복에 관한 포인트이다. 데카르트는 인간은 각자의 개체적 선천 지식 안에서 자족한다고 하였다. 장자는 공자를 공격하면서 말하기를 "세계天地는 본래 법칙이 있고, 해와 달은 본래의 광명이 있고, 뭇별은 질서가 있고 금수는 본래의 무리가 있고, 나무는 본래의 특성이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덕德에 따라 행하고 도道를 좇아가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인의仁義를 좇는 것은 인간의 천성天性을 어지럽히는 일입니다."라고 하였다. 즉, 덕德에 따라 도道를 좇아가는 것은 인간과 사물의 천성에 순응하는 것이다. 이것이 장자가 말하는 천락天樂이다. 장자에 따르면 물고기는 물속에 있어야 살지만 인간은 물속에 있으면 죽는데, 그 이유는 선천성 때문이다. 따라서 이름이 실제와 부합하고 정의가 바로 서면 그것이 바로 행복이라고 하였다. 장자는 정치적 사회적 법과 제도를 제정하는 데 부정적이었다. 장자에 따르면 불치不治로서 다스리는 것이 정치政治이다. 장자는 말하기를 "인간은 신天을 멸해서는 안되고, 일부러 신의 계시天命을 멸해서도 아니된다."고 하였다. 장자는 절대적 자유를 주장하면서, 모든 인간이 자신의 명命에 따른다면 그것이 절대적 자유라고 하였다. 장자는 현상세계天下의 모든 사물을 선善하다고 보았다. 이것이 장자학과 불학의 차이점이다. 불학에서는 현상세계天下의 모든 사물은 악惡하다. 재미있게도 장자는 유가와 묵가를 비판하면서 말하기를 "시비를 따지는 것은 유가와 묵가에서 비롯되었는데 시비를 따지는 데는 명明을 쓰는 것이 최고이다. 그러나 성인은 시비의 노선을 따르지 않고 신天의 관점에서 비추어본다."고 하였다. 그럼, 장자의 죽음관을 살펴보자. 장자는 말하기를 "내 왼팔이 수닭으로 변하면 나는 새벽을 알리겠고, 내 오른팔이 탄알로 변하면 나는 부엉이 고기를 장만하겠다. 내 정신이 말로 변하고자 한다면 나는 기꺼이 올라탈 것이므로 어찌 마차가 필요하겠는가. 탄생은 때를 만난 것이고, 죽음은 질서에 순응하는 것이므로 만난 때에 조용히 머물다가 질서에 순응하여 돌아가면 애락哀樂이 개입하지 못한다. 이것이 현해懸解, 즉 거꾸로 매달린 상태에서 풀리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애락哀樂이 개입하지 못한다는 것은 정념이 순화된다는 것을 말한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인간을 억압하는 것은 정념이다. 따라서 정념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위해서는 사물 생성의 필연성을 인식하여 정념이 동요되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장자는 노담, 즉 노자의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말하기를 "저토록 슬퍼하는 것은 신의 계시天命을 거역하는 형벌이고 정념을 배가시키는 일이다."라고 하였다.
10. 진인眞人
장자에 따르면 진인眞人이란 현덕玄德으로써 대순大順에 합일한 인간이다. 개체는 순수경험 속에서 세계와 합일할 수 있다. 윌리암 제임스에 따르면 그 순수 경험자는 경험 내용의 그러함만을 지각할 뿐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이것은 단지 액면 가치로서 불가에서 말하는 현량現量이다. 경험은 있지만 그 사물의 있음과 분별과 시비를 모른다는 것인데, 모르면 모를수록 그 경험은 더 순수한 것이다. 왜냐하면 경험대상인 사물은 구체적이지만 그것이 지시하는 바는 추상적이기 때문이다. 장자가 말한 심재心齋와 좌망坐忘은 이 순수경험의 경지이다. 장자는 말하기를 "뜻을 다하여 귀기울이고 귀로 말고 마음으로 들어라. 마음으로 말고 기氣로 들어라. 귀는 듣고 마음은 따라가지만, 기氣는 허虛이므로 만물을 붙들고 있다. 허虛는 도道이다. 허虛는 곧 심재心齋이다.''라고 하였다. 그럼 좌망坐忘이란 무엇인가. 좌망은 마음을 비워 대통大通에 합일하는 순수경험이다. 장자는 말하기를 "성性을 수양하면 덕德을 회복한다. 덕德이 지극하면 태초와 합일한다. 합일合一은 허虛이고, 허虛는 광대함이니 말소리와 새소리가 합한 것이다. 이 합일은 우주의 합일로서 우매하고 혼미한 것 같으나 이것이 현덕玄德이고 대순大順에 합일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현덕玄德은 진인眞人이 경험하는 순수경험의 경지이다. 진인은 사려나 지식이 없고 마음이 비어있어서 대통하여 합일했으므로 따르지 않는 것이 없고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없다. 인간은 이 경지에서 절대적 행복이 가능하다. 장자는 말하기를 "열자列子는 바람을 타고 다니며 보름만에 돌아오곤 했다. 행복에 도달한 사람 가운데 그런 사람은 흔치 않았다. 열자列子는 걷지않아도 되었지만 여전히 무언가에 의존하였다." 재미있게도, 열자列子는 바람을 타고 다녔으므로 바람이 없으면 다닐 수가 없었다. 즉 열자列子의 행복은 바람에 의존한 것이었다. 이것이 장자의 신비주의이다. 서양의 신비주의자로서 스피노자가 있다. 도道와 덕德을 타고 소요하는 인간은 사물을 부릴 뿐 사물에 부림당하지 않을 수 있다. 이것이 장자의 포인트이다.
<참고문헌>
풍우란. 박성규 역, 중국철학사.
2012년 5월 23일 수요일
1. 공자: 도道, 천명天命, 정명正名, 덕德, 인仁, 성誠
1. 역사적 맥락에서 본 공자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연 공자孔子는 중국 춘추시대 말기, 노魯나라 양공 22년(551-479BC.)에 태어났다. 공자의 선조는 송宋나라 공족이었다. 공자는 하夏, 은殷, 주周 시대의 시詩와 서書, 예禮를 정리하였다. 또 공자는 요순시대부터 진秦나라 목공穆公때까지의 역사를 기록하였다. 재미있게도, 공자는 하夏와 은殷의 문화를 기록하면서 문헌이 충분하다면 앞으로 100세대 후의 문화도 알 수 있겠다고 하였다. 주周의 문화는 이전의 하나라와 은나라의 형식문화와 바탕문화 위헤서 건립되었다. 공자는 주나라의 문화周禮를 추종한다고 밝혔다. 사마천은 <서전書傳>과 <예기禮記>는 공자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하였다. 공자는 은나라 시조인 설契과 주나라 시조인 후직后稷 및 당시 번성과 일상을 표현한 305편의 시를 현악에 맞춘 예악禮樂을 정리하였다. 공자는 말년에 <역易>을 좋아하였는데 책을 묶는 끈이 세번이나 끊어질 정도였다. 공자는 <시>, <서>, 예, 악 으로 제자들을 가르쳤는데 그 수가 3,000명에 달하였다. 공자는 이전의 노나라의 역사서를 바탕으로 노나라 당대의 역사서인 <춘추春秋>를 지었다. <춘추>는 노나라의 은공에서 시작하여 애공 때까지 12대에 걸친 역사서이다. 공자는 노나라의 정통성을 주나라외 은나라에서 찾고있다. 공자는 애공 16년 4월 기축일에 타계하였다. 향년 73세였다.
2. 공자와 육예六藝
육예六藝란 춘추시대 고유 학문인 <역易>, <시詩>, <서書>, <예禮>, <악樂>,<춘추春秋> 여섯가지를 말한다. 일설에 따르면 공자가 육예를 창작하였다고 하나, 실은 육예는 공자 이전에 존재했으므로 공자의 저작물이 아니다. <국어國語>에 따르면 사미가 초나라 태자에게 가르친 과목 중에 이미 <시>, <서>, <예>, <악>, <춘추>, <고지> 등이 들어있었다. 따라서 공자는 이러한 귀족 교육을 일반인에게 보급하여 가르쳤던 것이다. 공자의 제자 중에 안연顔淵은 말하기를 "<시>로써 뜻을, <서>로써 정치를, <예>로써 행실을, <악>으로써 화합을, <역>으로써 음양 이치를, <춘추>로써 명분을 계도했다."고 하였다. 공자는 몇가지 점에서 돋보인다. 첫째, 공자는 중국최초로 학술을 대중화하면서 강학과 유세의 풍습을 열면서 선비계층을 창조하는 발판이 되었다. 당시 평민은 몰론이거니와 귀족도 완전교육을 받기가 쉽지않았다. 이를테면, 진晉나라의 귀족인 한선자는 노魯나라에 가서 태사씨를 만나고 나서야 <역易>의 괘상과 노나라의 <춘추>를 볼 수 있었다. 재미있게도, 공자는 차별없이 교육한다는 취지에서 일정한 예물을 가져온 학생들을 상대로 육예를 가르쳤다. 또 공자는 임금들에게 끊임없이 유세하였고 학생들을 데리고 여러나라를 돌아다녔다. <논어>에 따르면 공자는 손가락 하나 까닥않고 오곡도 분간 못했다고 한다. 재미있게도, 공자는 말하기를 "벼슬을 하다가 여력이 있으면 학문을 하고 학문을 하다가 여력이 있으면 벼슬을 한다."고 하였다. 둘째, 공자는 그리스의 소피스트와 유사한 면이 있다. 공자는 규졍된 학비를 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예물은 반드시 받았으므로 최초로 강학을 직업으로 삼고 생활을 유지했던 것이다. 소피스트처럼 공자도 박학다식하였고 학생들에게 정치적 자질을 키워주었다. 셋째, 공자는 그리스의 소크라테스와 같은 업적을 남겼다.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와는 다르게 학비를 받지 않았지만 그리스인을 각성시키는 것이 자신의 신성한 의무라고 생각했듯이 공자 또한 말하기를 "신天이 내게 덕德을 부여하였다."고 하였다. 소크라테스는 인간행위의 기준을 도덕으로 보았으므로 귀납법을 이용하여 도덕성을 정립하였다. 반면에 공자는 인간 행위의 기준을 정명正名으로 보았고 인仁을 통하여 정명正名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보았다. 잘 알다시피. 소크라테스 사후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학통을 이어받고 서양철학의 기초를 다졌듯이 공자의 사후 맹자와 순자는 그의 학통을 이어받고 동양철학의 기초를 다졌다.
3. 공자의 하늘天
중국 문화는 주周나라 때 완성되었다. 공자의 노나라는 주나라의 후손국이었다. 공자는 말하기를 "주나라는 이전의 두 왕조를 거울삼았으니 나는 주나라의 빛나는 문화를 추종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공자는 주周나라 문왕文王과 주공周公의 업적을 받드는 것이 평생의 사명이었다. 재미있게도, 공자는 말하기를 "만약 내가 임용된다면, 나는 동주東周를 건설할 것이다."라고까지 하였다. 그럼, 공자는 하늘天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갖고있었을까. 한번은 왕손가가 묻기를 "안방 귀신보다는 부엌 귀신에게 잘 보여야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다. 공자는 답하기를 "하늘天에 죄를 지으면 빌 곳이 없다."라고 하였다. 또 공자는 제자 안연이 죽자, 통곡하기를 "하늘天이 나를 멸하는구나, 하늘天이 나를 멸하는구나."라고 말하였다. 하늘天이란 주재지천主宰之天에서 알 수 있듯이 의지를 가진 인격신, 즉 상재上帝이다. 따라서 공자가 말하기를 "나는 마흔에 미혹하지 않았고 쉰에 천명天命을 알았다."고 했을 때 천명天命이란 하늘의 계시이다. 또 공자는 말하기를 "도道가 실현되는 것도 계시命에 달려있고 실현되지 못하는 것도 계시命에 달려있다."고 하였다.
4. 정명론正名論
자로가 공자에게 묻기를 ''위나라에서 정치를 하게 된다면 무엇부터 하겠습니까."라고 물었다. 공자는 먼저 정명正名부터 하겠다고 답하였다. 정명正名이란 실재와 그 현상한 사물이 바른 이름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 이름은 사물의 본질이자 아이디어이다. 공자에 따르면 정政이란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비는 아비답고 자식은 자식다운 것이다. 즉, 정政이란 정正으로써 도道가 현상세계天下에서 현실화되는 것이다. 노나라의 실권자인 계강자가 묻기를 "도道를 위하여 무도無道한 자를 죽이면 어떻겠는가."라고 묻자, 공자는 답하기를 "위정자는 살인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善을 추구하면 백성도 선善하게 될 것이다. 군자의 덕德은 바람이고 소인의 덕德은 풀이므로 바람이 불면 풀은 저절로 수그러진다."고 하였다. 공자는 정명론을 실행하고자 <춘추>를 지었던 것이다. 춘추는 역사서로서 선善을 찬양하고 악惡을 물리치는 대의大義를 표상하므로 난신적자들을 경계할 수 있는 지침서였다
5. 인간 본성과 인仁
공자에 따르면 인간은 태어나면서 정직直하다. 정직이란 자신을 속이지 않고 남을 기만하지 않는 것이다. 만약 아버지가 양을 훔치자 아들이 그것을 일러바쳤다면 그 아들은 정직한가. 정직은 아버지가 아들을 감싸고 아들이 아버지를 감싸는 가운데 있다. 이것이 공자의 포인트이다. 미생고는 다리아래에 한 여자를 만나기로 했다. 시간이 지나도 그 여자는 보이지 않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다리고 있다가 강물이 불어서 미생고는 빠져죽었다. 공자는 미생고는 정직하지않다고 하였다. 어떤 사람이 식초를 빌리러오자 집주인은 이웃에서 빌려다가 그에게 주었다. 그럼, 이 집주인은 정직한가. 집에 식초가 없다면 사양해도 될 일이다. 공자에 따르면 정직한 사람은 자신에게 물어보는 사람이고 부정직한 사람은 남을 의식하는 사람이다. 공자는 교언영색巧言令色을 수치로 여겼다. 재미있게도 공자는 정직은 예禮에 따라서 행해야 한다면서, 말하기를 "용기도 예禮가 없으면 난폭이 되고 정직도 예禮가 없으면 난잡해진다."고 말하였다. 예禮란 모든 풍속, 관습, 사회 정치제도 등을 말한다. 따라서 정직의 포인트는 개인의 자유이고 예禮의 포인트는 사회 규범적 제제이다. 공자에 따르면 바탕質과 형식文이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군자가 된다. 바탕과 형식을 조율하는 것이 중용中傭이기 때문이다. 이 중용은 仁에 따라 이루어진다. 이것이 공자의 포인트이다. 안연이 인仁에 대하여 묻자, 공자는 답하기를 "인仁이란 극기복례克己復禮이다."라고 답하였다. 즉 인仁이란 자기를 이겨내고 예禮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럼, 인仁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행하는가. 인仁의 포인트는 자기마음에 비추어 남을 이해하는 것 즉, 추기급인推己及人이다. 공자는 자기가 싫어하는 것을 남에게 강요하지 않는 것을 서恕라고 하였다. 그리고 자기가 원하는 것을 남에게도 해주는 것이 충忠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서恕와 충忠을 살행하는 것이 바로 인仁을 실천하는 것이다. 공자는 스스로 밝히기를 자신의 도道는 하나의 도道로 일관되어있다 즉, 오도일이관지吾道一以貫之라고 하였다. 그 도道가 바로 인仁인 것이다. 인仁은 완전한 덕德이다. 공자는 인仁은 극기복례에서 나온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재미있게도 공자는 같이 배우더라도 전부 도道를 얻을 수는 없고 도道를 얻었더라도 전부 예禮를 닦을 수 없고 예禮를 닦았더라도 전부 다 실천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 공자에 따르면 뜻을 반드시 이루겠다고 집착하거나 고집부리는 것은 금기이다. 왜냐하면 군자는 의義에 밝고 소인은 이利에 밝기 때문이다.
6. 묵자墨子
사마천에 따르면 묵자墨子(470-391 B.C.)는 송宋나라 대부로서 방어술에 능하고 절약을 주장하였다. 공자와 같은 시기의 노나라 사람이라고도 하고 그 후 사람이라고도 한다. <회남왕서>에 따르면 묵자는 육예六藝에 공자의 사상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묵자는 유가의 예禮는 번잡하다면서 싫어하였고, 후한 장례는 재물을 낭비하고, 오랜 복상은 생업을 방해하므로 주도周道를 반대하였고 하夏나라의 정강을 따랐다. 묵자는 음악도 반대하였다. 따라서 묵자의 아이디어는 당시 대부나 군자의 생활양식과는 거리가 먼 평민의 수준이었다. 그러나 묵자의 의義는 실용적인 면이 있다. 묵자는 말하기를 "어떤 사람이 열 아들이 있는데 그 중 아홉은 놀고 한명만 일한다면 그 자는 더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먹는 사람은 많은데 일하는 사람은 적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묵자는 백성들이 서로 투쟁하는 이유는 서로를 차별하기 때문이라면서 겸애兼愛할 것을 주장하였다. 겸애의 도道는 타인에게 유리할 뿐만 아니라 자기에게도 이롭다. 이것은 다분히 공리주의적인 것으로서 인도仁道를 주장한 공자와구별된다. 묵자에 따르면 현상세계天下의 가장 큰 이익은 사람들의 겸애에 있고, 가장 큰 해악은 투쟁하는데 있으므로 전쟁을 방지해야한다고 하였다. 묵자墨子는 말하기를 "초나라, 오나라, 제나라, 진나라의 군왕들은 전쟁을 통하여 봉토를 늘리고 인구를 불렸지만 몇몇 나라가 이익을 얻었다고 해서 전쟁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의사가 병자에게 약을 처방하였는데 1만명 가운데 4-5명만 혜택을 입었다면 마땅한 약이라 할 수 없다."고 하였다. 벤담은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주장하면서 법과 도덕의 목적은 공리功利이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전쟁을 반대한 학자로서 맹자가 있다. 맹자는 전쟁을 좋아하는 자는 극형에 처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묵자는 전쟁이 이利롭지 못하기 때문에 반대했던 반면에 맹자는 전쟁이 의義롭지 못하기 때문에 반대하였다. 재미있게도 묵자는 하늘天의 뜻에 따르는 자는 겸애하고 서로 이롭게하므로 하늘로부터 상을 받고, 하늘天의 뜻을 거스르는 자는 서로 차별하고 해롭게 하므로 벌을 받을 것이라고 하였다. 묵자는 말하기를 "삼대三代의 성왕聖王인 우왕, 탕왕, 문왕, 무왕은 하늘의 계시天命에 순종하여 상을 받았고, 삼대의 폭군인 걸왕, 주왕, 유왕, 여왕은 하늘의 뜻天命을 거슬러 하늘天로부터 벌을 받았다."고 하였다. 묵자는 하늘로부터의 상벌은 개인의 행위에 의해 초래된 것이지 숙명에 따른 것이 아니라면서 숙명론을 부정하였다. 묵자의 정치론은 홉스와 유사한 면이 있다. 묵자에 따르면 하늘天은 신의 세계뿐만아니라 인간세계에도 존재해야한다. 태초에 사람들은 자기이익만을 좇아서 행동하였다. 그러자 부모와 자식들은 원망하고 뿔뿔이 흩어졌다. 백성들은 능력이 있어도 남을 돕지않고 남는 재물이 있어도 서로 나누지 않았다. 세상은 짐승의 세계처럼 혼란해졌다. 이제, 사람들은 혼란을 타계하기 위하여 덕망있고 유능한 인물을 우두머리로 세워서 천자天子로서 옹립하게 되었다. 천자天子은 명령을 내리고 백성들은 그 명령에 복종하게 되었다. 천자天子는 하늘天과 화동하고, 아랫사람은 윗사람과 화동하는 만큼 서로 사랑하고 서로 이익을 얻는다. 이것이 묵자의 포인트이다. 홉스에 따르면 인간은 태초에 자연상태에 있었다. 따라서 사람들은 만인이 만인에 대한 투쟁을 하였다. 이제 인간은 이 투쟁을 방지하기위하여 절대적인 지배자를 세우고 그에 복종하기로 약속한다. 이것이 국가의 기원이다. 묵자와 홉스에 따르면 종교는 국가 밖에서 독립적인 권력을 행사해서는 안된다.그렇지 않으면 국가가 분열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묵자의 천자天子는 군주와 교황을 겸한 존재이겠다.
7. <대학大學>
공자 사후, 춘추시대 말기와 전국시대를 지나, 한대漢代 초기에 이르기까지 유학자들의 저작들은 대씨戴氏의 <예기禮記>에 편집되었다. 송나라 때 주희는 <예기>에 편집된 <대학>의 저자를 증자曾子로 보았다. 증자曾子(505-435BC.)에 따르면 <대학>의 도道는 덕德을 밝히는 데 있다. 덕德있는 자는 자기의 덕德을 다스리고 난 후에 가정의 덕德을 다스리고 그 후에 나라의 덕德을 다스리고 그 후 현상세계天下의 덕德을 다스린다. 이것이 <대학>의 포인트이다. 그럼, 덕德은 어떻게 알게 되는가. 덕德은 격물치지, 즉 사물의 본질을 이해하는 지식에 이르렀을 때에 얻게 된다. 덕德을 위해서는 몸을 길들여야 한다. 즉, 수신修身을 하는 주된 이유는 덕德을 얻기 위하여 마음을 바르게 하는 데 있다. 마음에 분한 감정이나, 두려운 감정, 희열의 감정, 또는 근심과 걱정이 남아있으면 바를 수 없다. 증자는 마음이 딴 데 있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고, 먹어도 맛을 모른다고 하였다. 덕德을 제대로 보면 그것이 바로 성誠이다. 성誠이란 덕德이 참되게 실현된 것으로서 마음이 바르면 성誠을 실현하게 된다. 군자는 신독愼獨한다고 하는데 신독이란 홀로 있을 때에도 참된 것을 돌아보며, 그 덕德을 지키는 것이다.
8. <중용中庸>
<예기禮記> 중의 <중용中用>은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481-402 B.C.)의 저작이다. 사마천은 <사기史記>의 <공자세가孔子世家>편에서 자사가 <중용>을 지었다고 하였다. <중용中用>은 공자를 중심으로한 대화체로 되어있다. 공자에 따르면 군자는 중용에 따르고 소인은 중용에 역행한다. 군자가 중용에 따른다는 것은 시중時中을 추구한다는 말이고, 소인이 중용에 역행한다고 하는 것은 소인은 기탄없이 소인小人다운 것을 말한다. 시중時中은 때에 따라 적절하게 변화하는 것이다. <중용>에 따르면 현상세계天下의 도道는 다섯가지이고 덕德은 세가지이다. 다섯가지 도道란 군신, 부자, 부부, 형제, 친구이다. 그리고 세가지 덕德은 지知, 인仁, 용勇이다. 공자는 말하기를 "배움으로써 앎知에 이르고, 힘써서 인仁에 이르고, 창피함을 알면서 용기勇에 이른다고 하였다. <중용>는 신비주의적이다. 인간이 천명天命를 받은 것이 성性이고 성性을 따르는 것이 도道이고, 도道를 생활화하는 것이 교敎이다. 또 성誠은 천도天道이고 성誠의 실현은 인仁의 완성인 것이다. 성誠으로써 자기를 발견하고 또 사물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자기를 발견하는 것이 인仁이고, 사물을 발견하는 것이 지智이다. 성誠이란 인간 성性의 덕德이 내외합일의 도道로써 때에 맞게 드러난 것이다. 이것이 <중용>의 포인트이다. <중용>은 말하기를 "지성至誠으로써 자신의 본성을 최대한 발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타인의 본성과 사물의 본성도 최대한 발견할 수 있다."고 하였다.
<참고문헌>
풍우란. 박성규 역, 중국철학사.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연 공자孔子는 중국 춘추시대 말기, 노魯나라 양공 22년(551-479BC.)에 태어났다. 공자의 선조는 송宋나라 공족이었다. 공자는 하夏, 은殷, 주周 시대의 시詩와 서書, 예禮를 정리하였다. 또 공자는 요순시대부터 진秦나라 목공穆公때까지의 역사를 기록하였다. 재미있게도, 공자는 하夏와 은殷의 문화를 기록하면서 문헌이 충분하다면 앞으로 100세대 후의 문화도 알 수 있겠다고 하였다. 주周의 문화는 이전의 하나라와 은나라의 형식문화와 바탕문화 위헤서 건립되었다. 공자는 주나라의 문화周禮를 추종한다고 밝혔다. 사마천은 <서전書傳>과 <예기禮記>는 공자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하였다. 공자는 은나라 시조인 설契과 주나라 시조인 후직后稷 및 당시 번성과 일상을 표현한 305편의 시를 현악에 맞춘 예악禮樂을 정리하였다. 공자는 말년에 <역易>을 좋아하였는데 책을 묶는 끈이 세번이나 끊어질 정도였다. 공자는 <시>, <서>, 예, 악 으로 제자들을 가르쳤는데 그 수가 3,000명에 달하였다. 공자는 이전의 노나라의 역사서를 바탕으로 노나라 당대의 역사서인 <춘추春秋>를 지었다. <춘추>는 노나라의 은공에서 시작하여 애공 때까지 12대에 걸친 역사서이다. 공자는 노나라의 정통성을 주나라외 은나라에서 찾고있다. 공자는 애공 16년 4월 기축일에 타계하였다. 향년 73세였다.
2. 공자와 육예六藝
육예六藝란 춘추시대 고유 학문인 <역易>, <시詩>, <서書>, <예禮>, <악樂>,<춘추春秋> 여섯가지를 말한다. 일설에 따르면 공자가 육예를 창작하였다고 하나, 실은 육예는 공자 이전에 존재했으므로 공자의 저작물이 아니다. <국어國語>에 따르면 사미가 초나라 태자에게 가르친 과목 중에 이미 <시>, <서>, <예>, <악>, <춘추>, <고지> 등이 들어있었다. 따라서 공자는 이러한 귀족 교육을 일반인에게 보급하여 가르쳤던 것이다. 공자의 제자 중에 안연顔淵은 말하기를 "<시>로써 뜻을, <서>로써 정치를, <예>로써 행실을, <악>으로써 화합을, <역>으로써 음양 이치를, <춘추>로써 명분을 계도했다."고 하였다. 공자는 몇가지 점에서 돋보인다. 첫째, 공자는 중국최초로 학술을 대중화하면서 강학과 유세의 풍습을 열면서 선비계층을 창조하는 발판이 되었다. 당시 평민은 몰론이거니와 귀족도 완전교육을 받기가 쉽지않았다. 이를테면, 진晉나라의 귀족인 한선자는 노魯나라에 가서 태사씨를 만나고 나서야 <역易>의 괘상과 노나라의 <춘추>를 볼 수 있었다. 재미있게도, 공자는 차별없이 교육한다는 취지에서 일정한 예물을 가져온 학생들을 상대로 육예를 가르쳤다. 또 공자는 임금들에게 끊임없이 유세하였고 학생들을 데리고 여러나라를 돌아다녔다. <논어>에 따르면 공자는 손가락 하나 까닥않고 오곡도 분간 못했다고 한다. 재미있게도, 공자는 말하기를 "벼슬을 하다가 여력이 있으면 학문을 하고 학문을 하다가 여력이 있으면 벼슬을 한다."고 하였다. 둘째, 공자는 그리스의 소피스트와 유사한 면이 있다. 공자는 규졍된 학비를 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예물은 반드시 받았으므로 최초로 강학을 직업으로 삼고 생활을 유지했던 것이다. 소피스트처럼 공자도 박학다식하였고 학생들에게 정치적 자질을 키워주었다. 셋째, 공자는 그리스의 소크라테스와 같은 업적을 남겼다.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와는 다르게 학비를 받지 않았지만 그리스인을 각성시키는 것이 자신의 신성한 의무라고 생각했듯이 공자 또한 말하기를 "신天이 내게 덕德을 부여하였다."고 하였다. 소크라테스는 인간행위의 기준을 도덕으로 보았으므로 귀납법을 이용하여 도덕성을 정립하였다. 반면에 공자는 인간 행위의 기준을 정명正名으로 보았고 인仁을 통하여 정명正名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보았다. 잘 알다시피. 소크라테스 사후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학통을 이어받고 서양철학의 기초를 다졌듯이 공자의 사후 맹자와 순자는 그의 학통을 이어받고 동양철학의 기초를 다졌다.
3. 공자의 하늘天
중국 문화는 주周나라 때 완성되었다. 공자의 노나라는 주나라의 후손국이었다. 공자는 말하기를 "주나라는 이전의 두 왕조를 거울삼았으니 나는 주나라의 빛나는 문화를 추종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공자는 주周나라 문왕文王과 주공周公의 업적을 받드는 것이 평생의 사명이었다. 재미있게도, 공자는 말하기를 "만약 내가 임용된다면, 나는 동주東周를 건설할 것이다."라고까지 하였다. 그럼, 공자는 하늘天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갖고있었을까. 한번은 왕손가가 묻기를 "안방 귀신보다는 부엌 귀신에게 잘 보여야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다. 공자는 답하기를 "하늘天에 죄를 지으면 빌 곳이 없다."라고 하였다. 또 공자는 제자 안연이 죽자, 통곡하기를 "하늘天이 나를 멸하는구나, 하늘天이 나를 멸하는구나."라고 말하였다. 하늘天이란 주재지천主宰之天에서 알 수 있듯이 의지를 가진 인격신, 즉 상재上帝이다. 따라서 공자가 말하기를 "나는 마흔에 미혹하지 않았고 쉰에 천명天命을 알았다."고 했을 때 천명天命이란 하늘의 계시이다. 또 공자는 말하기를 "도道가 실현되는 것도 계시命에 달려있고 실현되지 못하는 것도 계시命에 달려있다."고 하였다.
4. 정명론正名論
자로가 공자에게 묻기를 ''위나라에서 정치를 하게 된다면 무엇부터 하겠습니까."라고 물었다. 공자는 먼저 정명正名부터 하겠다고 답하였다. 정명正名이란 실재와 그 현상한 사물이 바른 이름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 이름은 사물의 본질이자 아이디어이다. 공자에 따르면 정政이란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비는 아비답고 자식은 자식다운 것이다. 즉, 정政이란 정正으로써 도道가 현상세계天下에서 현실화되는 것이다. 노나라의 실권자인 계강자가 묻기를 "도道를 위하여 무도無道한 자를 죽이면 어떻겠는가."라고 묻자, 공자는 답하기를 "위정자는 살인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善을 추구하면 백성도 선善하게 될 것이다. 군자의 덕德은 바람이고 소인의 덕德은 풀이므로 바람이 불면 풀은 저절로 수그러진다."고 하였다. 공자는 정명론을 실행하고자 <춘추>를 지었던 것이다. 춘추는 역사서로서 선善을 찬양하고 악惡을 물리치는 대의大義를 표상하므로 난신적자들을 경계할 수 있는 지침서였다
5. 인간 본성과 인仁
공자에 따르면 인간은 태어나면서 정직直하다. 정직이란 자신을 속이지 않고 남을 기만하지 않는 것이다. 만약 아버지가 양을 훔치자 아들이 그것을 일러바쳤다면 그 아들은 정직한가. 정직은 아버지가 아들을 감싸고 아들이 아버지를 감싸는 가운데 있다. 이것이 공자의 포인트이다. 미생고는 다리아래에 한 여자를 만나기로 했다. 시간이 지나도 그 여자는 보이지 않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다리고 있다가 강물이 불어서 미생고는 빠져죽었다. 공자는 미생고는 정직하지않다고 하였다. 어떤 사람이 식초를 빌리러오자 집주인은 이웃에서 빌려다가 그에게 주었다. 그럼, 이 집주인은 정직한가. 집에 식초가 없다면 사양해도 될 일이다. 공자에 따르면 정직한 사람은 자신에게 물어보는 사람이고 부정직한 사람은 남을 의식하는 사람이다. 공자는 교언영색巧言令色을 수치로 여겼다. 재미있게도 공자는 정직은 예禮에 따라서 행해야 한다면서, 말하기를 "용기도 예禮가 없으면 난폭이 되고 정직도 예禮가 없으면 난잡해진다."고 말하였다. 예禮란 모든 풍속, 관습, 사회 정치제도 등을 말한다. 따라서 정직의 포인트는 개인의 자유이고 예禮의 포인트는 사회 규범적 제제이다. 공자에 따르면 바탕質과 형식文이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군자가 된다. 바탕과 형식을 조율하는 것이 중용中傭이기 때문이다. 이 중용은 仁에 따라 이루어진다. 이것이 공자의 포인트이다. 안연이 인仁에 대하여 묻자, 공자는 답하기를 "인仁이란 극기복례克己復禮이다."라고 답하였다. 즉 인仁이란 자기를 이겨내고 예禮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럼, 인仁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행하는가. 인仁의 포인트는 자기마음에 비추어 남을 이해하는 것 즉, 추기급인推己及人이다. 공자는 자기가 싫어하는 것을 남에게 강요하지 않는 것을 서恕라고 하였다. 그리고 자기가 원하는 것을 남에게도 해주는 것이 충忠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서恕와 충忠을 살행하는 것이 바로 인仁을 실천하는 것이다. 공자는 스스로 밝히기를 자신의 도道는 하나의 도道로 일관되어있다 즉, 오도일이관지吾道一以貫之라고 하였다. 그 도道가 바로 인仁인 것이다. 인仁은 완전한 덕德이다. 공자는 인仁은 극기복례에서 나온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재미있게도 공자는 같이 배우더라도 전부 도道를 얻을 수는 없고 도道를 얻었더라도 전부 예禮를 닦을 수 없고 예禮를 닦았더라도 전부 다 실천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 공자에 따르면 뜻을 반드시 이루겠다고 집착하거나 고집부리는 것은 금기이다. 왜냐하면 군자는 의義에 밝고 소인은 이利에 밝기 때문이다.
6. 묵자墨子
사마천에 따르면 묵자墨子(470-391 B.C.)는 송宋나라 대부로서 방어술에 능하고 절약을 주장하였다. 공자와 같은 시기의 노나라 사람이라고도 하고 그 후 사람이라고도 한다. <회남왕서>에 따르면 묵자는 육예六藝에 공자의 사상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묵자는 유가의 예禮는 번잡하다면서 싫어하였고, 후한 장례는 재물을 낭비하고, 오랜 복상은 생업을 방해하므로 주도周道를 반대하였고 하夏나라의 정강을 따랐다. 묵자는 음악도 반대하였다. 따라서 묵자의 아이디어는 당시 대부나 군자의 생활양식과는 거리가 먼 평민의 수준이었다. 그러나 묵자의 의義는 실용적인 면이 있다. 묵자는 말하기를 "어떤 사람이 열 아들이 있는데 그 중 아홉은 놀고 한명만 일한다면 그 자는 더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먹는 사람은 많은데 일하는 사람은 적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묵자는 백성들이 서로 투쟁하는 이유는 서로를 차별하기 때문이라면서 겸애兼愛할 것을 주장하였다. 겸애의 도道는 타인에게 유리할 뿐만 아니라 자기에게도 이롭다. 이것은 다분히 공리주의적인 것으로서 인도仁道를 주장한 공자와구별된다. 묵자에 따르면 현상세계天下의 가장 큰 이익은 사람들의 겸애에 있고, 가장 큰 해악은 투쟁하는데 있으므로 전쟁을 방지해야한다고 하였다. 묵자墨子는 말하기를 "초나라, 오나라, 제나라, 진나라의 군왕들은 전쟁을 통하여 봉토를 늘리고 인구를 불렸지만 몇몇 나라가 이익을 얻었다고 해서 전쟁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의사가 병자에게 약을 처방하였는데 1만명 가운데 4-5명만 혜택을 입었다면 마땅한 약이라 할 수 없다."고 하였다. 벤담은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주장하면서 법과 도덕의 목적은 공리功利이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전쟁을 반대한 학자로서 맹자가 있다. 맹자는 전쟁을 좋아하는 자는 극형에 처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묵자는 전쟁이 이利롭지 못하기 때문에 반대했던 반면에 맹자는 전쟁이 의義롭지 못하기 때문에 반대하였다. 재미있게도 묵자는 하늘天의 뜻에 따르는 자는 겸애하고 서로 이롭게하므로 하늘로부터 상을 받고, 하늘天의 뜻을 거스르는 자는 서로 차별하고 해롭게 하므로 벌을 받을 것이라고 하였다. 묵자는 말하기를 "삼대三代의 성왕聖王인 우왕, 탕왕, 문왕, 무왕은 하늘의 계시天命에 순종하여 상을 받았고, 삼대의 폭군인 걸왕, 주왕, 유왕, 여왕은 하늘의 뜻天命을 거슬러 하늘天로부터 벌을 받았다."고 하였다. 묵자는 하늘로부터의 상벌은 개인의 행위에 의해 초래된 것이지 숙명에 따른 것이 아니라면서 숙명론을 부정하였다. 묵자의 정치론은 홉스와 유사한 면이 있다. 묵자에 따르면 하늘天은 신의 세계뿐만아니라 인간세계에도 존재해야한다. 태초에 사람들은 자기이익만을 좇아서 행동하였다. 그러자 부모와 자식들은 원망하고 뿔뿔이 흩어졌다. 백성들은 능력이 있어도 남을 돕지않고 남는 재물이 있어도 서로 나누지 않았다. 세상은 짐승의 세계처럼 혼란해졌다. 이제, 사람들은 혼란을 타계하기 위하여 덕망있고 유능한 인물을 우두머리로 세워서 천자天子로서 옹립하게 되었다. 천자天子은 명령을 내리고 백성들은 그 명령에 복종하게 되었다. 천자天子는 하늘天과 화동하고, 아랫사람은 윗사람과 화동하는 만큼 서로 사랑하고 서로 이익을 얻는다. 이것이 묵자의 포인트이다. 홉스에 따르면 인간은 태초에 자연상태에 있었다. 따라서 사람들은 만인이 만인에 대한 투쟁을 하였다. 이제 인간은 이 투쟁을 방지하기위하여 절대적인 지배자를 세우고 그에 복종하기로 약속한다. 이것이 국가의 기원이다. 묵자와 홉스에 따르면 종교는 국가 밖에서 독립적인 권력을 행사해서는 안된다.그렇지 않으면 국가가 분열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묵자의 천자天子는 군주와 교황을 겸한 존재이겠다.
7. <대학大學>
공자 사후, 춘추시대 말기와 전국시대를 지나, 한대漢代 초기에 이르기까지 유학자들의 저작들은 대씨戴氏의 <예기禮記>에 편집되었다. 송나라 때 주희는 <예기>에 편집된 <대학>의 저자를 증자曾子로 보았다. 증자曾子(505-435BC.)에 따르면 <대학>의 도道는 덕德을 밝히는 데 있다. 덕德있는 자는 자기의 덕德을 다스리고 난 후에 가정의 덕德을 다스리고 그 후에 나라의 덕德을 다스리고 그 후 현상세계天下의 덕德을 다스린다. 이것이 <대학>의 포인트이다. 그럼, 덕德은 어떻게 알게 되는가. 덕德은 격물치지, 즉 사물의 본질을 이해하는 지식에 이르렀을 때에 얻게 된다. 덕德을 위해서는 몸을 길들여야 한다. 즉, 수신修身을 하는 주된 이유는 덕德을 얻기 위하여 마음을 바르게 하는 데 있다. 마음에 분한 감정이나, 두려운 감정, 희열의 감정, 또는 근심과 걱정이 남아있으면 바를 수 없다. 증자는 마음이 딴 데 있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고, 먹어도 맛을 모른다고 하였다. 덕德을 제대로 보면 그것이 바로 성誠이다. 성誠이란 덕德이 참되게 실현된 것으로서 마음이 바르면 성誠을 실현하게 된다. 군자는 신독愼獨한다고 하는데 신독이란 홀로 있을 때에도 참된 것을 돌아보며, 그 덕德을 지키는 것이다.
8. <중용中庸>
<예기禮記> 중의 <중용中用>은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481-402 B.C.)의 저작이다. 사마천은 <사기史記>의 <공자세가孔子世家>편에서 자사가 <중용>을 지었다고 하였다. <중용中用>은 공자를 중심으로한 대화체로 되어있다. 공자에 따르면 군자는 중용에 따르고 소인은 중용에 역행한다. 군자가 중용에 따른다는 것은 시중時中을 추구한다는 말이고, 소인이 중용에 역행한다고 하는 것은 소인은 기탄없이 소인小人다운 것을 말한다. 시중時中은 때에 따라 적절하게 변화하는 것이다. <중용>에 따르면 현상세계天下의 도道는 다섯가지이고 덕德은 세가지이다. 다섯가지 도道란 군신, 부자, 부부, 형제, 친구이다. 그리고 세가지 덕德은 지知, 인仁, 용勇이다. 공자는 말하기를 "배움으로써 앎知에 이르고, 힘써서 인仁에 이르고, 창피함을 알면서 용기勇에 이른다고 하였다. <중용>는 신비주의적이다. 인간이 천명天命를 받은 것이 성性이고 성性을 따르는 것이 도道이고, 도道를 생활화하는 것이 교敎이다. 또 성誠은 천도天道이고 성誠의 실현은 인仁의 완성인 것이다. 성誠으로써 자기를 발견하고 또 사물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자기를 발견하는 것이 인仁이고, 사물을 발견하는 것이 지智이다. 성誠이란 인간 성性의 덕德이 내외합일의 도道로써 때에 맞게 드러난 것이다. 이것이 <중용>의 포인트이다. <중용>은 말하기를 "지성至誠으로써 자신의 본성을 최대한 발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타인의 본성과 사물의 본성도 최대한 발견할 수 있다."고 하였다.
<참고문헌>
풍우란. 박성규 역, 중국철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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