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6월 28일 목요일

11. 왕양명: 양지良知, 지행합일知行合一, 심즉리心卽理

1. 역사적 맥락에서 본 왕양명

왕양명은 명나라 헌종憲宗 성화成化 8년인 1472년에 태어났다. 왕양명王陽明의 본래 이름은 수인守仁이고 자字가 백안伯安으로서 절강성 여요餘姚 사람이다. 왕양명은 젊은 날, 병법에 관심이 많았고 28세 때 진사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그러나 34세 때 탄핵 상소를 올렸다가 오히려 곤장 40대를 맞고 기절하였다. 37세 때 유배지인 귀주 용장역에서 머무는 동안 깨달음을 얻었다. 밤중에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의미를 홀연히 깨닫고大悟 자기도 모르게 소리지르고 펄쩍 뛰어 시종을 놀라게 했다. 그 당시 왕양명은 성인의 도道는 오성吾性으로 충분하기 때문에 이전의 방법론인 사물로부터 리理를 추구하는 것은 오류라는 것을 깨달았다. 왕양명은 43세 때 치량지致良知만을 학생들에게 가르치다가 명나라 세종世宗 가정嘉靖 7년인 1528년에 타계하였다. 향년 57세였다.


2. <대학문大學問>
<대학문>은 양명학의 교본이다.

+ 명명덕明明德
왕양명은 <대학문>에서 말하기를 "대인大人은 천지天地의 모든 사물과 일체一體가 된 자이다. 따라서 그는 천하天下를 한 집안으로, 중국中國을 한 인간으로 여긴다. 육체를 근거로 너와 나를 구별하면 소인小人이다. 그러므로 대인大人이 천지天地 모든 사물과 일체가 된 것은 의도意한 것이 아니라 그 마음의 본래本 인仁으로 인하여 천지天地 모든 사물과 일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찌 대인大人만 그렇겠는가. 소인小人의 마음도 그렇지 않음이 없지만 스스로 작아져 좀스러워진 것이다. 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것을 보면 누구나 깜짝 놀라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생긴다,. 그 이유는 마음의 인仁이 그 아이와 일체一體이기 때문이다... ...  이런 일체의 인一體之仁은 소인의 마음에도 반드시 있다. 이 성性은 천명天命로부터 나온 것이므로 저절로 빛나고 꺼지지 않는 영靈이므로 명덕明德이다... ... 따라서 대인大人이 되려는 학생은 오직 사욕私慾을 제거하여 막힘이 없어지면 그 명덕明德이 저절로 빛남으로써 본래대로 천지天地의 모든 사물과 일체가 되는 것이지 본체本體의 밖에서 무엇인가 들어와 덧붙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왕양명은 모든 사물과 일체가 되는 것을 인仁으로 보았다. 이러한 인仁을 실현시키는 것이 명명덕明明德이다. 그럼, 명명덕은 어디 있는가. 명명덕은 인간이 하늘天로부터 부여받은 성性이다. 이 성性은 꺼지지 않는 영靈이지만 사심私心으로 인하여 막혀 있으므로 그 밝은 빛을 볼 수 없게 되어서 사물과 일체를 이룰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왕양명의 포인트이다. 육상산에 따르면 우주가 인간을 격리시킨 것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우주를 격리시켰다. 우주를 격리시킨 자는 소인小人이다. 맹자가 말한 측은지심, 수오지심 등 사단四端은 명덕明德이 빛남으로 인하여 생기는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 친민親民
왕얌명은 <대학문大學問>에서 말하기를 "밝게 비추는 명명덕明明德은 천지의 모든 사물과 일체인 그 본체體를 드러내 세우고, 백성을 사랑함親民은 그 본체體를 실현토록 하는 것이다. 따라서 명명덕明明德은 친민親民을 위해 나온 것이고 친민親民은 그 명덕明德이 빛나는 곳이다... ... 군신, 부부, 친구, 더 나아가 산천, 귀신, 금수, 초목 등과 친親하여 나吾와 일체의 인仁을 이루면 나의 명덕明德은 완전히 밝혀진 것이고 세계 모든 사물과의 일체一體가 된 것이다... ... 이것이 진성盡性이다."라고 하였다. 육상산에 따르면 마음은  하늘天과 인간이 공유하는 판所이었다. 따라서 하늘天과 인간은 다르지 않다. 마음의 본체인 본심本心은 모든 사물과 인간으로 이루어진 현상세계로부터 나온다. 따라서 본심의 명명덕은 천하의 모든 사물과 인간을 비추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사심私心을 버리면 성性이 활동하게 되므로 사물과 일체를 이룰 수 있다. 사물과 일체를 이룬다는 것은 천하의 본질을 파악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왕양명의 포인트이다.

+ 지선至善
왕양명은 <대학문>에서 말하기를 "지선至善은 명덕明德과 친민親民의 최고 기준極이다. 신이 계시한 성天命之性은 순수한 지선至善으로서 그 빛나는 영靈은 꺼지지 않는다. 이 지선至善이 나타나는發見 곳은 명덕明德의 본체本體이고 그곳은 양지良知의 판所이다. 지선至善이 나타남으로 인하여 옳은 것은 옳게 되고 그른 것은 그르게 됨은 경중輕重, 후박厚薄에 따라 그 느낌과 감동이 변하여 운동하면서 종잡을 수 없이 저절로 하늘天 가운데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선은 백성民彛과 현상物則의 기준極으로서 그 사이에는 조금의 증감이나 의혹도 있을 수 없다."고 하였다. 지선至善이란 하늘天으로부터 부여받은 인간의 성性이다. 지선至善, 즉 인간의 최고 성性은 바로 천하의 양지良知이다. 치량지致良知 즉, 양지를 깨닫는 것은 하늘天이 부여한 성性을 회복하는 것이다. 이 영원히 빛나는 영靈인 성性 즉, 지선至善은 인간과 사물로 가득찬 천하의 본질이다. 이러한 성性을 깨닫기 위해서는 사심私心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것이 왕양명의 포인트이다. 왕양명을 비롯한 심학자心學子들은 천지의 이원성을 부정하면서 오로지 형이하形而下의 천하만을 인정한다. 왕먕명은 말하기를 "인간의 마음은 하늘의 연못天淵이니 이 마음의 본체는 담지 않은 것이 없는 판所이다. 원래 하나의 하늘天만 있으니 사욕私欲으로 인하여 장애가 생기면 이 하늘天의 본체本體를 상실한다... ... 따라서 이제 생각에 생각을 더하여 양지를 깨달으면 치량지致良知을 얻고 그런 장애와 질곡이 일제히 제거되어 인간의 마음은 다시 본체本體가 되어 하늘의 연못天淵이 된다."고 하였다. 인간의 마음은 사욕私慾이 제거되어야만 성性 즉, 양지良知, 지선을 깨닫고 하늘天의 마음을 회복할 수 있다. 이것이 왕양명의 포인트이다.


3. 지행합일知行合一

왕양명에 따르면 양지良知는 성性이고 치량지致良知는 성性을 깨닫는 것이다. 지행합일이란 양지良知는 인간의 마음에서 진행行하여 하늘天의 본체인 본심本心과 합일合一힌다는 것이다. 측은지심의 양지良知는 인간의 성性이지만 그 본체인 하늘天과 합일合一을 이행行한다. 교부철학자 안셀무스는 '알기 위하여 믿는다.'고 했다. 왕양명의 술어로 말하자면, 믿는 대상은 양지이고 믿는 대상이 시공을 경과하여 드디어 알게 된 것은 치량지이다. 치량지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사심私心이 제거되어야 한다. 왕양명은 말하기를 "하늘이 계시한 성天命之性은 내 마음의 본체本體로서 스스로 빛나면서 깨우쳐 밝히는 영靈이다. 오직 내 마음의 양지良知만이 스스로 그 선善을 알고, 또 오직 내 마음이 양지良知만이 그 불선不善을 안다."고 하였다. 양지는 그 본체인 하늘天을 향하고 있으므로 선악을 분별할 수 있다. 왕양명의 제자가 묻기를 "사람들은 이미 부친에 대하여 효도해야 함을 알고, 형에 대하여 공손해야 함을 알지만 실제로는 효도하지 않고 공손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지知와 행行은 분명히 다른 것입니다."라고 하자 왕양명은 답하기를 "그것은 이미 사욕私慾에 의하여 지知와 행行이 단절된 경우이지 지행知行의 본체本體는 아니다. 지知가 행行하지 않는 경우는 없다. 알면서 행하지 않는다면 아직 모르는 것이다. 지행知行에 대한 성현의 가르침은 바로 그 본체本體를 회복하려는 것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 ... 지知는 행行의 주된 뜻意이고 행行은 지知의 실현功夫이다. 지知는 행行의 시작이고 행行은 지知의 완성이다. 때를 만나 실현되면 오직 지知만 말하더라도 이미 행行이 내재하고 오직 행行만 말하더라도 지知가 내재한다."고 하였다. 아이가 우물에 빠지려 할 때 누구나 깜짝 놀라 측은지심이 생긴다. 마음의 측은함, 즉 양지는 그 선善을 향하여 나아간다. 따라서 사심을 제거하여 지행知行의 본체를 본 자가 있다면 그는 그 본체를 따라 행동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4. 주왕이동朱王異同

왕양명은 자신의 학문을 주자의 학문과 구별지었다. 왕양명은 말하기를 "주자가 말한 격물格物은 사물안에 있는 그 리理를 연구하는 것으로서 즉물궁리卽物窮理란 모든 사물 안에 있는 리理를 확정定하는 것이다. 내 마음은 모든 사물 안에 놓여 있는 리理를 찾게되므로 그것은 마음心과 리理를 둘로 쪼개는 일이다. 반면에 내가 말하는 치지격물致知格物은 내 마음의 양지良知는 모든 사물로부터 나온 것이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내 마음의 양지 안에는 천리天理가 있는 것이다. 천리天理를 담고 있는 모든 사물은 내 마음 판의 양지가 되면서 저마다 리理를 세우게 된 것이다. 내 마음에 사물이 들어와 양지로 전환되는 것이 치지致知이고 그 사물이 마침내 내 마음에 리理를 세우는 것이 격물格物이다. 따라서 마음心과 리理는 합하여 통일一된다."고 하였다. 주자는 형이상의 리理와 형이하의 성性을 구별하였다. 형이하 모든 사물의 성性은 그 형이상의 리理와 합하여야 한다. 인간의 성性도 리理와 합일하여야 하고 인간 마음心의 성性도 리理와 합해져야 한다. 이것이 즉물궁리이다. 즉 즉물궁리란 모든 사물과 현상의 리理를 연구하여 정립하는 것이다. 반면에 왕양명은 형이상形而上을 인정하지 않으므로 하늘天과 리理는 형이하에 존재한다. 하늘天의 세계, 즉 형이하의 현상세계와 모든 사물은 저마다 리理를 갖고 있어서 인간 마음에 들어오면 양지良知가 된다. 이것이 치지致知이다. 이 치지致知, 즉 양지가 스스로 자신을 실현하면서 마음을 깨우치는 것이 격물格物이다. 재미있게도, 리理의 성격을 갖고있는 치지致知, 즉 양지는 인간의 마음 판에 들어와서 자신을 실현시키기를 기다리다가 사욕私慾으로 가득찬 마음이 깨지면서 본심本心을 실현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치지격물致知格物이다. 따라서 마음이 없으면 양지는 자리잡을 데가 없는 것이다. 즉 마음이 없으면 리理도 없다. 이것이 왕양명의 포인트이다. 왕얌명은 말하기를 "심즉리心卽理, 즉 마음이 곧 리理이다. 현상세계天下에 어찌 마음 밖의 일이 존재하고 또 마음 밖의 리理가 존재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왕양명에 따르면 마음 판에 놓여있는 모든 사물은 그 리理를 내포하고 있다. 즉 심즉리心卽理이다. 한 인간이 효도를 한다면 그 인간의 마음은 효도의 양지良知, 즉 마음 판에 놓여있는 리理가 본심으로 돌아가 합일을 실현한 것이다. 재미있게도, 한 인간이 효도를 하지 않는다면 그 인간의 마음 판에는 효도의 양지가 아직 들어오지 않았거나 들어왔어도 사욕으로 인하여 본심과 합일하지 못한 것이다. 반면에 주자에 따르면 한 인간이 효도를 하는 이유는 효도의 리理가 형이상의 본체세계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상세계의 모든 인간은 본체세계에 존재하는 효도의 리理에 그 성性을 구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효도하지 않는다면 악惡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주자와 왕양명의 차이이다. 왕양명은 말하기를 "풀, 나무, 기와, 돌은 인간의 양지가 없다면 풀, 나무, 기와, 돌이 될 수 없다... ...세계天地 또한 인간의 양지가 없었다면 세계天地가 될 수 없었다. 세계 모든 사물과 인간은 원래 일체一體이고 그 흔적은 영의 공간靈處에 남겨져 있다. 인간 마음 속의 한줄기 빛나는 영靈이 그 흔적이다."라고 하였다. 인간의 마음은 영靈이다. 영靈의 공간에는 세계와 모든 사물이 구비되어있다. 즉, 마음이 곧 세계이다. 마음을 알면 세계를 아는 것이다. 이것이 유심론이다. 이것이 왕양명의 포인트이다. 반면에 주자에 따르면 본체세계의 존재인 리理는 현상세계 속에서 성性으로서 생성되었다. 성性은 모든 사물의 형이하적 상象이지만, 그 자체는 리理가 아니다. 주자가 말하는 마음의 리理는 본체세계에 따로 있다. 왕양명의 친구가 바위틈의 꽃을 가리키며 묻기를 "현상세계天下에, 마음 밖의 사물은 없다고 했으나 이처럼 꽃은 산에서 피고 지니 내 마음과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왕양명은 답하기를 "그대가 이 꽃을 보지 않았을 때 이 꽃과 그대의 마음은 함께 적막 속에 돌아가 있었네. 그대가 이 꽃을 보게되자 꽃빛은 즉각 환하게 빛나게 되었네. 따라서 이 꽃은 그대의 마음 밖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라네."라고 하였다. 모든 사물은 원래 그 자체의 빛을 갖고 있다. 사물의 빛은 인간의 마음 밖에서는 빛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마음 속의 영靈이 사물을 비추어야만 사물은 빛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사물은 인간의 마음 판에서만 빛남으로써 존재하게 된다는 것이다. 왕양명은 말하기를 "세계天地, 귀신, 모든 사물은 내 빛나는 영靈이 밝게 비춤으로써 존재하는 것이다. 나의 빛나는 영靈이 밝게 비추지 않는다면 세계, 귀신, 모든 사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 죽은 사람을 한번 보라. 이미 그의 맑은 영靈이 흩어지면 세계와 모든 사물은 도대체 어느 공간에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왕양명에 따르면 먼저, 인간 마음이 있고 나서 세계와 모든 사물이 있는 것이다. 빛나는 영靈은 세계와 모든 사물을 비추면서 세계와 모든 사물을 세계화하고 사물화한다. 따라서 마음 속 빛나는 영靈이 떠나면 세계와 사물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왕양명은 현상세계天下에 마음心 밖의 사물은 없다고 했다. 반면에 주자는 현상세계天下에 성性 밖의 사물은 없다고 했다.


5. 불교와 도교 비판

주자에 따르면 유가儒家는 성性을 실實로 여기고 불가佛家는 성性을 공空으로 여긴다. 반면에 왕양명은 심心을 실實로 보았다. 왕양명은 특히 마음心 속 빛나는 영靈을 강조하였다. 마음 속 빛나는 영靈은 양지良知를 비추고 양지는 빛나게 된다. 왕양명은 말하기를 "도교仙家는 허虛를 강론하는데 성인聖人이 어찌 허虛에 한 점의 실實을 덧붙이겠는가. 불교는 무無를 강론하는데 성인이 어찌 무無에 한점의 유有를 덧붙이겠는가. 도가의 허虛는 양생養生에서 비롯되었고 불교의 무無는 생사고해의 해탈에서 비롯되었다. 따라서 본체本體에 대하여 그와 같은 의도를 덧붙인 것이므로 저 허虛와 무無는 본색本色이 아니라 오히려 본체에 장애를 가한 것이다. 성인은 다만 양지良知의 본색本色으로 돌아갈 뿐 어떤 의도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양지의 허虛는 곧 신天의 태허太虛이고 양지의 무無는 곧 태허의 무형無形이다. 해, 달, 바람, 번개, 산천, 인간, 사물 등 모든 형태의 존재는 다 태허의 무형 속에서 발현하여 나온 것이므로 신天은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성인은 양지가 드러난대로 따를 뿐이다. 세계天地의 모든 사물은 내 양지가 빛남에 따라서 존재하는 것이므로 한 사물이라도 양지가 되어서 빛나지 못한 적이 있었는가."라고 하였다. 양지良知는 절대적 기준으로서 현상세계, 즉 신天의 세계와 모든 사물의 가능성이다. 인간은 그러한 양지에 따를 뿐이고 도교와 불교처럼 그 본체에 인위人爲를 가하지 않는다.


6. 악惡의 기원

왕얌명에 따르면 현상세계天下에 마음 밖의 사물은 없고, 마음 속에는 빛나는 영靈이 있다. 그럼, 악惡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왕먕명은 말하기를 "지선至善이 마음의 본체本體이다. 조금이라도 이 본체本體를 넘어서면 악惡이다. 하나의 선善이 있고 그에 대립하는 하나의 악惡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선악善惡은 한 물건一物일 뿐이다."고 하였다.선악은 서로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선善으로부터 빗나간 것이 악惡이다. 이것이 왕양명의 포인트이다. 왕얌명은 말하기를 "희喜, 노努, 애哀, 구懼, 애愛, 오惡, 욕慾은 7정情이다. 이 7정은 인간의 마음과 합하여 함께 있으므로 양지良知는 더 밝게 빛나지 않으면 안된다. 마치 햇빛처럼 조금의 틈이라도 있으면 일제히 빛을 비추어 드러내 밝히는 것과 같다. 구름과 안개가 온 공간을 뒤엎더라도 태허太虛의 빛色象은 구별되듯이 햇빛 역시 소멸되는 것이 아니다. 구름이 햇빛을 가린다고 하여, 신天은 구름이 필요없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7정情이 스스로 그러하게自然 흘러가는 것은 모두 양지良知의 기능用이므로 7정을 선악善惡으로 나눌 수 없지만 기회를 주면 안된다. 7정情이 나타나면 마음은 욕망慾과 함께 있는 것이므로 양지의 빛은 가려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때마침 양지가 모여 비춤으로써 편견이 제거되고 그 본체는 회복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7정에 기회를 주면 마음의 본체, 즉 본심은 가려지게 된다. 그러나 7정은 마음 속 영靈을 완전히 가릴 수는 없다. 때에 맞게 빛나는 영靈이 양지를 비추면, 즉 치량지致良知에 이르면, 새롭게 빛을 얻은 양지는 빛을 반짝이며 7정으로인한 편견을 제거하고 본심本心을 회복하게 된다. <대학>에 따르면 마음에 분노가 있으면 바르게 될 수 없다고 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왕양명은 <전습록>에서 말하기를 "분노가 인간의 마음에 어찌 없으리오마는 다만 기회를 주어서는 안된다. 사람이 분노에 조금이라도 기회意思를 주어 적당함을 넘는 것은 확연대공廓然大公한, 즉 크게 일어나 저절로 빛나는 본체를 벗어난 것이다. 그래서 분노가 있으면 바르게 될 수 없다. 분노가 사물화되어 들어오면 단지 그에 순응하기만 할뿐 조금의 기회도 주지 않으면 심체心體는 저절로 크게 빛나므로 본체本體의 바른 상태에 도달한다. 이를테면 밖에서 사람들이 싸우는 것을 볼 때 그것이 불의하면 내 마음은 분노하지만 본심本心은 저절로 크게 빛나므로 조금의 기氣도 발동하지 않는다. 이와같이 분노한 사람은 이러한 마음으로 기회를 주지않으면 바르게 될 수 있다."고 하였다. 분노하는 것은 생각이 대상에 기회를 주었기 때문이다. 7정에 기회를 주어서 적당함을 넘는 것은 본체를 벗어나는 일이다. <단경壇經>에 따르면 첫 생각에 대상이 떠오르면 번뇌이고 다음 생각에 그 대상을 벗어나면 깨달음이라고 했다. 정호는 <정성서定性書>에서 성인의 기쁨은 기뻐해야하는 대상에서 오고 성인의 분노는 분노하지않으면 안되는 대상에서 온다고 하였다. 성인의 마음은 맑은 거울처럼 저절로 밝게 비추므로 사물화된 분노가 도래하면 그에 순응하지만 기회를 주지 않으므로 얽매이지 않는다.

+ 선악론善惡論
왕양명에 따르면 선악은 좋아하고 싫어하는 감정에서 비롯된다. 원래 모든 사물은 선악의 구분이 없다  설간薛稈이 화단의 잡초를 뽑으면서 양명 선생에게 묻기를 "세계天地에 왜 선善은 기르기 어렵고 악惡은 뽑기 어렵습니까."라고 하였다. 왕양명은 답하기를 "... ... 그런 선악의 개념은 육체로부터 일어난 것으로서 그릇된 것이다... ... 세계天地의 뜻生意은 꽃이든 잡초든 똑같으니 무슨 선악의 구분이 있겠는가. 네가 꽃을 관상하려고 하므로 꽃은 선善이고 잡초는 악惡으로 간주한 것이다. 만약 잡초를 약으로 쓰려한다면 잡초는 선, 꽃은 악으로 간주할 것이다. 이러한 선악의 개념은 모두  네 마음의 좋아함好과 싫어함惡으로부터 생긴 것으로서 그릇된 것이다."라고 하였다. 설간은 묻기를 "그럼, 선도 없고 악도 없다는 말씀입니까."라고 하였다. 왕양명은 답하기를 "선도 없고 악도 없음은 '리理의 정지靜'이고 선도 있고 악도 있음은 '기氣의 운동動'이다. 기氣가 운동하지 않으면 선도 없고 악도 없게 되므로 이것이 지선至善이다."라고 하였다. 설간이 묻기를 "그럼, 불교에서 말하는 선도 없고 악도 없다는 말과 어떻게 다릅니까.'라고 하였다. 왕양명이 답하기를 "불교는 선도 없고 악도 없는 상태가 떠오르기를 기다리면서 일체의 일을 상관하진 않으므로 현상세계天下를 다스릴 수 없다. 그러나 유교의 성인이 말하는 선도 없고 악도 없음은 오직 일부러 좋아하거나 싫어하지 않고 오직 기氣가 운동하지 못하도록 성인의 도道을 좇아 그것을 기준으로 삼고 한결같이 천리天理에 따라 모든 사물을 돕고 완성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설간은 묻기를 "그럼, 잡초는 뽑아서는 아니 되겠군요."라고 하였다. 왕양명은 답하기를 "그와 같은 입장이 부처와 노자의 견해이다. 잡초가 방해가 된다면 뽑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설간은 묻기를 "그렇게 된다면 일부러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아닙니까."라고 하였다. 왕양명은 답하기를 "일부러 좋아하거나 싫어하지 않는다고 전혀 호오好惡의 감정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그렇다면 지각이 없는 사람일 것이다. 작위作하지 않는다는 것은 호오好惡가 리理를 좇아 드러나도록 조금의 기회도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것이다. 이와같이 하면 호오好惡는 같은 것이 되어버린다."고 하였다. 설간은 묻기를 "잡초를 뽑는 일이 어떻게 리理가 드러나도록 하는 일이고 감정에 기회를 아니 주는 일입니까."라고 했다. 왕양명은 말하기를 "잡초가 방해가 된다면 뽑아야 하는 것이 이치理이므로 뽑을 따름이다. 우연히 뽑지 못하더라도 마음에 번뇌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호오의 감정에 기회를 주면 심체心體에 번뇌가 되어 기의 공간氣處이 심히 운동하게 된다."고 하였다. 우리는 자기의 신체를 나로 여기고 나와 대립하는 모든 사물을 타자로 보는데 이것은 바로사심私心 때문이다. 그래서 왕양명은 개인의 호오好惡의 감정으로부터 선악의 개념이 일어난다고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호오의 감정을 인정하면서도 기회를 주지 않으면 호오는 서로 다른 것이 아니게 되고 호오好惡는 그 이치에 따라 사물화되므로 번뇌할 필요가 없게된다. 이것이 왕양명의 포인트이다.


7. 동정합일動情合一

이른바 한결같이 리理에 따른다는 것은 왕양명의 술어로 말하자면 한결같이 양지良知의 흐름에 맡긴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양지는 리理의 기준이기 때문이다. 왕양명은 말하기를 "성인이 앎에 이른致知 업적은 쉼없이 성誠에 다다른 것이다. 그 양지의 본체는 맑은 거울처럼 밝으므로 조금의 먼지도 없으니 추한 것이 도래하면 추한대로 마주하고 아름다운 것이 도래하면 아름다운대로 마주한다. 맑은 거울은 조금도 오염되지 않았으므로 이른바 '정情으로 모든 일에 마주하지만 정이 없다無情.'는 말과 같다. 불교 또한 "그 대상이 없음에도 그 마음이 일어난다."고 하는데 이와 다른 것이 아니다. 맑은 거울은 아름다운 것은 아름다운 것에 아름답게 마주하고 추한 것은 추하게 마주하는데 한번 비추기만 하면 모두가 모두 진실이 된다. 빛줄기가 그 마음 공간心處에서 일어나면 아름다운 것은 아름다워지고 추한 것은 추해지지만 한번 비추고 나면 그림자를 남기지 않으므로 비춘 대상이 없다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양지의 본체는 본심이므로 사심私心이 제거되면 본심의 빛줄기는 있는 그대로 진실을 밝히지만 그림자를 남기지 않으므로 보통의 빛과는 다른 것이다. 양지는 이 빛줄기에 의하여 치양지致良知가 된다. 왕양명은 말하기를 "마음은 운동動도 정지靜도 없다는 말은 정지靜는 마음의 본체이고 운동動은 마음의 기능用이라는 말이다. 군자는 운동과 정지를 분리하지 않는다. 마음은 정지할 때도 늘 자각하고 있으니 없지 않고 따라서 늘 마주한다. 마음은 운동할 때도 늘 평정定되므로 있지 않고 따라서 늘 고요하다. 늘 마주하고 늘 고요하므로 운동과 정지는 각자 그 일이 있다. 이것이 집의集義이다. 의義를 축적集하므로 큰 후회가 없는데 이른바, 운동할 때도 평정하고 고요할 때도 평정하다는 말이다... ... 리理를 따르는 것이 정지靜이고 욕망을 좇는 것이 운동動이다. 욕망이란 꼭 음악, 미색, 재물, 이익 등 외적인 유혹만이 아니라 마음 속의 사심私心은 다 욕망이다. 따라서 리理를 따르면 온갖 변화에 대처하더라도 정지靜이다. 염계(주돈이)는 정靜을 주主로 삼아서 사욕慾을 없앤다고 했다."고 했다. 동정합일動靜合一은 절대적 정지이다. 활동할 때도 평정하고 고요할 때도 평정한 것이 참된 평정이다. 정호는 <정성서定性書>에서 이와 똑같이 언급하였다. 동정합일에 이르면 천리天理, 즉 밝게 비추는 영靈의 본체는 조금도 모자라지 않게 되므로 동요, 걱정, 두려움, 환희, 분노, 편견, 아집, 불만족, 부끄러움이 사라지고 모든 행동이 예禮에 합당하게 되고 마음이 바라는 대로 따르더라도 법도에 맞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치량지致良知에 대한 왕양명의 포인트이다.





<참고문헌>

풍우란. 박성규 역. 중국철학사.





2012년 6월 27일 수요일

10. 주자: 성즉리性卽理 육상산: 심즉리心卽理

1. 역사적 맥락에서 본 주자

주자는 정이의 리학理學을 완성하였다. <송사宋史>에 따르면 주자, 즉 주희朱熹(1130-1200)는 휘주徽州 무원 사람이다. 주희는 경전을 널리 연구하였고 식견있는 선비들과 두루 교류하였다. 나종언羅從彦의 제자는 이통李?이었는데 주희는 그에게서 배웠다. 주희는 19세 때 과거에 합격한 이후 평생 그 직職을 유지하였고 또한 한직이었으므로 방대한 글과 주해를 쓰면서 몰려드는 많은 제자들을 가르칠 수 있었다. 주희는 말년에 간신의 음모로 부당한 고초를 겪기도 했다. 주희 이전의 정호와 정이는 심학心學Idealism과 리학理學rationalism의 길을 열었다. 주희는 정이가 타계한 지 23년 후에 태어났는데 장재, 정호, 정이, 소강절, 주돈이 등 도학자들의 사상을 종합하여 리학理學을 완성하였다. 주희는 송나라 영종寧宗 경원慶元 6년인 1200년 이질로 타계하였다. 향년 71세였다. 주자는 <어류語類>를 남겼다.


2. 리理, 태극太極

주자는 주돈이의 태극太極, 소강절의 수數, 장재의 기氣, 정호와 정이의 형이상 형이하의 리理 기氣를 융합하여 독자적인 형이상학을 완성하였다. 주자는 말하기를 "무릇 형체形가 있고 형상象이 드러난 것은 모두 기器이다. 이 기器는 리理에 따르므로 도道이다."라고 하였다. 도道는 추상적 개념을 말하고 기器는 구체적 사물을 말한다. 주자는 말하기를 "형이상의 존재形而上者는 형체形체도 없고 그림자도 없은즉, 리理이다. 형이하의 존재形而下者는 실상情도 있고 모습狀도 있은즉, 기器이다."라고 하였다. 형이상자는 시공을 초월하여 자존subsist하는 것이고 형이하자는 시공 안에서 존재exist하는 것이다. 주자는 말하기를 "무극無極은 태극太極이므로 사물이 그곳에서 찬란히 빛난 것과는 다르다. 당초 그곳에는 한 사물도 없었고 단지 리理만 있었을 뿐이다. 리理가 많아질 수 있으므로 사물 또한 많아질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극極이란 기준을 말한다. 무극無極이란 차이가 나지 않는 완전한 기준이고 태극太極이란 가장 우수한 기준이란 뜻이다. 이를테면 정사각형이 직사각형과 다른 이유는 정사각형의 무극, 즉 리理에 따라 실현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정사각형의 무극은 태극인 것이고 정사각형의 태극은 그 사물의 리理이다. 주자는 무극과 태극과 리를 동일시 하였다. 리理는 사물이 실현되는 기준이다. 이것이 주자의 포인트이다. 주자는 말하기를 "어떤 일이 생겼다는 것은 그 안에 리理가 있다는 것이다. 무릇 세계天地에 어떤 사물이 생성되었다는 것은 그 안에 리理가 존재한다는 것이다."고 하였다. 리理는 사물에 앞서서 선험적으로 존재한다. 계단의 벽돌에도 벽돌의 리理가 이미 있고 의자에도 의자의 리理가 이미 있다. 이것이 주자의 포인트이다. 주자는 말하기를 "리理와 관련하여, 사물이 아직 생성되지 않았더라도 그 사물의 리理는 존재한다. 그 리理만 존재한다는 것은 사물이 아직 현실화되지 않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수레가 없었을 때도 수레의 리理, 즉 이데아는 이미 있었다. 따라서 수레는 선재先在한 수레의 리理에 따라 생성된 것이다. 수레의 리理는 수레의 완전한 형식이자 극極, 즉 기준이다. 주자는 말하기를 "태극太極은 최고선善에 도달하는 리理이다. 주돈이가 말한 태극은 세계 모든 인간과 사물중에 최고선으로서의 표덕表德이다."라고 하였다. 주희의 태극은 플라톤의 선善의 이데아이고 아리스토테레스가 말한 신神이다. 주자는 말하기를 "태극에는 음양오행의 리理가 다 들어있으니 텅 비어空있을 리가 없다. 만약 비어있다고 하면 불교의 성性과 비슷해질 것이다."라고 하였다. 태극은 불교에서 말하는 공허空虛가 아니라 실제로 음양오행 등의 리理로 꽉 차있다. 주자는 말하기를 "태극은 형이상의 도道이고 음양陰陽은 형이하의 기器이다. 현상을 관찰해보면 그 운동動과 정지靜는 같은 때에 일어나지 않고 음과 양은 같은 위치에서 일어나지 않지만 태극은 어디서나 존재한다. 태극은 공허하고 고요하고 아무런 조짐이 없어보이지만 운동動과 정지靜, 음과 양의 리理가 그 안에 구비되어 있다."고 하였다. 태극은 형체가 없으므로 비어있는 듯 보이나 온갖 리理가 다 구비되어있다. 주자는 말하기를 "이 리理가 존재한 후에야 기氣가 생성되고 이 기氣가 생성된 후에야 리理는 안주할 공간處이 있게된다. 크게는 세계天地, 작게는 땅강아지와 개미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성이 다 그렇다."고 하였다. 리理가 먼저 있고나서 구체적 개체가 생성된다. 주희는 세계의 생성도 그렇다고 보았다. 각 사물에는 각 리理가 구비되어있고 전체로서의 태극도 구비되어있다. 주희는 말하기를 "인간마다 하나의 태극이 들어있고 사물마다 하나의 태극이 들어있다."고 하였다. 주희에 따르면 모든 사물은 각각 태극을 구비하고 있다. 마치 달은 하나이지만 여러 개의 접시 물에 달이 여러 개 생기는 것과 같겠다. 한편, 화엄종에서 말하는 인드라망 경계는 하나의 구체적 사물 속에 모든 구체적 사물이 들어있다고 말한다. 또 천태종에 따르면 한 사물의 법성法性은 그 사물의 잠재태라고 본다. 주희에 따르면 한 사물에 모든 사물의 리理인 태극이 구비되어있다고 본다. 즉, 월인천강月印千江이다.


3. 기氣

본체세계의 형이상은 리理이고 현상세계의 형이하는 기氣이다. 리理는 형상形相에, 기氣는 질료質料에 비유될 수 있다. 주자는 말하기를 "세계天地 간間에는 리理도 있고 기氣도 있다. 리理는 형이상의 도道로서 사물을 생성하는 근본本이며 기氣는 형이하의 도道로서 사물을 생성하는 도구이다. 인간과 사물이 생성될 때 리理는 반드시 성性이 되고 기氣는 반드시 형체形가 된다."고 하였다. 리理는 시공을 초월하여 영원한 반면에 기氣는 현상세계에서 리理에 따르게 되어있다. 이를테면 벽돌로 집을 지을 경우 집이라는 형식은 리理이고 벽돌이라는 사물은 기氣이다. 논리적으로 따지면 리理는 본체세계에 존재하지만 실제적으로 리理는 현상세계의 사물에 존재한다. 주자는 기氣 안에서 보게되는 리理의 공간에 대하여 말하기를 "음양오행이 뒤얽혀 있어도 조리를 잃지 않는 것은 바로 리理 때문이다. 만약 기氣가 모여 붙지 않은 때는 리理 또한 붙을 판所이 없다. 기氣는 사물화되는데 사물화된 기氣에는 리理가 붙어있다. 주자는 말하기를 "세계天地가 생성되기 전에 필경 리理만 존재했다. 이 리理가 존재함으로써 곧 세계天地가 생성되었으니 이 리理가 없으면 세계天地도, 인간도, 사물도, 아무 것도 있을 수 없다. 이 리理가 있으면 곧 기氣가 흘러나가 모든 사물을 기른다."고 하였다. 리理는 모든 개체 사물의 생성에 앞서 존재한다. 리理는 곧 태극이다. 태극太極은 곧 무극無極이다. 주자는 말하기를 "주돈이가 무극이라고 한 이유는 그것은 방향과 장소도 없고 몸체形와 모습狀도 없으나 사물로 생성되기 이전에도 존재했고 사물이 된 후에도 존재하며 음양의 밖에 존재하나 음양 안에서 늘 행行하고 모든 사물에 관통되어 있으므로 없는 곳이 없이 존재하여 애초부터 소리, 냄새, 그림자, 반향이 없었다."고 하였다. 주자는 주돈이의 태극의 개념을 여과없이 받아들였다. 주돈이의 '무극은 태극이다無極而太極'라는 명제는 노자가 말한 '세계의 모든 사물天地萬物은 유有에서 생겼고 유有는 무無에서 생겼다.'는 명제와 가깝다.


3. 성性

주자는 말하기를 "인간이 생성된 것은 리理와 기氣가 합하였기 때문이다. 세계의 리理즉, 천리天理는 크고무한하나 기氣가 없으면 리理는 붙을 곳이 없다. 따라서 음양陰陽의 두 기氣가 반드시 모여서 붙들려 있은 후에야 리理가 붙을 곳이 있게 된다. 인간이 말하고 행동하고 생각하고 추구하는 그 모든 기氣에는 리理가 있다."고 하였다. 인간은 기氣와 리理가 합하여 생성된 존재이다. 따라서 인간의 기氣에는 리理가 붙어 있다. 그 붙어 있는 리理가 성性이다. 그럼, 인간만이 아니라 다른 사물에도 성性이 있는가. 주자는 말하기를 "현상세계天下에 성性이 없는 사물은 없다. 한 사물이 있으면 그 성性이 있는 것이고 사물이 없으면 성性 또한 없다."고 했다. 현상세계의 각 사물의 성性은 본래 그 사물의 리理이다. 주자는 말하기를 "인간과 사물은 모두 기氣를 받아 생성된다. 그러나 그 맑음精과 거칠음粗을 논하면 인간은 바르게 통하는 기氣를 얻으나 사물은 한쪽으로 치우친 기氣를 얻는다. 인간은 바른 기氣를 얻으므로 리理가 통하는 데에 막힘이 없지만 사물은 한 쪽으로  막힌 기氣를 얻으므로 리理가 막혀서 지각知이 없다. 사물 가운데 지각이 있는 것이 있으나 겨우 한 쪽으로 통하는 것에 불과하니, 까마귀가 효를 알고 수달이 제사를 아는 따위이다. 그래서 개는 지킬 줄만 알며 소는 밭갈 줄만 안다."고 했다. 인간이 받은 기氣와는 다르게 사물이 받은 기氣는 치우치고 막혀있기 때문에 리理가 온전히 드러나지 못한다. 주자는 말하기를 "이기二氣와 오행五行은 태초에 바르지 않은 것이 없었다. 다만 이리왔다 저리갔다하는 사이에 부정不正한 것이 생겼다."고 하였다. 리理는 완전하고 지극히 선善하다. 그러나 리理가 기氣에 붙어 실현될 때는 기氣에 얽매여 완전해질 수 없다. 마치 원圓의 리理는 완전한 것이지만 현상세계 속에서 사물화되면서 불완전한 원圓이 될 수밖에 없는 것과 같다. 현상세계의 모든 사물의 불완전성은 기氣에 얽매인 탓이다. 인간도 맑은 기氣를 얻은 사람, 탁한 기氣를 얻은 사람이 있다. 주자는 말하기를 "인간이 타고나 바는 희미하거나 빛나고, 맑거나 탁한 차이가 있다."고 하였다. 빛나고 맑은 기氣을 타고난 인간이 성인聖人이고 희미하고 탁한 기氣를 타고난 인간이 어리석은 자이다. 주자는 맹자, 순자 이래로 유가儒家에서 논쟁이 되어온 성선性善, 성악性惡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여겼다. 주자는 기질지성氣質之性에 대하여 말하기를 "횡거에 따르면 형形이 생긴 후에 기질氣質의 성性이 생겼으니 그것을 잘 돌아보면 세계天地의 성性이 실현될 수 있다. 또 명도에 따르면 성性을 논하고 기氣를 논하지 않으면 부족하고 기氣만 논하고 성性을 논하지 않으면 빛나지 못하므로 이 둘을 따로 여기면 옳지 않다. 또한 인의예지仁義禮智가 성性이라고 말하지만 세상에는 날 때부터 그러한 모습狀이 없은 인간이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기품氣稟이 그와 같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氣를 논하지 않는다면 저 성선性善에 이르는 리理는 부족한 것이 된다. 또 기품만 논하여 어떤 기품은 선하고 다른 기품은 악하다고 하면서도 하나의 공간處에 붙어있는 리理를 논하지 않으면 명백해지지 않는다."고 했다. 주자는 횡거, 즉 장재와 명도, 즉 정호의 말을 언급하면서 성性의 실현을 강조하였다. 인간의 성性은 세계天地의 성性과 합일할 수 있다. 그러나 각각의 인간은 성性의 차이가 있으므로 누구나 세계의 성性과 합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성性 차이가 생기는 이유는 인간마다 기氣의 청명과 혼탁이 다르기 때문이다. 주자에 따르면 성즉리性卽理이므로 성性은 선할 뿐이다. 그러나 현상세계에서 인간이 선할 수 없는 이유는 기질氣質의 차이 때문이다. 주자에 따르면 인간이 말하고 움직이고 활동하는 모든 것들이 다 기氣이다. 주자는 말하기를 "마음의 영靈이 알아서知 깨닫는覺 것은 기氣 때문만이 아니라 알아서 깨닫는 리理가 먼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 리理는 기氣가 모여붙어 형形을 이룬 후에 리理와 기氣가 합해아만 지각할 수 있다. 마치 저 등불의 경우처럼 기름을 얻어야 온갖 불꽃이 생기는 경우와 같다."고 하였다. 지각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지각의 리理와 기氣가 합해야 한다. 재미있게도 우리의 지각은 이미 현상세계에서 실현된 것이므로 이미 리理와 기氣가 결합한 이후의 일이다. 이미 우리의 지각은 영적인 기관靈處인 것이다. 주자는 말하기를 '영적인 기관, 즉, 영처靈處는 마음心일 뿐이고 성性이 아니다. 또 성性은 리理일 뿐이다."고 하였디. 주자는 말하기를 "성性, 정情, 심心은 맹자와 횡거가 잘 말했다. 인仁은 성性이고 측은은 정情이니 마음心上에서 나오는 것일 수밖에 없다. 심통성정心統性情, 즉 마음은 성性과 정情을 거느리는 것이다. 성性은 이렇게 합하는 것으로서 단지 리理이므로 사물이 아니다. 사물이라면 선하거나 아니면 악할텐데 선악이 없는 단지 리理이므로 선하지 않음이 없다."고 하였다. 성性은 리理로서 사물이 아니므로 선하지 않음이 없다. 그러나 정情은 현상세계의 사물이므로 반드시 마음心上에서 나온다. 재미있게도 성性은 기氣에 붙어있는 리理의 성性이므로 마음에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마음은 성性과 정情을 통괄한다心統性情. 주자는 말하기를 "성性은 마음의 리理이다. 정情은 마음의 운동動이다. 재才는 정情을 붙들어 모은다. 정情과 재才는 서로 매우 가깝다. 다만 정情은 물을 만나 물결처럼 붙들려 나아가는 것이라면 재才는 그렇게 붙드는 것이다. 요컨대, 천가지 만가지 모두가 마음으로부터 따라나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재才는 마음의 힘으로서 붙들거나 놓는 기력氣力이 있다. 즉, 마음心이 물이라면 물의 리理는 성性이다. 물이 동요하는 것은 정情이고 물이 넘치는 것이 욕망慾이다. 따라서 물의 재才는 기력氣力으로써 물의 완급을 조절하는 것이다. 정이에 따르면 성性은 신天으로부터 타고나는 것이고 재才는 기氣로부터 타고난 것이다. 주자는 말하기를 "성性은 오직 일정一定하지만 정情과 마음心과 재才는 합하여 기氣가 된다."고 하였다.


4. 주자의 수양법

본체세계의 리理는 현상세계의 인간 내부에서 성性으로 변화한다. 따라서 인간 내부의 성性은 리理를 본뜨고 있는 것이다. 주자는 말하기를 "인仁, 의義, 예禮, 지智는 성性이다. 성性은 포착될 수 있는 형形이나 그림자가 없고 오직 리理만 있을 뿐이다. 오직 정情만 직접 얻어 볼 수 있는데 측은惻隱, 수오羞惡, 사양辭讓, 시비是非가 바로 그 정情이다."라고 하였다. 리理는 형이상학적인 존재로서 추상적이므로 흔적과 모습을 찾을 수 없다. 그렇지만 인간은 리理가 현상계로 초월한 성性을 갖고있다. 즉, 마음이 측은한 정情의 성性은 인仁이고 수오한 정情의 성性은 의義이고 사양한 정情의 성性은 예禮이고, 시비한 정情의 성性은 지智이다. 인간의 성性 속에는 인, 의, 예, 지 뿐만 아니라 리理의 전체상全體象인 태극이 있다. 성인이란 기품의 치우침을 제거하여 막힘없이 태극을 드러낸 사람이다. 주자는 말하기를 "공자는 사심私心을 극복하고 예禮로 돌아가라克己復禮고 했고 <중용>은 중中으로 화합하고 덕성을 높이고 배움으로 도道에 들어서라고 했다. <대학大學>은 빛나는 덕을 밝혀라明明德이라고 했고 <서書>는 인심人心은 위태롭고 도심道心은 미미하니 오직 하나一를 향하여 정진하고 진실로 중中을 잡아내라고 했거니와 성인은 신의 리 즉, 천리天理를 실현하고 인욕人慾을 소멸할 것을 가르쳤다."고 했다. 주자에 따르면 인성人性은 본래 선善하다. 따라서 인욕人慾을 제거하면 선성善性이 드러나게 된다. 인욕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격물格物, 즉 사물의 본질을 바르게 연구해야 한다. 정호에 따르면 인간은 마음에 이미 하나의 밝은 빛이 존재하므로 경敬함으써 그 빛을 실현하면 인욕人慾은 저절로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공자 또한 인仁의 실현은 자신에게 달려있지 남에게 달려있지 않다고 했다. 주자는 말하기를 "치지致知는 격물格物에 있다고 함은 내 앎은 사물과 마주하여 그 리理를 연구해 낸다는 말이다. 인간의 마음은 영靈하므로 모든 앎이 구비되어 있고 현상세계天下의 모든 사물은 리理를 내재하고 있다. 다만 그 리理를 제대로 연구해 내지 못한 때문에 내 앎이 부족한 것이다. <대학>에 따르면 배우는 자는 먼저 현상세계天下의 모든 사물을 접하면서 스스로 그 리理 더 연구하여 그 극치에 달하여야 한다. 힘써서 오래도록 연구하면 문득 활연관통豁然貫通, 즉 저절로 뚫려 깨닫게 되면 사물의 안밖과 깊이, 표면表裏精粗이 전부 파악되고 내 마음의 본체적 기능全體大用이 밝혀진다."고 하였다. 주희가 말하는 격물格物이란 사물의 리理를 연구하여 그 극치에 도달하는 것이다. 이러한 주자의 격물설은 나중에 육상산과 왕양명의 육왕陸王학파의 비판을 받는다. 육왕학파는 주자의 격물설格物說이 무질서支離하다고 공격한다. 그러나 주자의 격물설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현상세계의 사물의 리理를 연구하는 것은 결국 인간 성性의 리理를 연구하는 것에 귀결되므로 리理를 더 연구할 수록 인간의 성性은 더 밝아진다. 문득 활연관통하여 깨닫게頓吾하게 되면 사물의 리理가 나의 성性속에 있음을 알게 된다. 이 때 돈오자는 사물의 안과 밖, 깊이와 표면뿐만 아니라 내 마음의 본체와 그 놀라운 기능도 알게된다. 주자가 말하는 격물格物의 목적은 인간 마음의 전체대용全體大用을 밝히는 데 있다. 이것이 주자의 포인트이다.


5. 정치철학

각 사물마다 리理가 있으므로 국가 사회의 조직도 다 리理가 있다. 이 리理를 따르는 것이 도道이다. 플라톤의 철인왕은 현상세계을 초월하여 선善의 이데아를 목격한 자이다. 이 수준이 되어야 뭇 사람을 주재할 수 있다. 주자도 플라톤과 맥락을 같이 한다. 인간의 성性에는 본체세계의 리理가 이미 구비되었으므로 막혀있는 기품氣稟을 제거하여 리理를 밝히는 것이다. 주희는 국가의 통치도 마찬가지로 보았다. 하, 은, 주 삼대三代의 지배자는 도심道心, 즉 세계의 , 천지지성天地之性에 따라 의리義理를 도모하였으므로 왕정王政도 패정覇政도 아니었다. 반면에 한당漢唐의 영웅호걸 지배자는 인심人心, 즉 기질지성氣質之性으로 리理를 벗어나 의義가 아닌 리利를 좇았으므로 패정覇政일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주자의 정치관에 대한 포인트이다. 한편 진량陳亮은 옛 성현에 대한 맹목적 숭배와 공허한 도덕을 거부하면서 실사實事와 실공實功을 도모한 영웅들을 받들었다. 진량은 리理와 욕慾의 분리들 반대하면서 인간의 희노애락도 인의예지와 같은 성性이라고 보았다. 이 설說은 이단으로 간주되었으나 그후 황종희에게 영향을 주었다.


6. 불교비판

주자에 따르면 불가佛家는 성性을 공空으로 여기지만 유가儒家는 성性을 실實로 여긴다. 당시 불교의 학설은 무無로 보았고 노자의 학설은 공空으로 보았다. 그럼, 무無와 공空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주자는 말하기를 "공空은 유有와 무無를 겸한 말이다. 도가道家는 반은 유有이고 반은 무無라고 주장하면서 이전已前은 모두 유有이지만 지금 눈 앞에 보이는 것은 유有라고 말한다. 따라서 이것은 공空이다. 그러나 불가佛家는 모든 것이 무無라고 주장하면서 이전已前도 무無이고 현재 보이는 것도 무無이며 색은 공이요, 공은 색이라고色卽是空, 空卽是色 한다. 크게는 모든 일과 모든 사물, 작게는 모든 뼈마디와 조직들을 모두 무無에 귀결시켰다. 그리하여 온종일 밥을 먹으면서도 쌀 한 톨도 씹은 적이 없다고 말하고 옷을 입고서도 실오라기 하나도 걸친 적이 없다고 말한다."고 하였다. 불가는 모든 사물을 허깨비幻有로 여긴다. 즉 색즉시공色卽是空이다. 화엄종에 따르면 현상세계의 모든 사물은 생멸生滅하고 무상無常하다. 사물이 존재함으로 진여眞如이고 따라서 공空일 수 없지만 사물은 무상無常함으로 공空이다. 즉, 진여眞如로서 존재하는 사물도 허깨비幻有인 것이다. 반면에 유가에 따르면 태극 안에 구비된 온갖 리理는 시공을 초월하여 영원히 존재한다. 리理가 현상세계로 초월한 것이 성性이다. 인간의 성性은 리理를 구비하고 있으므로 공空일 수 없다. 이것이 주자의 포인트이다. 주자는 불가의 공空이론을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았다. 주자는 말하기를 "부처는 마음이 텅 비어空 있다는 것을 보고서 리理를 무無라고 간주했다. 그러나 나는 마음이 비록 텅 비어空 있다는 것을 보지만 모든 리理가 구비되었다고 간주한다."고 했다. 부처는 공空을 무無라고 보았지만 주자는 공空을 리理로 보았던 것이다. 또 주자는 말하기를 "유자儒者는 리理가 생성되지도 소멸하지도 않는다고 여기지만 불자는 신식神識은 생성되지도 소멸하지도 않느다고 여긴다."고 하였다. 인간의 성性은 생성되지도 소멸되지도 않는 영원한 리理에 따른 것이므로 리理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도 리理에 따라 행하지 않을 수 없게된다. 주자는 말하기를 "불가는 저 마음을 아주 정미하게 갈고 닦아 마치 하나의 물건처럼 한 껍질, 한 껍질 벗겨내어 마침내 극한에 이르기까지 벗겨내어 마음이 빛나면 그것이 성性이고 간주한다. 그 성性이란 유가에서 말하는 마음心일 뿐이다. 상채上蔡(사량좌謝良佐)가 말하기를 '부처가 말한 성性은 성인이 말한 마음과 같고, 부처가 말한 마음은 성인이 말한 의지意와 같다.'고 했다. 마음은 단지 저 리理를 담고 있을 뿐이다. 불가는 저 리理를 이해하지 않고 지각운동知覺運動을 성性으로 간주하였다. 성인聖人들은 봄視에는 봄의 리理, 들음聽에는 들음의 리理, 언어言에는 언어의 리理, 동작貌에는 동작의 리理가 있다고 여겼으니 기자箕子가 말한 바대로 밝음明, 총명聰, 순화從, 공손恭, 슬기睿가 각각 그 리理이다. 그러나 불가는 그저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하는 것을 성性으로 여긴다. 따라서 봄과 들음이 밝든지 아닌지, 언어가 합당하든지 아닌지, 생각이 슬기롭든지 아닌지 일체를 상관하지 않는다. 즉 이런 저런 것 가리지 않고 모두 다 성性으로 간주한다. 그들은 리理에 대한 논의를 무조건 두려워하여 없애려고 하니 그야말로 고자告子가 말한 대로 생성한 것이 다 성生之謂性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마음은 보고 듣고 생각하는 지각운동을 갖고 있다. 재미있게도 마음은 그 리理를 갖고있고 지각운동인 봄과 들음도 그 리理를 갖고있다. 따라서 마음은 그 성性인 선善을 좇아 활동해야하고 봄과 들음은 그 성性인 밝음과 총명을 좇아 운동해야 한다. 주자에 따르면 불가는 마음 자체를 성性으로 오인하였고, 봄과 들음 자체를 성性으로 오인하였다. 마음은 실제로 있는 것이므로 형이하의 존재이고 마음의 리理는 자존하고 불변하므로 형이상의 존재이다. 주자의 철학은 불교의 유심론唯心論과 다른 실재론實在論이다.  주자는 정이의 리학理學을 계승발전 시켰다. 



7. 육상산陸象山

육상산은 정호의 심학心學을 계승발전시켰다. 양간楊簡의 <상산선생행장行狀>에 따르면 육상산은 송宋나라 무주撫州, 금계金谿 사람으로서 고종高宗 소흥紹興 9년인 1139년에 태어났으므로 주자보다 9살 어렸다. 육상산陸象山의 휘는 구연九延으로서 타고난 기품이 범상했으나 자랑하는 기색이 없었다. 육상산은 <논어>를 처음 읽을 때 지리멸멸함을 느끼다가 그 후 옛 책을 읽는 중에 사방과 상하가 우宇이고 고대부터 현재까지가 주宙라는 말에서 홀연히 깨달아 우주는 내 마음이고 내 마음은 곧 우주라고 말하게 됐다.

+ 먼저 대체大體를 확립한다
정호에 따르면 배우는 자는 먼저 인仁을 인식해야 하는데 인仁이란 경敬을 참되게誠 실현하면 만사가 그만이었다. 육상산의 학설도 바로 그런 의미이다. 육상산은 말하기를 "요전에 누가 내 학문을 비방하면서 말하기를 "먼저 대체大體를 확립한다."는 구절을 제외하면 아무 내용이 없다고 하자, 나는 "정말로 그렇다고 대꾸했다."고 하였다. 먼저 대체를 확립한다는 갓은 도道가 내 마음이요 내 마음이 곧 도道이며 도道 밖의 일이 없고 일 밖의 도道가 없음을 인식한다는 말이다. 육상산은 말하기를 "모든 사물은 마음 속에 빽빽하게 들어있다. 가득한 마음이 우주宇宙를 채우는 것이 리理이다. 또 육상산은 말하기를 "리理가 우주를 가득 채우고 있으니 '도道 밖의 일이 없고 일 밖의 도道가 없다는 말이다."라고 했다. 육상산은 말하기를 "도道는 현상세계天下에 충만해 있고 작은 틈도 없다. 사단四端을 비롯한 모든 선善은 신天이 부여한 것이니 인간이 억지로 꾸밀 필요가 없다. 다만, 인간은 스스로 병病이 있으므로 타자他의 상相과 격리된 것이다."라고 하였다. 인간의 마음은 원래 우주宇宙이지만 늘 편견이라는 병에 사로잡혀있으므로 그것을 모른다는 것이다. 맹자는 자기 마음을 다 발휘하여 그 성性을 알고 그 성性을 알면 신天을 안다고 했다. 육상산에 따르면 마음은 오직 하나 뿐이다. 나의 마음과 친구의 마음, 옛 성현의 마믐과 미래 성현의 마음은 모두 다같이 하나이다. 육성산은 말하기를 "도道는 우주을 채우고 있으니 숨거나 피할 곳이 없다. 신天의 도道는 음양이고, 현상세계地의 도는 강하고剛 부드러움柔이고, 인간의 도道는 인의仁義이다. 따라서 인의仁義는 인간의 본심本心이다. 우매하고 못난 자는 모자라서 물욕에 막혀 그 본심本心을 상실하고 똑똑하고 잘난 자는 지나쳐서 자기 소견에 막혀 그 본심本心을 상실한다."고 했다. 우주는 인간을 격리시킨 적이 없고 단지 인간이 스스로 우주를 격리시켰다. 따라서 학문을 통하여 마음의 편견을 제거하면 본심本心을 회복할 수 있다. 이것이 육상산의 포인트이다. 육상산은 말하기를 "이 리理가 우주간宇宙間에 존재함에는 무슨 장애가 있으리오. 내가 스스로 침몰하여 저절로 유치한 편견에 갇혀 부지불식간에 함정에 빠져드니 높고 먼 바닥高遠底을 더이상 알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제 그 함정으로부터 깨고 나오기 위해서는 그 그물 망을 끊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것이 학문의 목적이다. 수양의 목표는 자아의 해방이다. 자아의 해방이란 자기의 사심私心을 제거하는 수양을 통하여 우주 본심本心과의 간격을 없애는 것이다. 본심本心 안에는 모든 사물과 그 모든 원리, 즉 도道로 가득 차 있다. 육상산은 말하기를 "격물格物이란 본심本心을 연구하는 것이다. 복희가 천문과 지리를 연구한 것도 역시 이 본심本心에 전력한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격물格物은 말단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배우고 익히기위해서는 먼저 무엇을 익힐지 알아야한다. 본심本心을 아는 것이 대체大體를 확립하는 것이다. 이것이 육상산의 포인트이다. 육상산은 본심을 알고 나먼 육경六經은 주석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육상산은 말하기를 "인간은 아는 체하는 과오를 인식하고 편견의 병을 없앨 수 있다면 마음은 저절로 밝아지고 이 리理는 저절로 평평해坦져서 사물은 서로 부합한다."고 하였다. 자기의 소견에 치우치면 본심을 상실하게 된다는 것은 정호가 <정성서定性書>에서 밝혔듯이 마음은 이기심과 편견이 사라질 때 확연대공하여 사물이 도래할 때 순응한다는 말과 일치한다. 육상산은 불교를 비판하며 말하기를 "유교는 의義롭고 공公적이므로 세상을 경영하나經世 불교는 이기적利이고 사적私이므로 세상을 도피出世한다. 육상산은 유교와 불교의 차이점을 현상세계의 긍정과 부정에 두었다. 또 육상산은 자신의 학문과 주자의 학문을 구별지으면서 주자를 비판하기를 "쉽고 간단한 공부는 결국 오래가고 위대해지지만 지리支離한 학문은 마침내 흔들리고 몰락한다."고 하였다. 오늘 한 사물을 연구하고 내일 한 사물을 연구하는 주자 리학理學의 방법론은 지리하다. 이것이 육상산의 포인트이다. 반면에 주자와 리학자들은 '먼저 그 대체를 확립하는' 육상산 심학心學의 방법론은 공허하고 속빈 강정空疎일 뿐이라고 비판한다. 노자에 따르면 학문의 추구는 매일 덧붙이는 것이지만 도道의 추구는 매일 떨쳐내는 것이었다.

+ 양간楊簡
양간楊簡은 육상산의 제자로서 그의 학문을 발전시켰다. 양간은 <기역己易>에서 말하기를 "역易이란 자기自己일 뿐이고 타자가 아니다. 역易을 책으로만 여기고 자기로 여기지 않으면 잘못이다. 역易을 세계天地의 변화로만 여기고 자기의 변화로 여기지 않으면 잘못이다. 세계天地는 나의 세계天地요, 변화는 나의 변화이지 타자의 사물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사심私心은 분열하고 또 사심私心은 저절로 작아진다... ... 나는 혈기나 형체만 갖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나의 성吾性은 빛나고 밝히므로 사물이 아니고 또 나吾의 성性은 때에 구애받지 않고 흘러나오므로 질량量이 없다. 신天은 나의 성性속의 상象이고 현상세계地는 나의 성性속의 형形이다. 따라서 '신天은 상象을 이루고 현상세계地는 형形을 이룬다.'고 함은 모두 내가 이룬 것이며 혼연히 융합하여 내외內外가 없게되고 뚫려 통하여 차별이 없게되니 일획一劃으로 충분히 그 명백한 의미를 보게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우주간 모든 사물과 그 원칙은 모두 자기 마음의 표현이므로 모든 것이 자기 마음 속에 들어있다. 자기 마음의 성性은 시의적절하게 그 상象과 형形이 합일될 필요가 있다. 이것이 자기와 세계의 易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이것이 양간의 포인트이다. <중용中用>은 말하기를 "성性의 덕德은 내외內外가 합合하는 도道이므로 때時가 마땅하면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이 때란 이기심과 편견이 사라지면서 명각明覺이 이루어진 때를 말하는 것이겠다. 양간은 말하기를 "어느날 저녁, 나는 본심本心에 대하여 물었다. 육상산 선생은 그 날 있었던 논쟁의 시비是非를 따지면서 답하셨는데 나는 홀연히 이 마음이 맑게 비추는 것을 깨달았고 이 마음은 시작도 끝도 없고 비추지 않는 곳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하였다. 양간은 본심을 깨우친 자신의 경험을 그렇게 써 놓았던 것이다. 

8. 주륙이동朱陸異同

주자와 육상산의 차이점과 공통점을 살펴보자. 주자는 정이의 학설을 이어받아서 리학理學을 완성하였다. 반면에 육상산은 정호의 학설을 이어받아 심학心學을 완성하였다. 주자의 학學은 '성즉리性卽理' 라 할 수 있고 육상산의 학學은 '심즉리心卽理' 라 할 수 있다. 주자에 따르면 인간의 마음은 본체세계의 리理와 현상세계의 기氣가 합하여 생긴 구체적 사물이다. 현상세계의 인간 마음 속에는 본체세계의 리理가 초월되면서 생성된 성性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은 리理를 갖고 있으나 마음이 곧 리理는 아니다. 주자는 말하기를 "신天에 속한 것이 성性이고 인간에 속한 것이 마음心이다."라고 하였다. 즉, 주자는 두 세계을 인정한다. 성性의 본체인 리理는 신天에 속하고 마음의 성性은 현상세계의 인간에 속한다. 반면에 육상산은 하나의 세계만을 인정한다. 즉, 그 세계는 마음과 일체이다. 따라서 육상산은 우주는 곧 내 마음이고 내 마음은 곧 우주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럼, 육상산의 심즉리心卽理는 주자의 성즉리性卽理와 다른 것인가. 재미있게도 육상산이 말한 마음心은 주자가 말하는 마음心과 일치한다. 육상산은 말하기를 "사람은 목석木石이 아니니 어찌 마음心이 없을 수 있겠는가. 오관五官으로부터 나온 마음心은 가장 존귀하다. <홍범洪範>은 말하기를 '생각함이 예지이고 예지는 성인을 만든다.'고 했다. 맹자는 말하기를 '마음은 생각하는 기관이니 생각하면 얻고 생각하지 못하면 얻지 못한다.'고 했다... ... 사단四端은 곧 이 마음心이다. 신天이 나와 함께 하는 판所이 바로 마음心이다. 인간 모두가 이 마음心을 갖고 있고 모든 마음心은 이 리理가 구비되어 있으니 마음心은 곧 리心卽理이다."고 했다. 육상산에 따르면 목석은 마음을 갖고있지 않다. 인간의 마음은 생각하는 기능을 갖고있고 신天 또한 마음心을 인간과 공유하고 있다. 주자도 마음은 영적인 공간靈處이지 성性이 아니라고 했다. 또 주자는 인仁은 성性이고 측은은 정情인데, 성性과 정情은 마음心上에서 생길 수 밖에 없으므로 마음心은 성性과 정情을 통괄한다. 즉, 심통성정心統性情이라고 했다. 주자가 말하는 마음은 형이하적 성性과 情을 통괄하는 존재이다. 재미있게도 육상산은 사단四端은 곧 마음心이라고 했다. 즉 측은을 마음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주자는 측은을 마음의 정情으로 보았고 육상산은 측은을 마음으로 본 것이므로 차이가 없다. 즉, 육상산의 말하는 심즉리의 마음心은 주자가 주장한 형이하적 마음心의 설說과 일치한다. 육상산은 신의 리, 천리天理와 인욕人慾을 구별하려고 하지 않았다. 육상산은 말하기를 "신天은 곧 리理, 또 인간은 곧 욕慾으로 여긴다면 신天과 인간은 다른 것이 되고 만다."고 하였다. 즉 육상산은 본체세계와 현상세계를 구별하지 않았고 신과 인간을 다르지 않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것이 육상산의 포인트이다. 육상산은 말하기를 "형이상적 존재의 측면이 도道이고 형이하적 존재의 측면이 기器이다. 세계天地 또한 기器이다. 모든 사물이 생성되고 소멸하기까지에는 그 리理가 있다."고 하였다. 즉 육상산은 세계를 본체세계와 현상세계로 구별하지 않는다. 육상산은 말하기를 "<역易> 대전에 따르면 '형이상의 존재가 도道이다.'고 했고 '일음일양一陰一陽이 도道.'라고 했으니 음양도 이미 형이상적 존재인데 어찌 태극은 아니겠는가."라고 했다. 육상산은 음양을 형이상의 존재로 보았다. 정호는 "음양은 형이하의 존재인데 또 도道라고 했으니 음양만이 도道이므로 이것을 묵묵히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였다. 반면에 정이는 음양은 도道가 아니며 일음일양의 이유가 도道라고 했다. 이 두 설의 차이가 육상산과 주자의 차이였다. 육상산은 일음일양一陰一陽, 즉 하나에서 생성된 음과 양, 즉 구체적 사물들을 도道라고 보았다. 따라서 도道와 기器, 즉 형이상과 형이하의 분별을 승인하지 않았다. 반면에 주자는 일음일양이 도道가 아니라 양과 음이 생성되는 이유를 도道라고 보았다. 따라서 형이상과 형이하의 분별을 강조하면서 태극설로 환원한 것이다. 인식론상 모든 명사는 내포와 외연을 갖고있다. 외연은 구체적 사물로 객관화된 것이므로 문제의 소지가 없다. 그러나 내포의 경우 그 객관적 사물이 존재하는지의 여부에 따라 중세 때부터 논란이 되어왔다. 내포, 즉 보편의 문제는 유명론唯名論과 실재론實在論을 탄생시켰다. 인식론상, 주자의 리학은 실재론에 가깝고 육상산의 심학은 유명론에 가깝다. 주자에 따르면 마음心은 형이하의 존재이므로 구체적 개체가 있어야만 존재할 수 있다. 반면에 육상산에 따르면 마음心은 현상세계에서 신天과 인간이 공유하게 되므로 마음은 성性을 갖고있는 것이다. 재미있게도 불교에서도 마음을 성性으로 보기 때문에 마음을 벗길대로 벗겨내어 순수마음을 얻으려고 한다. 고자告子 또한 생긴 그대로가 성이라고生之謂性이라고 하여 마음을 형이상적 존재로 보았다. 주자는 육상산을 불교와 고자告子와 함께 비유하였는데 모두 추상적 마음을 성性으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육상산이 타계하자 주자는 제자들을 데리고 조문을 갔는데 상이 끝나고나서 얼마 후에 '애석하게도 고자告子가 죽었다.'고 하였다. 육상산은 주자와 대적하기 위하여 250년을 기다려야 했다. 후일 주자를 새롭게 대항한 인물은 왕양명이었다.






<참고문헌>

풍우란. 박성규 역. 중국철학사.  





2012년 6월 26일 화요일

9. 주돈이: 태극太極 장재: 태허太虛 정호: 심心 정이: 리理

1. 역사적 맥락에서 본 주돈이

<송사宋史>에 따르면 주돈이는 송宋나라 도주 영도 사람이다. 주돈이(1017-73)는 원래 이름이 돈실敦實이었으나 영종 임금의 옛 휘를 피해서 돈이로 개명했다. 외삼촌 덕으로 분녕 주부가 되었으나 병으로 인하여 남강군으로 옮겨갔고 송宋나라 신종神宗 희녕熙寧 6년 57세의 나이로 타계하였다. 일설에 의하면 주돈이는 인품이 매우 고매하여 성품이 초연하고 대담했다고 한다. 주돈이는 도학자道學者로서 <태극도太極圖>와 <통서通書>를 지어 신의 리天理 밝히고 모든 사물의 시작과 끝을 연구했다. 주돈이는 주렴계라고도 알려져 있다.

2. <태극도太極圖>

주돈이의 <태극도>는 하나의 상象으로서 형상形象을 통하여 리理를 표현한 것이다. 주돈이는 말하기를 "무극無極은 태극太極이다無極而太極. 태극太極은 운동하여 양陽을 낳고 운동이 극極에 달하여 정지하면 음陰을 낳는다. 정지가 극極에 달하면 다시 운동한다. 한번 운동하고 한번 정지하는 것이 각각의 근원이다. 양陽과 음陰으로 나누어지면서 양의兩義가 세워진다. 양陽이 변화하여 음陰에 합함으로써 수水, 화火, 목木, 금金, 토土, 즉 오행五行이 생성되고 5기氣가 순조롭게 펼쳐지며 사계절이 진행된다. 오행五行은 음양陰陽으로 통일되고 음양은 태극太極으로 통일되는데 태극太極의 본本은 무극無極이다. 오행五行은 각자 그 성性을 갖고 생성된다. 무극無極의 참됨과 음양 오행의 정수가 오묘하게 합하여 응축하면 하늘의 도乾道는 남성이 되고 땅의 도坤道는 여성이 되어 두 기氣가 서로 감응하여 모든 사물을 생성시킨다. 모든 사물은 끝없이 생성되고 무한히 변화한다. 인간은 그 가장 빼어난 영靈을 갖고 생성되므로 정신은 그 형상을 밝힐 수 있다. 오성五性의 감정은 운동하여 선과 악善惡을 나누면서 모든 일萬事을 시작한다. 성인聖人은 중정인의中正仁義를 정定하여 정지를 주主로하여 인극人極을 세운다. 따라서 성인과 세계天地는 그 덕德을 합하고 해와 달은 그 빛을 합하고 사계절은 그 질서와 합하고 귀신은 그 길흉과 합하므로 군자는 인극人極을 닦으므로 길하고 소인은 거스르기 때문에 흉하다. 따라서 신의 도天道로써 음과 양을 세우고 세계地의 도로써 강함剛과 부드러움柔을 세우고 인간의 도人道로써 인仁과 義를 세웠다고 했다. 또 흘러나온 것은 마침내 되돌아가니 생사生死를 아는 것이라고 했은즉 위대하다. <역易>이로구나. 여기에 지극한 이치가 있다."고 하였다. 인간은 모든사물萬物의 영장으로서 태극의 리理와 오행의 성性을 타고났다. 태극의 리理는 순수지선至善이기 때문에 따라서 인간의 성性은 선善하다. 주돈이의 태극설은 <역易>에 나오는 태극설과 조금 다르다. <역易>에 따르면 "역易에는 태극이 있고 태극이 양의兩義(음양)를 낳고 양의는 4상四象을 낳고 4상은 8궤를 낳으며 8괘가 길흉을 결정하고 길흉이 대업을 낳는다."고 하였다.


3. <통서通書>

주돈이가 지은 <통서通書>의 본래 이름은 <역통易通>으로서 <역易>을 논한 저작이다. 주돈이는 말하기를 "운동하므로 정지하지않고 정지하므로 운동하지않는 것이 사물物이다. 운동하지만 운동이 없고 정지하지만 정지가 없는 것이 정신神이다. 운동하지만 운동이 없고 정지하지만 정지가 없다는 것은 운동하지 않는다거나 정지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사물은 통하지 못하나 정신은 모든 사물을 신묘하게 통한다."고 하였다. 태극太極은 정신으로서 사물의 운동법칙과는 다른 차원으로 사물에 작용한다. 이것이 주돈이의 포인트이다. 주돈이는 말하기를 "음양의 두 기氣와 오행은 모든 사물을 생성시킨다. 다섯五은 둘二로 귀착하고 둘二의 근본은 하나一이다. 즉 모든 사물은 하나一이고 하나一의 실재는 모든 사물에 나누어졌다. 모든 사물과 하나一는 각기 정닫하고 대소大小가 정해졌다."고 하였다. 하나一란 태극으로서 또한 리理이다. 음양의 두 기氣와 오행은 기氣이다. 주돈이는 송명도학宋明道學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리理와 기氣의 개념을 도입하였고 주희는 리理와 기氣을 완성하였다. 주돈이는 말하기를 "성誠은 성인의 근본本이다. 위대하도다, 처음 하늘乾元이여. 모든 사물이 그로부터 시작되었다함은 성誠의 시원을 말한 것이다. 하늘 도乾道의 변화에 따라 모든 사물이 각기 본연의 성性을 따를 때 성誠이 실현된다. 이것이 순수지선純粹之善이다. 따라서 한번一 음陰이 되고 한번一 양陽이 되는 것이 도道이다. 도道를 승계한 것이 선善이고 도道로 이루어진 것이 성性이라고 했다. 원형元亨이란 성性이 관통한 것이고 이정利貞이란 성性이 드러난 것이다. 위대하도다, <역易>이여, 성性의 계시命가 여기에 있도다."라고 하였다. 도道는 태극의 다른 이름이다. 주돈이는 말하기를 "성인聖人은 무엇보다 무욕無慾을 원한다. 무욕하면 텅비어 정지한 채로, 바로 행동할 수 있다. 텅비어 정지해있다는 것은 빛이 들어왔다는 것이고 밝아지면 통하게 된다. 바로 행동하면 공정公하고 공정하면 널리퍼진다. 빛이 통하여 공정함이 널리 퍼지면 성인에 가깝다."라고 하였다. 성인의 도道는 사욕私慾이 없으므로 지극히 공정하다. 재미있게도 세계天地의 도道 또한 지극히 공정하다. 이것이 주돈이의 포인트이다.



4. 장재張載

<송사宋史>에 따르면 장재張載는 송宋나라 장안 사람이다. 장재(1020-1077)는 젊어서 병법의 논의를 좋아하였다. 장재는 <중용>을 읽어보았지만 만족하지 못하여 불교와 도가道家를 전전하였으나 역시 만족하지 못하여 다시 육경六經을 공부하였다. 장재는 정명도 정이천 형제와 함께 도학을 정립하고 이단의 학설을 폐기하였다. 장재는 <정몽正蒙>을 지었고 송宋나라 신종 희녕 10년인 1077년 타계하였다. 장재는 장횡거張橫渠라고도 알려져있다.

+ 태허太虛
장재에 따르면 태허太虛는 무형無形이고 기氣의 본체本體이다. 장재는 말히기를 "태허에 기氣가 모이고 흩어지는 것은 마치 물에 얼음이 생기고 녹는 것과 같다. 태허太虛가 바로 기氣임을 안다면 무無는 없다."라고 하였다. 허공이 사물이 없는 태허太虛같이 보이는 이유는 아직 기氣가 응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장재의 포인트이다. 장재는 말하기를 "한 사물이면서 양체兩體인 것이 기氣이다. 하나이므로 정신神이고 둘이므로 변화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태허太虛는 한 사물이고 태허太虛의 기氣에 따라 음양陰陽의 두 성性이 작용한다. 기氣에 따라서 두 성性이 서로 부딪히면서 응측하여 모든 사물이 변화한다. 장재는 말하기를 "기氣은 아득히 태허에 퍼져있다. 기氣는 오르내리고 드날리면서 잠시도 멈추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또 장재는 말히기를 "기氣가 모이면 눈으로 볼 수 있는 형체가 생기고 기氣가 흩어지면 눈으로 볼 수 없는 무형에 머문다."라고 하였다. 기氣가 모여서 모든 사물이 생성되므로 모든 사물은 기氣를 함유하고 있다. 기氣의 본체는 태허太虛이고 태허는 무형無形이다. 장재는 말하기를 "사물의 생성에 선후가 있는 것이 신의 질서天序이다. 작고 크고, 높고 낮은 것이 서로 어울려 상형相形을 이루는 것이 신의 질서天秩이다. 신天은 순서에 따라 사물을 생성하고 사물이 형形을 띄는 데는 질서가 있다."고 하였다. 또 장재는 말하기를 "세계天地의 기氣가 취산공취聚散攻取하는 것은 백가지로 다르지만 그 리理는 순조롭고 망령됨이 없다."고 하였다. 사물이 생성되고 완성되는 데는 신의 순서와 질서가 따르는데 이것이 리理이다. 사물은 질료이고 리理는 형상이다. 즉, 질료에 형상이 들어가면 사물이 생성되어 완성된 것이다. 장재는 말하기를 "기氣는 본래 허虛하여 심연의 바닥에는 그 형상이 없다. 기氣는 감동하여 생기고 모이면 상象을 이룬다. 상象이 있으먼 그 대립하는 것이 있고 그것은 반드시 상반된다. 상반되므로 원수가 생기고 원수는 반드시 화합하고 화해한다. 따라서 사랑과 증오의 감정은 똑같이 태허太虛로부터 나와서 결국 사물화物慾된다. 갑자기 생겨 홀연히 완성되고 털끝 만큼의 틈도 용납하지 않는 것이 정신神이다."라고 하였다. 기氣가 모여서 상象이 생기고 이 상象은 상반하는 물질과 합하여 완성되기를 기다린다. 즉 사랑과 증오의 감정이 생성되면 그 상반된 것, 즉 물질과 합하여 사랑과 증오는 사물화된다. 이것이 장재의 포인트이다. 장재는 말하기를 "조화造化에 의하여 사물화된 것들은 똑같은 것이 하나도 없다. 이로부터 사물화된 것들은 많지만 어느 한 사물도 음양이 없는 것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이로써 세계天地의 변화는 이단二端뿐임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기氣는 본래 음양의 성性, 즉 이단二端을 내포하고 있으므로 기氣가 모여서 생성되고 완성된 사물에는 음양陰陽이  없을 수 없다. 장재는 말하기를 "태허太虛에는 기氣가 없을 수 없다. 기氣가 모이면 사물이 되지 않을 수 없고 사물이 흩어지면 태허太虛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다. 이렇듯 나오고 들어가는 순환은 모두 필연적으로 그러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기氣가 모이면 사물화되고 기氣가 흩어지면 사물이 소멸한다. 이러한 쉼없는 순환은 세계의 보편현상이다.

+ 성性
장재는 말하기를 "인간의 호흡은 강함剛과 부드러움柔이 서로 마찰하는 것으로, 하늘乾과 땅坤이 닫히고 열리는 형상形象이다. 깨어있을 때는 그 형상形象이 열려서 외부와 교섭하고자 하고 꿈을 꿀 때는 그 형상形象이 닫혀서 기氣가 내부로 모인다. 깨어있는 때는 눈,귀 등의 인식능력으부터 새것이 나타나고 꿈에서는 기억習心의 인연緣으로부터 옛것이 나타난다."고 하였다. 또 장재는 말히기를 "태허太虛로부터 신天이라는 이름이 생겼고 기화氣化로부터 도道라는 이름이 생겼다. 허虛와 기氣를 합하여 성性이라는 이름이 생겼고 성性과 지각知覺이 합하여 마음心이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하였다. 아주 멋진 말이다. 장재는 말하기를 "형形이 있고 난 후에 기질氣質의 성性이 생겼으니, 그것이 잘 상반된 것이 세계天地의 성性이다. 따라서 기질氣質의 성性에 따라서 군자君子가 되는 것이다."고 하였다. 인간은 기氣가 모여 형形이 생기고 그 형形에는 성性이 새겨져있다. 그래서 기질지성氣質之性이다. 그 기질지성은 세계天地의 짝 상象을 갖고 있는데 그것이 세계지성天地之性이다. 장재에 따르면 신天과 도道가 합하여 성性을 생성시켰다. 신天는 태허太虛이고 도道는 기화氣化이다. 장재는 허虛와 기氣를 합한다는 말이 기氣와 기氣를 합한다는 말과 모순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장재는 말하기를 "신天으로부터 나온 성性은 도道가 통하여 이루어진 것이므로 희미하거나 밝은 기氣에 의해서 은폐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신天이라는 이름은 태허로부터 생겼다. 따라서 신天은 태허太虛이다. 태허는 기氣의 본체이므로 기氣의 밖에는 신天이 존재할 수 없다. 기氣의 상象과 형形은 기질지성氣質之性과 세계지성天地之性으로 이원화된다. 장재는 말하기를 "모양狀이 있는 것은 전부 유有이고 모든 유有는 전부 상象이다. 그리고 모든 상象은 전부 기氣이다. 기氣의 성性은 본래 허虛이고 정신神이니 정신神과 성性은 기氣에 붙어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기氣에는 그 성性이 있다. 기氣가 모여서 인간이 되므로 인간은 성性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장재의 포인트이다. 장재는 말하기를 "신의 성天性이 인간에 놓여있는 것은 마치 물의 성性이 얼음에 놓여있는 것과 같다. 얼고 녹는 것은 다르지만 똑같이 물이다."라고 하였다. 신의 성天性은 기氣의 성性이다. 장재는 말하기를 "신天의 능력良能은 본래 나의 양능인데, 다만 나에 의해서 상실되었을 뿐이다."고 하였다. 또 장재는 말하기를 "기氣는 본래本 하나됨을 즐기고湛一 공격하고 쟁취하는 것을 바란다. 입과 배는 음식을 바라고 코와 혀는 냄새와 맛을 바라는 것이 공취지성攻取之性이다. 덕德을 아는 자는 그것들을 누릴 따름이고 욕구 때문에 마음이 얽매이지 않으므로 작은 것 때문에 큰 것에 피해를 주거나 말단 때문에 근본을 상실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기氣가 모여 인간이 된다. 인간은 기氣의 성性을 갖고있다. 인간은 그 성性을 신天과 공유한다. 기질지성氣質之性과 천지지성天地之性이 바로 그렇다.

+ 신인합일天人合一
장재는 말하기를 "자기 마음을 확대大其心하면 현상세계의 사물과 일체體를 이룰 수 있다. 사물과 일체되지 않는 것은 마음이 일체되지 않은 것이다. 세상사람들의 마음은 좁은 견문에 갇혀있다. 그러나 성인은 성性을 다하여 견문에 갇혀있지 않으므로 현상세계의 모든 사물이 자기 아닌 것非我이 없다고 본다. 그래서 맹자는 마음을 다 발휘하면 성性을 알고 신天을 안다고 말했다. 신天은 무한無限하여 밖이 없으나 인간의 마음은 밖이 있으므로 신의 마음天心과 합일할 수 없다. 견문지지見聞之知는 사물과 접촉하여 얻은 지식이고 덕성을 통한 지식이 아니다. 덕성지지德性之知는 견문에서 싹트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성인聖人은 자기만을 아我로 여기지 않고 모든 사물을 자기로 여기므로 비아非我가 없다. 성인은 현상세계인 인간의 세계와 본체세계인 신의 세계 전체를 대아大我로 여긴다. 이런 경지에 이르면 인간과 신은 합하여 하나가 된다. 장재는 말하기를 "성性이란 모든 사물의 일원一源이므로 나의 사유물이 아니다. 오직 대인大人만이 그 도道를 발휘할 수 있다. 따라서 대인은 설 때는 반드시 남과 함께 서고, 알 때는 반드시 널리 같이 알고 사랑할 때는 반드시 모두를 사랑하므로 성취할 때 홀로 성취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성인은 현상세계에서 신인합일天人合一의 도道를 실천하면서 성인성性人性을 드러낸다. 장재는 말하기를 "성誠을 비추는 빛明에 의하여 알게된 지식은 신덕天德에 의한 양지良知로서 견문에 따른 사소한 지식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그럼, 성誠을 비추는 빛明이란 무엇인가. 장재는 말하기를 "신과 인간이 다르게 작용하면 성誠을 논할 수 없고 신과 인간이 다르게 인식하면 아직 다 빛나지 않은 것이다. 성誠을 비추는 빛明이란 성性과 신도天道에 조금의 차별도 없을 만큼 드러낸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성誠이란 신인합일天人合一이 현실화된 경지이고 명明은 그 기능이다. 장재는 말하기를 "하늘乾을 부친으로 땅地을 모친으로 둔 미미한 자식이 그 가운데 살고 있으니 세계天地의 터는 나의 몸體이고 세계天地의 지도자는 나의 성性이다."라고 했다. 세계天地 내內 존재인 인간은 세계天地性을 발견하면서 인간성人間性을 실현하게 된다는 것이다. 장재는 말하기를 "도리를 어기는 것이 패덕悖德이요. 인仁을 해치는 것이 도둑賊이다. 악惡을 행하는 자가 못난 자이고 형形을 실천하는 자는 세계天地를 닮는자肖子이다."라고 하였다.

+ 불교와 도교와 비판
장재에 따르면 불교는 무생無生을 추구하므로 윤회를 벗어나서 한 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으려고 한다. 그리고 도교는 장생長生을 추구하므로 삶을 좇아 존재에 집착하므로 변화를 거부한다. 반면에 도학道學은 기氣가 모여서 인간이 되고 기氣가 흩어지면 더 이상 인간이 아니되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굳이 무생無生을 추구하지 않으며, 죽음도 필연적인 것으므로 장생長牲을 추구하지 않는다. 살아서는 인간사에 충실하고 죽어서는 편안히 쉬는 것이 도학道學의 입장이다. 도학자들은 비록 불교와 도교의 영향을 받았지만 불교와 도교를 배척하고 유가儒家로 자처했다.



5. 정호程顥와 정이程?

<송사宋史>에 따르면 주돈이가 남안에서 아전 노릇을 할 때 통판군사인 정향程珦이 주돈이의 비상한 용모와 학식을 보고 사귀었고 자기 아들인 정호程顥와 정이程?를 그에게 보내어 공부시켰다. 주돈이는 늘 정호와 정이 형제에게 공자와 안자의 뜻을 좇게하였으니, 이것이 이정二程 학문의 원류가 되었다. 정호程顥(1032-1085)는 대대로 중산에 살았지만 나중에 개봉을 거쳐 다시 하나으로 이사했다. 정호는 성품이 뛰어나고 도道를 지녔고 온화하고 순수한 기풍이 몸에 베어 있었는데 15-16세 때부터 주돈이의 학문에 들어가 구도求道의 뜻을 품었다. 정호는 여러 학파의 책을 널리 읽으며 거의 10년 넘게 도교와 불교에 출입하다가 육경六經으로 돌아와 마침내 도道를 터득하였다. 정호는 정명도라고도 불린다. 정이(1033-1107)는 정호의 동생으로서 읽지 않은 책이 없었으며 육경六經에 통달하였고 성誠에 근본을 두었다. 정이는 <역易>과 <춘추春秋>에 대한 전傳을 지어 후세에 전했다. 정이는 정이천이라고도 불린다. 정호와 정이의 도학은 나중에 송명도학에서 리학理學과 심학心學으로 갈라져서 정주程朱파와 육왕陸王파로 나누어졌다. 동생인 정이, 즉 정이천은 주희 성리학의 선구가 되었다. 반면에 형인 정호, 정명도는 육상산과 왕양명 심리학의 선구가 되었다.

+ 리理
언급했다시피, 기氣의 개념을 확립한 학자는 장재였다. 정호와 정이 형제 즉, 이정二程은 리理의 개념을 확립했다. 이정二程은 말하기를 "신의 리天理라고 하는 저 도리는 무한함 만이 있을 뿐이다. 신의 리天理는 요堯임금 같은 선인 때문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걸傑임금 같은 악인 때문에 소멸하는 것도 아니다."고 하였다. 리理는 영원한 존재이고 그 양量의 증감이 없으므로 부족하지도 않고 넘치지도 않는다. 사람이 리理를 인식하거나 말거나 리理는 영원한 존재이다. 이정二程은 말하기를 "사람이 자신을 반성하지 않으면 신의 리天理는 소멸한다고 했거니와 신의 리天理는 온갖 이치를 구비하고 있고 원래 조금도 부족하지 않으므로 누구나 자신身을 반성하면 성誠이 실현된다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요堯임금이 발휘한 도道나 순舜임금이 발휘한 도道는 모두 하나의 리理에서 나온 것이므로 보편적 준칙이다. 그 보편적 리理는 모든 인간의 마음에 조금도 부족하지 않게 구비되어 있으므로 누구나 자신을 성찰하면 성誠이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이정二程은 말하기를 "'모든 사물이 나我로부터 나온 것이다.'라는 것은 인간 만이 그러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물이 그러한데, 모든 것은 리理에 따라 나오고 들어간다. 단 다른 사물은 리理를 이용推할 수 없지만 인간은 이용할 수 있다. 리理는 이용되더라도 조금도 증가하거나 감소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리理는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사물에 구비되어있지만 인간 만이 그 리理를 이용할 수 있다. 리理는 이용되더라도 줄거나 늘지않고 변하거나 동요하지 않는다. 이것이 적연부동이다. 이정二程은 말하기를 "리理는 현상세계天下에 있는 단 하나의 리理이므로 세상의 기준으로 이용된다. 세계天地와 삼왕三王에게 묻더라도 변하지 않는 것이 리理이다."라고 했다. 또 이정二程은 말하기를 "리理는 인仁으로 간주되어 오기도 했고 지知로 간주되어 오기도 했다."고 했다. 이정二程은 말하기를 "'리理는 고요하여 운동하지 않으므로 느낌感으로 통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신의 리天理가 구비되어 있어서 조금도 부족함이 없기 때문이다. 리理는 운동하지 않으므로 고요하다. 비록 운동하지 않지만 느낌으로 통하게 되면 그 느낌은 리理의 밖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이정二程은 말하기를 "사물이 있으면 반드시 법칙이 있다. 부친은 자애에 머물고 자식은 효에 머물고 임금은 인仁에 머물고 신하는 공경에 머무는 것이 그것이다. 모든 사물과 모든 일은 저마다 제자리가 있으니 저마다 제자리를 얻으면 편안하고 제자리를 잃으면 어그러진다. 성인은 모든 사물을 순리에 따라 다스리는 것이지 사물의 법칙을 새로 만드는 것이 아니니, 오직 각 사물이 제자리에 머물게 할 따름이다."고 하였다. 모든 사물은 당위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성인은 사물의 당위성을 찾아서 그에 따라 다스리면  모든 사물은 리理의 법칙에 따르게 된다는 것이다. 리理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플라톤에 따르면 구체적인 사물은 볼 수 있지만 사유할 수 없고 이데아는 사유할 수 있지만 볼 수 없다고 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사물을 질료와 형상으로 나누었다. 질료는 시공내에 존재하는 구체적 사물 또는 그 원질原質이고 형상은 시공을 초월하여 존재하므로 영원 불변하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술어로 하자면 리理는 형상이고 기氣는 질료이다. 이정二程은 말하기를 "소는 짐을 싣기위한 것이고 말은 사람이 타기위한 것이다. 이것은 그들의 그 성性 때문이다. 왜 소를 타지않고 말에게 짐을 싣지 않는가. 리理에 합당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나중에 보겠지만 정호程顥의 심학心學은 구체적 사물을 떠난 리理의 영원불변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심학心學과 리학理學
심학心學의 선구자인 정호程顥는 형이상자形而上者로서의 리理를 부정하면서 오직 자연自然적인 형이하자로서의 리理만을 인정하였다. 정호는 곽상郭象과 맥락을 같이 한다. 곽상에 따르면 대붕이 구만리를 날고 뱁새는 나무사이를 나는 것에 불과한 것은 어떤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자연적 신체조건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즉 곽상과 정호는 자연自然을 리理로 보았다. 이러한 관점은 나중에 심즉리心卽理이론으로 이어진다. 반면에 리학理學의 선구자인 정이는 형이상자로서의 리理를 인정한다. 정이는 왕필과 맥락을 같이 한다. 왕필에 따르면 모든 사물이 존재하는 것은 반드시 그 사물의 리理에 따른 결과이다. 따라서 모든 사물은 리理에 따라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정호와 정이는 송명도학을 창건했는데 그 도학의 양대파벌은 심학心學과 리학理學인 것이다.

+ 불교비판
정호程顥는 불교를 비판하면서 말하기를 "성인聖人은 공정한 마음에 전념하고 세계天地의 모든 사물萬物의 이치를 탐구하여 각 사물이 그 본분에 합당하도록 한다. 그러나 불교도는 자기의 사심私心에 전력하니 어찌 성인과 같겠는가. 성인의 순리는 평이하여 쉽게 나아가나 이단異端은 조작을 일삼아 크게 소모적이므로 자연自然이 아니다. 따라서 매우 잘못 되었다."고 하였다. 정이程? 또한 불교를 비판하면서 말하기를 "부처의 교설은 식견이 없다고 할 수 없고 오히려 심오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그 핵심은 자기이익自私自利을 벗어나지 못한다. 세계사이天地間에는 탄생이 있으면 죽음이 있고 즐거움이 있으면 슬픔이 있건만 불교는 간교와 거짓을 꾸며 생사윤회를 벗어나 번뇌를 없애고자한다. 그것은 결국 자기이익으로 귀결되는 것이다."고 하였다.

+ 형이상과 형이하
정호程顥는 형이상과 형이하의 구분을 중시하지 않았다. 정호程顥는 말하기를 "<계사繫辭>에 형이상의 존재가 도道이고 형이하의 존재는 기器라고했다. 또 신天의 도道로써 음양을, 땅地의 도로써 강함剛과 부드러움柔을, 인간의 도道로써 인仁과 義을 세웠다고 하였고 하나一가 음陰이 되고 하나一가 양陽이 되는 것 즉, 일음일양一陰一陽이 도道라고 하였다. 음양은 형이하의 존재이고 또 도道 또한 언급했으니 이야말로 상하上下를 뚜렷이 밝힌 것이다. 원래 음양만이 도道일 뿐이니 이것을 묵묵히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였다. 또 장재는 말하기를 "위의 신上天의 일은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으니 지극하다고 했다(중용). 신天의 본체體가 역易이요, 신天의 리理가 도道요, 신天의 기능이 정신神이요, 신天의 계시命가 성性이다. 그 성性에 따르는 것이 도道요, 도道를 실천하는 것이 교敎이다. 맹자는 그 중에 크게 발하는 기氣 즉, 호연지기浩然之氣가 있다고 했으니 가히 완벽하다. 맹자는 마치 정신神이 위에서 임하 듯 좌우에 서있는 듯 하다고 하면서 기적과 같은 일에 대하여 말하기를 "성誠이 은폐될 수 없는 것은 이와같은 것이다."라고 했던 것이다. 상하上下를 관통한다는 것은 이것을 넘지 않는다. 형이상形而上은 도道이고 형이하形而下는 기器라고 말해야 하지만 기器역시 도道이고 도道역시 기器이다. 도道의 존재를 얻기만 하면 지금과 나중, 자기와 타인에 얽매이지 않게된다."고 하였다. 정호는 도道가 리理인지 기氣인지, 헝이상학적 존재인지 형이하학적 존재인지 명확히 구별하지 않았다. 반면에 정이는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을 명확히 구별하였다. 정이는 말하기를 "일음일양一陰一陽이 도道라고 했으나 도道는 음양이 아니고 한번 음이되고 한번 양이 되는 판所이다."라고 하였다. 정이는 음양은 도道가 아니라고 못박으면서 음양은 도道의 판所에서만 드러나게 된다고 하였다. 정호가 이해한 도道는 구체적인 형이하적 도道이고 정이가 이해한 도道는 추상적인 형이상적 도道이겠다.

+기氣
정호는 기氣를 그다지 많이 언급하지 않았지만 정이는 모든 존재는 기화氣化에 따라서 사물화된다고 하였다. 정이는 말하기를 "운석隕石은 기氣로부터가 아니면 사물화種될 수 없고 기린 역시도 기화氣化되지 않으면 사물화될 수 없다. 태초에 사람이 생길 때도 이와 같았다. 바닷가의 모래사장이 드러나면 생기는 온갖 생물과 초목은 이전에 사물화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인류는 이미 생겼은즉 기화氣化에 의하여 태어나는 사람은 없다."고 하였다. 정이는 말하기를 "열리고 닫히며 오고가는 기氣의 현상이 호흡에 나타나는데 들숨이 반드시 날숨과 같다고 볼 수 없다. 기氣는 저절로 생기는 것이고 인간의 기氣도 진원眞元으로부터 생긴다. 신天의 기氣 또한 끊임없이 생기고 또 생긴다."고 하였다. 진원眞元 또한 기氣이다. 정이는 말하기를 "진원의 기는 기氣가 생기는 판所으로서 외기外氣와는 서로 섞이지 않지만 외기外氣에 의해서만 함양된다. 인간이 세계天地의 기氣속에 사는 것은 물고기가 물 속에 사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하였다. 인간이 세계天地의 기氣 속에 살면서 호흡하는 기氣가 외기外氣이다. 인간이 내쉬는 기氣는 들이마신 후에 생긴 기氣가 아니라 진원眞元으로부터 나온 기氣이다. 재미있게도, 정이는 진원眞元의 기氣의 속성에 대하여 명확히 말하지 않았다.

+ 성性
정호는 성性에 관하여 간략하게만 언급하였다. 정호는 말하기를 "신天이 스스로 그러한 것自然을 가리켜 신의 도天道라고 한다. 신天이 모든 사물에 부여한 것이 신의 계시天命이다."고 하였다. 정호는 말하기를 "하나一로부터 음陰이 나오고 하나一로부터 양陽이 나오는 것이 도道이니 스스로 그러한自然 도道이다. 도道를 이어받은 것이 선善이다. 선善은 도道에서 나온 것이므로 기능用이 있는데 원元은 선善의 으뜸이다. 도道에 이르는 것은 오직 성性 뿐이니 각각의 성명性命으로 바르게 한다."라고 하였다. 신天이 모든 사물에 부여한 것이 명命이다. 즉, 각 사물이 신申으로부터 부여받은 계시命가 성性이다. 따라서 명命과 성性은 관점에 따라서 나누어졌을 뿐 같은 개념이다. 이러한 각 사물의 성性, 명命은 신의 도天道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성性은 도가에서는 덕德이라고 하는데 덕德은 득得이라는 뜻이다. 정호는 말하기를 "타고난 것이 성性이라고 했는데 성性은 기氣이고 기氣는 성性이다. 이것이 생성生性이다. 생성된 인간의 기품氣稟은 선악이 있지만 성性 가운데 두 선악의 물질이 대립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어려서부터 선한 사람이 있고 악한 사람이 있으니 기품이 저절로 그러한 그러한 것이다. 선善은 물론 성性이지만 악惡 또한 성性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인간은 구체적 사물로서 성性을 타고난다. 이러한 생성은 도道에 따른 것으로서 인간은 또한 도道에 의하여소멸한다. 또 성性은 기氣이다. 이것이 정호의 포인트이다. 반면에 정이는 말하기를 "신의 계시天命는 형식義의 측면에서는 리理이고 인간의 측면에서는 성性이고 몸의 측면에서는 마음心이지만 실제로는 하나이다. 마음은 본래 선善하지만 일단 생각이 발현되면 선善도 있고 불선不善도 있다. 이미 발현된 것은 정情이지 마음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명命, 리理, 성性, 심心은 다 같은 말로서 신天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이것이 정이의 포인트이다. 성性은 가능성으로 있을 때 미발未發이라 불리고 성性이 현실화되었을 때 이발已發이라 불린다. 이발已發은 곧 정情이다. 주희는 장재張載의 심통성정心通性情 개념을 마음의 미발未發과 이발已發로 해석하였다.

+ 정호程顥의 수양법
정호에 따르면 인간은 실제로 세계의 모든 사물과 일체이지만 자신에 집착함으로써 나와 세계를 나누게 되었다. 정호는 말하기를 "학문하는 사람은 먼저 인仁을 인식해야한다. 인仁이란 사물과 혼연일체가 되는 것으로 의義, 예禮, 지智, 신信이 모두 인仁이다. 이 리理를 인식한다는 것은 경敬이 성誠으로 실현되는 것이므로 그것을 막거나 애써 찾을 필요가 없다... ... 맹자는 모든 사물이 내게 구비되어 있으니 자신을 돌아보아 성誠을 이루게 되는 것이 큰 즐거움이라고 했다. 성誠이 이루어지지 못하면 여전히 두 사물이 대립하게 되므로 자기가 타자와 합하려고 해도 이룰 수 없으니 어찌 즐겁겠는가. 장재張載의 <정완訂頑>은 이 본체에 대하여 풀이하고 있다. 바르게도 말고 잊어버리지도 말고 덧붙여 늘이지도 말고 추호의 억지도 부리지 않음으로써 이 본체의 도道가 실현된다. 이것이 실현되면 합일合一이 경지가 현실화된 것이다."라고 하였다. 세계의 모든 사물은 나와 일체임을 알기 위해서는 인仁의 인식이 필요하다. 이 인仁은 자기와 타자가 합일되는 것으로서 그 실현된 것이 성誠이다. 장재張載는 말하기를 "도道가 있고 리理가 있는 곳에서 신天과 인간은 통일一된다. 크게 피어나는 기운 즉, 호연지기浩然之氣는 나의 기氣이다. 그 기氣를 길러 해를 끼지지 않으면 온 세계天地에 퍼져나갈 것이다. 조금이라도 사심私心에 가려지면 꺼림직하여 기氣가 죽게 되는데 자신이 작아짐을 느끼기 때문이다. 사악하지 않게 생각하고 불경不敬하지 않게 나아간다면 어찌 합일合一을 못 이루겠는가."라고 하였다. 호연지기는 본체의 기氣이므로 이 기氣를 잘 길러야 신인합일天人合一에 도달한다. 이것이 정호의 포인트이다.

+ <정성서定性書>
<정성서定性書>는 정호程顥가 장재張載에게 보낸 답장편지이다. 정호는 편지에서 말하기를 "선생께서는 성性을 정定했더라도 운동하지 않을 수 없고 여전히 외부사물에 잡혀있다고 했는데 현명하게 생각하셨으니 제가 뭘 더 말하겠습니까. 그러나 저의 소견을 좀 더 덧붙일까 합니다. 이른바 정定이란 운동動도 정定이고 정지靜도 정定으로서 거부하거나 받들지도 않으면서 안밖內外의 구별이 없음을 말합니다. 만일 외부사물을 자신 밖의 존재로 여겨 억지로 그것과 부합하려한다면 이는 자기의 성性을 안밖으로 구분하는 것입니다. 또 성性이 외부사물을 좇아간다면 당연히 성性은 밖에 놓일 텐데, 안에는 무엇이 남아 있겠습니까. 이는 외부의 유혹을 끊으려고 해보지만 성性은 내외內外가 없다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성性을 내외의 두 본本으로 나누면서 어찌 정定을 논하겠습니까. 세계天地는 그 마음心으로써 모든 사물을 펼치지만 무심無心하고 성인은 정情으로써 모든 일을 처리하지만 무정無情하므로 군자는 준비하면서 대담하게 도래하는 사물에 순응하는 것을 먼저 배워야 합니다. <역易>에 따르면 정직하면 길하고 재앙이 없지만 마음이 왔다갔다하면 오직 현재 생각에먼 쏠리게 된다고 했으므로 외부 유혹의 제거에만 골몰하면 하나를 없애더라도 또 다른 하나가 생기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니 날마다 애써도 부족할 뿐이고 더우기 유혹의 씨는 무한하므로 제거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정情은 폐단이 있으므로 도道에 도달하지 못하고 이기심自心과 편견用智를 낳습니다. 이기심이 있으면 일의 목적에 따라 사물에 응할 수 없고 편견이 있으면 자연스럽게 깨달을 수 없으니 이제 외부사물이 악하다는 마음을 갖고서, 있지도 않은 사물을 비추려는 것은 거울을 돌려놓고 사물을 비추는 격입니다. <역易>에 따르면 등을 구부려 자기를 보지 못한 채로 정원을 거닐면 자신을 볼 수 없다고 했고 맹자에 따르면 편견智을 미워하는 이유는 큰 오점鑿을 남기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밖을 부정하고 안을 긍정하는 것보다는 안밖의 구별을 무시하는 것이 낫고 안밖이 무차별화 되면 저절로 문제가 없어집니다. 문제가 없어지면 정定하게 되고 정定하게 되면 빛明나게 되니 빛나게 되면 사물들을 응하는 데 무슨 장애가 있겠습니까. 성인의 기쁨은 기쁨에 해당하는 사물에서 오고, 분노는 분노에 해당하는 사물에서 오니 성인의 기쁨과 슬픔은 마음으로부터가 아니라 사물로부터 이어져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성인이 사물로부터 나오는 것에 불응하겠습니까. 또 어찌 밖을 따르는 것이 잘못이고 안에 있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 옳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이기심과 편견에서 나온 기쁨과 분노를 어찌 성인의 기쁨과 분노에 견주겠습니까. 인간의 정情 가운데 가장 쉽게 발동하고 제어하기 어려운 것이 분노입니다. 그러나 분노할 때 그 분노를 잊고 그 리理의 시비是非를 관찰할 수 있게되면 외부의 유혹은 미워할 것이 못됨을 알 것이므로 도道의 과반은 깨달은 것일 겁니다."라고 하였다. 정定이란 마음의 안밖內外를 무차별화하는 것이다. 마음을 정定하라는 것은 마치 거울처럼 모든 사물을 비추지만 거울 자체는 동요함이 없는 경우와 같다. 인간의 마음이 세계天地의 마음과 합하면 내외의 구별이 없어지므로 주관과 객관의 구별도 사라지게 된다. 장자에 따르면 지인至人이 마음쓰기用心는 거울과 같아서 거절도 환영도 않고 응대하면서 담아두지 않기에 사물을 제압할 뿐 상처받지 않는다고 하였다. 또 정이에 따르면 군자는 사물을 부리지만 소인은 사물에 부림당한다고 하면서 분노하거나 기뻐할만한 일을 발견하고 그것에 빠져드는 것은 고역이므로 성인의 마음은 고요한 물과 같다고 하였다. 성인은 정감으로 모든 사물에 응하여 기쁨과 분노를 나타내지만 그 기쁨과 분노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물에서 나오는 것이다. 성인이 이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이기심과 편견이 없기 때문이다. 이기심이 없으면 준비된 채로 공정하게 되고 편견이 없으면 사물이 도래할 때 순응할 수 있게 된다. 즉, 마음은 고요하지만 항상 빛나고 빛나면서도 항상 고요하게 된다. 수양을 통하여 사물과 일체가 되면 그것이 최고경지로서 인간의 성性은 진성盡性이 된다. 정호는 말하기를 "리理를 바라보며 성性을 다함으로써 명命에 이른다. 이 세가지는 한꺼번에 이루어지는 것이니 원래 순서가 없다."고 하였다. 이것이 인仁이고 인仁이 실현된 것이 성誠이다.

+ 정이의 수양법
정이는 경敬을 통하여 리理를 찾을 것을 특히 강조하였다. 정이는 말하기를 "경敬을 써서 함양해야 하니 배움의 진보는 앎知에 달려있다."고 하였다. 경敬이란 마음을 바로 잡는 것이다. 정이는 말하기를 "안內을 바로잡음으로써 경敬하면 마음의 주인은 비어虛 있게 되고 저절로 부정한 마음이 없어지니 어찌 비우虛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반드시 정진하되 경敬을 바탕으로 도모해야한다. 이 도道는 가장 간단하고 가장 쉽고 게다가 공부를 덜 수 있다."고 하였다. 경건敬하면 마음이 비게 되는데 마음이 꽉 찯다고도 말할 수 있다. 정이의 스승인 주돈이는 정靜를 강조하였고 정호는 정定을 강조하였는데 경敬은 정靜과 정定 모두와 다르다. 정호의 정定은 동動과 정靜을 모두 통괄한 개념이었다. 정이는 수양법에 관하여 말하기를 "정심正心과 성의誠意를 가장 먼저 해야한다. 성의성誠意는 치지致知에 달려있고 치지致知는 격물格物에 달려있다. 격格은 이른다至는 뜻이다. 예컨대 조상신이 와서 이른다祖考來格는 격格과 같다. 사물은 저마다 그 리理가 있으니 그 리理를 연구하여 밝혀야 한다. 리理를 연구하는 데는 여러가지가 있다. 책을 읽어서 리理의 형식義을 밝히거나 고금의 인물을 논하여 잘잘못을 따지거나 일상사에 합당하게 대처하는 일 등이 모두 리理를 연구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럼, 격물格物은 모든 사물을 연구해야 하는가 아니면 한 사물만을 연구하여 리理에 관통하는가. 정이는 말하기를 "어찌 한 사물을 격格하여 모든 리理를 알겠는가. 한 사물을 격格하여 온갖 리理에 통달한다는 것은 비록 안자顔子의 경우라도 감히 이 도道와 같지 않을 것이다. 오늘 한 가지 격格하고 내일 또 한 가지 격格하여 습관이 오래 누적된 후에라야 저절로 관통하는 공간이 생길 것이다."라고 하였다. 격물格物은 사물의 리理를 알게 한다. 정이는 말하기를 "실리實理란 실제로 바른 것是을 알아 보게됨으로써 실제로 그른 것非을 본 것이다. 무릇 마음으로부터 실리實理를 얻으면 저절로 판단別이 선다. 귀로 듣고 입으로 말하는 것은 마음이 실제로 보지 못한 것이다. 만약 봐서 알았다면 불편한 것에 안주하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 물과 불을 밟으면 사람은 모두 피하게 되는데 이것이 실제로 봐서 아는 것이다. 만약 불선不善을 마치 끓는 물 만지듯 피하는 마음가짐이라면 저절로 판단別이 설 것이다. 일찌기 호랑이에 물려 본 적이 있는 사람은 보통사람들과는 다르게 정신과 낯빛이 전율하며 참으로至誠으로 두려워하는데 이것이 실제로 알아보는 것實見得이다."라고 했다. 격물치지는 사물의 리理를 실제로 봄으로써 완성된다. 즉 격물의 목적은 실리實理 즉 실재를 보는 것이다. 이것이 정이의 포인트이다. 정이에 따르면 누구나 물과 불을 밟지 않으려고 하고 부자附子는 먹지 않으려는 것이 바른 앎을 실천하는 것이다. 사람이 선하지 않은 것不善은 오직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정이의 지행합일설知行合一設이다. 격물이 오래되면 저절로 관통하는 경지에 이를 수 있는 이유는 인간의 마음에 본래부터 리理가 구비되어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궁리窮理란 사물의 리理 뿐만아니라 마음의 리理를 연구하는 것이다. 정이는 말하기를 "사물物과 나我의 통일이 리理이다. 저쪽이 밝혀지면 곧 이쪽도 밝아지는 내외합일內外合一의 도道인 것이다."라고 했다. 사물에 대한 궁리가 극에 달하면 자기 마음을 저절로 알게 되는데 그 마음은 곧 세계天地의 마음이다. 정이는 말하기를 "한 인간의 마음이 세계天地의 마음이고 한 사물이 리理가 모든 사물의 리理이며 하루의 운행이 곧 한 해의 운행이다."라고 했다. 재미있게도 인간은 한 사물의 리理를 깨달음으로써 세계天地의 마음을 알 수 있게된다. 정이는 말하기를 "리理를 연구한 것과 성性을 다한 것과 명命에 이른 것은 다 같은 일이다. 리理를 연구해냈으면 성性을 다한 것이고 성性을 다 발휘했으면 명命에 이른 것이다."라고 하였다.

+ 심학心學과 리학理學
정호, 즉 정명도의 심학과 정이, 즉 정이천의 리학은 큰 차이가 없다고 보겠다. 정호의 심학은 경敬을 통하여 마음의 리理를 인식할 것을 강조한다. 이것이 성誠이다. 성誠이란 마음과 사물이 통일하여 인仁이 현실화 된 것이다. 이것이 후대 심학心學 일파가 강조한 대체大體를 확립한다는 의미이다. 정이의 리학理學은 한 사물의 리理를 연구하여 즉, 격물格物하여 세계天地의 마음理을 저절로 알게致知되는 지행합일知行合一을 강조한다. 후대의 주자는 정이의 리학理學을 더욱 발전시켰다. 후대의 육상산과 왕양명은 정호의 심학心學을 더욱 발전시겼다.





<참고문헌>

평유란. 중국철학사.




2012년 6월 24일 일요일

8. 현장: 유식唯識, 제법실성諸法實性, 진여眞如. 법장: 금사자金師子, 체용體用

1. 억사적 맥락에서 본 현장玄裝

현장玄奬은 수나라 말엽에 태어났다. 현장玄裝(600-664)의 속성은 진陳이고 현재 하남성 뤄양 부근의 구씨 사람으로서 13세 때 출가하였다. 현장은 26세 때인 당나라 태종 정관貞觀 3년 인도로 불법을 구하러 떠났다. 현장은 인도에서 16년간 세친(바수만두)과 호법의 불학을 배우고 중국으로 돌아와 <성유식론成唯識論>을 저술하였다. 현장의 사상은 중국적 경향이 가장 적다. 현장은 당나라 고종 원년인 664년 타계하였다.


2. 유식교唯識敎

유식교에 따르면 모든 중생은 아집我執과 법집法執, 두 집착이 있다. 아집은 자기자신을 실유實有로 집착하는 것이고 법집은 여러 사물을 실유實有로 집착하는 것이다. 유식교는 아집과 법집을 깨뜨려 아공我空과 법공法空을 밝히는 것이다. 아我와 法은 자성自性이 없으므로 거짓된 현상이다. 식識이란 마음의 식별 작용을 말한다. 규기窺基는 유식교에 관하여 정의내리기를 "내면의 식識은 그 체성體性이 무無가 아니고, 마음 밖의 아我와 법法은 그 체성體性이 유有가 아니다. 식識은 마음의 경계를 벗어난 외부 대상이 실유實有를 갖고있다는 증집增執의 교설을 배제하고 또한, 마음의 식識을 무無로 간주하여 공空에 집착하는 감집減執도 배제하므로 유有와 공空을 모두 떠나서 오직 식識만이 있다는 가르침이다. 마음 밖의 현상法이 존재한다고 보면 생사生死가 윤회한다. 그러나 한 마음一心을 깨달으면 생사生死는 영원히 폐기된다."고 하였다. 마음 밖의 세계를 인정하는 유有와 마음의 식識 또한 없다는 공空을 모두 떠나서 오직 식識만을 인정하는 것이 유식교의 포인트이다. 그러나 식識 역시 의타기依他起라는 것을 유념해두자.


3. 식識의 사분四分

현장은 <성유식론>에서 말하기를 "번뇌하는 식識 자체가 생길 때는 능연能緣과 소연所緣이 서로 나타난다. 현상法에 응하는 상相은 인식능력에 따른 것이다. 소연所緣에 의한 상相이 상분相分이고 능연能緣에 의한 상相이 견분見分이다. 상相과 견見은 그 자체自體에 의존하는 데 그것이 자증분自證分이다. 이 자증분이 없으면 마음과 마음이 만들어내는 현상을 기억할 수 없다. 더 나아가 증자증분證自證分이 없으면 자증분을 기억할 수 없다."고 하였다. 번뇌가 생길 때 그 번뇌를 식별하는 인식주체인 능연의 견분과 인식대상인 소연의 상분이 구별된다. 이 견분과 상분의 구별은 자증분의 식識에 따른 결과이다. 또 이 자증분은 증자증분의 식識에 따른 결과이다. 식識은 견분見分과 상분相分으로 이분二分하면서 자아현상我法이 설치된다. 이 현상은 거짓된 현상이다. 현장은 말하기를 "자아현상我法의 상相은 내부의 식識에 존재하나 분별分別에 의하여 외부 세계로 현현하는 것이다. 존재有하는 모든 사물의 유類는 아주 먼 옛날부터 자아현상我法에 이끌려 실아實我와 實法에 집착한다. 이것은 마치 꿈꾸는 자가 꿈의 영향력 때문에 마음 밖의 외부세계에 온갖 상相을 현현시키면서 그 대상들을 실유實有로 집착하는 경우와 같다. 어리석은 자가 파악한 실유實有와 실법實法은 존재하지 않고(無所有) 그저 허망한 정情에 따라 설치된 것이므로 거짓이다. 내부의 식識이 사아似我와 사법似法으로 변하여 터잡아 존재하지만 진정한 자아현상實我法의 성性은 아닌 것이다. 외부 세계는 정情에 따라 설치施設된 것이므로 식識과 같은 존재有가 아니다. 또 내부의 식識은 반드시 인연因緣으로 생기므로 무無의 경지가아니다."라고 하였다. 현장에 따르면 마음의 식識은 유일한 존재有이다. 그리고 마음을 벗어난 외부세계와 그 현상은 모두 비존재無이다.

+ 아뢰야식識
식識이 처음으로 변하면 제 8아뢰야식識이 된다. 아뢰야식識은 마음의 유정有情이 자기 자아我에로 집착하는 것이다. 아뢰야식識은 모든 현상法의 종자種子를 꽉 붇잡고 있다. 이 종자는 유루有漏와 무루無漏로 나누어진다. 현장은 말하기를 "모든 유정有情은 믿음에 따라서 나오는 것이지 원래부터 있던 것이 아니다. 따라서 무루종無漏種은 훈습熏習에 따라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현상法하는 것이다. 나중에 그 번뇌가 믿음에 따라 생성된 것임을 깨달으면서 열정에 대한 이해熏令가 증가해 나간다. 무루현상無漏法이 일어났던 것은 이러한 원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무루無漏가 일어날 때는 열정熏이 다시 일어나 개별적種이 되어가는 것이다. 유루有漏의 개별적 현상法種도 이와 마찬가지이다."라고 하였다. 훈습熏習에는 훈습하는 것인 능훈能熏과 훈습받은 것인 소훈所熏이 있다. 제 8아뢰야識에 의한 모든 개별적 현상法種는 제 7식識이 훈습되어 자란 것이다. 따라서 제 8아뢰야식識은 소훈所熏이 되고 제 7식은 능훈能熏이 되는 것이다. 현장은 말하기를 "능훈식識은 생성시키는 의식이고 소훈식識은 능훈에 따라 생성된 의식이다. 이것이 훈습熏習의 의미이다. 소훈 속에 있는 종種을 생성시키는 것은 마치 삼이 꽃에 의하여 생성되는 것과 같다. 이러한 생성이 훈습이다. 능훈식이 개별 종種에 붙어서 생성할 때 이미 그 원인에 따라 종種을 이룬 것이다. 세 현상三法이 일어난 때는 원인과 결과因果가 같은 때를 맞난 것이다. 이것은 마치 양초의 심지가 불꽃을 생성시키고 불꽃은 심지를 그을리는 것과 같다. 따라서 원인과 결과因果가 서로 함께 때를 만나는 것은 확고부동한 이치이다."라고 하였다. 유루종有漏種은 유루현상有漏法을 일으키고 유루현상法은 다시 유루種을 생성한다. 또한 무루종無漏種은 무루현상無漏法을 일으키고 무루현상法은 다시 무루종種을 생성한다. 유루종有漏種은 인간의 생사生死를 윤회하게 만들고 무루종種은 인간의 생사를 영원히 벗어나게 한다. 재미있게도, 무루종無漏種은 모든 인간이 다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불성佛性이 있는 인간이 따로 있다. 한편 우리가 보는 외부대상은 아뢰야식識 속의 종種이 생성되면서 인식된 것이다. 현장은 말하기를 "공간處이란 아뢰야식識 속의 공상종共相種이 성숙함에 따라서 색色이 시간器世에 따라 자신의 대상을 외부의 대종大種에 만들어가는 것이다. 유정有情이 변하여 개별적 대상을 이루지만 그 공간이 다르지 않은 것은 마치 여러 등불은 각기 다른 공간에서 비추지만 그 불은 하나의 공간에 있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아뢰야식識의 공상종共相種은 외부세계로 나아가 생성된다. 각 종種의 유정有情은 아뢰야식識을 통하여 외부세계에서 생성되어 사물화된다는 것이다. 등불은 여러 공간을 비추므로 각 공간의 불은 유사해보이지만 그 등불은 사실 하나의 공간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현장의 포인트이다. 현장은 말하기를 "근신根身이란 아뢰야식識의 불공상종不共相種이 성숙함에 따라 색근色根과 근의처根衣處, 즉 내부의 대종大種과 제작된 사물色로 변하는 것을 말한다. 또 아뢰야식識의 공상종共相種은 성숙함에 따라 타신처他身處로부터도 그렇게 변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타자가 의도하는 바를 인식할 수 없을 것이다. 의도義가 있다는 것은 근根이 변했다는 것과 같다. <변중변辯中邊>에 따르면 자기와 타자의 오근五根이 나타난 것은 아뢰야식識의 의도가 의처依處로 변한 것과 같다. 의도는 오직 의처依處로만 바뀐다는 주장은 타근他根은 내게 아무런 작용도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반면에 자기와 타자의 오근五根이 나타난 것은 자기와 타자의 식識이 스스로 의도를 바꾼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 말은 타지他地에서의 열반이란 자기가 타자의 주검을 마주 보면서 타자를 이어나가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규기의 <술기>에 따르면 몸身은 감각기관을 갖고있다. 그것이 근신根身이다. 눈, 귀, 코, 혀, 피부, 즉 오근과 그 감각주체依處는 모두 아뢰야식識 속의 불공상종不共相種이 변한 것이다. 또 타자의 오근과 의처는 자기의 아뢰야식識 속의 공상종共相種이 변한 것이다. 따라서 자기는 타자의 주체依處를 감각할 수 있는 것이다. 열반에 든 사람의 남긴 시체가 없다면 그것은 식識이 변했다는 뜻이다. 자기의 아뢰야식識 속의 불공상종不共相種이 변하여 감각기관과 그 감각주체依處가 생성되고, 아뢰야식識 속의 공상종共相種이 변하여 타자의 감각기관과 그 감각주체依處가 생성되는 것이다. 현장에 따르면 아뢰야식識은 태초부터 생성소멸하면서 연속하지만 영속하지는 않고 그렇다고 단절되지도 않으면서 유정有情을 표류시키거나 익사시키면서 윤회를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 현장은 말하기를 "아뢰야식識의 성性은 끊임없이 찰나찰나 결과가 생기면서 원인이 소멸하는 것이다. 결과는 계속 생겨남으로 단절이 안되고 원인은 단절하므로 영속하지 않는다. 단절하지도 영속하지도 않는 것이 연기緣起의 리理이다. 따라서 아뢰야식識은 늘 항상 강물처럼 흐르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우리가 타자를 인식하는 것은 우리의 아뢰야식識 속의 공상종共相種이 타자의 감각기관과 감각주체를 생성하기 때문이다. 아뢰야식識은 강물처럼 흘러가므로 유정有情을 표류시키고 익사시키기도 하면서 생사生死를 윤회한다. 이것이 현장의 포인트이다. 

+ 말나식識
현장에 따르면 처음 아뢰야식識 다음으로 제 7말나식識이 있다. 말나식識은 항상 살피고 헤아리는思量 역할을 한다. 현장은 말하기를 "말나식識은 장식藏識에 연緣하여 네가지 근본 번뇌에 조응한다. 그 근본 번뇌煩惱란 아치我癡, 아견娥見, 아만我慢, 아애我愛를 말한다. 아치는 무명無明을 뜻하는 것으로서 아상我相으로부터 나온 어리석음 때문에 무아無我의 이치를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아견我見은 아집我執을 뜻하는 것으로서 비아非我가 현상하는 것을 고집스럽게 자아로 삼는 것이다. 아만我慢은 오만傲慢을 뜻하는 것으로서 자아에 집착하여 기고만장하는 것이다. 아애我愛는 아탐我貪을 뜻하는 것으로서 집착한 자아에 대하여 애착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 네가지는 항상 일어나 마음을 동요하고 혼탁시키며 외부로의 전식轉識을 항상 난잡하게 오염시킨다. 따라서 유정有情은 생사를 윤회하면서 벗어날 수 없는 까닭에 번뇌라고 이름하였다."고 하였다. 인간은 말나식識으로 인하여 번뇌하게 된다. 번뇌란 무아無我를 깨닫지 못하여 자아를 세우는 것이다. 자아를 고집하는 아치, 아견, 아만, 아애 등 번뇌는 모두 비아非我이다.

+ 전 6식前 6識
현장에 따르면 전 6식識은 여섯 종류인데 6근根과 6경境에 따라 나누어 진다. 전 6식前 6識은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이다. 전6 식識은 대상을 식별하는 역할을 한다. 현장은 말하기를 "부처에 따르면 5식識이 근본식根本識에 의지하면서, 연緣에 따라서 일어나는 것은 마치 파도가 물로부터 일어나는 것처럼 서로 의지하기도 하고 의지하지 않기도 하는 것과 같다. 반면에 의식意識은 항상 일어난다. 단, 무상천無想天에서 태어날 때, 이정二定, 즉 무상정無想定과 멸진정滅盡定을 얻었을 때, 잠잘 때, 기절한 때는 제외된다."고 하였다. 여기서 근본식이란 아뢰야식을 말한다. 전 6식識, 즉 5식識과 의식識은 모두 근본식識인 아뢰야식識으로부터 일어난다. 제 8아뢰야식識과 제 7말나식識은 항상 일어나지만 제 6식識인 의식識은 잠잘 때, 기절한 때, 멸진정을 얻은 때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리고 다섯 감각기관에 따른 5식識은 여러 연緣에 따라서 일어난다. 이 여덟가지 식識이 바로 8식識이다. 현장은 말하기를 "제 8의 식識을 마음心이라고 한 것은 마음은 모든 현상 종자法種을 모아서 그 모든 현상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제 7의 식識을 의意이라고 한 것은 의意는 장식藏識에 연緣하여 자아를 항상 생각하기思量 때문이다. 나머지 6가지를 식識이라고 한 것은 식識은 6가지 외부 대상을 식별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심心, 의意, 식識은 변하면서 자아我와 현상法으로 전환된다. 의意의 말나식과 식識의 전6 식識은 사아似我와 사법似法을 실유實有라고 붙잡게 된다. 이것이 아집我執이고 법집法執이다.

+ 아집我執
아집我執이란 자기 자아를 실유實有라고 고집하는 것이다. 현장은 말하기를 "모든 아집我執은 선천적인 것과 후천적인 것, 두 가지가 있다. 선천적인 아집은 원래부터 허망虛妄이 훈습한 내부원인 때문에 항상 신체와 함께 한다. 잘못된 가르침이나 후천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저절로 나오는 것이므로 선천적이다. 아집에는 두 가지가 있다. 먼저, 항상 그 상相이 계속되는 것으로서 제 8식識에 연緣하여 제 7식識이 스스로 심상心相을 일으키면서 그 심상을 실아實我라고 붙잡는 것이다. 다음, 두 유有 사이가 끊어진 것으로서, 제 5식識에 연緣하여 제 6식識이 총제적으로 또는 개별적으로 심상心相을 일으키면서 그 심상을 실아實我라고 붙잡는 것이다. 이 두 아집我執은 미세하므로 끊기 어렵다. 나중에 도道를 닦아 수없이 익힘으로써 생공관生空觀을 터득해야만 없앨 수 있다. 후천에 의한 아집我執은 현재의 외부 연緣에 따라서 나오므로 신체와 함께 하지 않는다. 잘못된 가르침과 잘못된 후천에 의하여 나타나므로 후천적이다. 후천적 아집我執은 오직 제 6식識인 의식意識의 유有이다."라고 하였다. 생공관生空觀이란 자아我가 공空임을 통찰하는 관법觀法이다. 이 생공관을 통하여 제 7식識과 제 6식識이 만들어내는 심상心相들이 바로 비아非我임을 터득하게 된다.

+ 법집法執
법집法執이란 모든 사물의 현상을 실유實有라고 고집하는 것이다. 현장은 말하기를 "모든 법집法執은 선천적인 것과 후천적인 것, 두 가지가 있다. 선천적인 법집은 원래부터 허망虛妄이 훈습한 내부원인 때문에 항상 신체와 함께 한다. 잘못된 가르침이나 후천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저절로 나오는 것이므로 선천적이다. 법집法執에는 두 가지가 있다. 먼저, 항상 그 상相이 계속되는 것으로서 제 8식識에 연하여 제 7식識이 스스로 심상心相을 일으키면서 그 심상을 실법實法이라고 붙잡는 것이다. 다음, 두 유有 사이가 끊어진 것으로서, 제 5식識에 연緣하여 제 6식識이 총체적으로 또는 개별적으로 심상心相을 일으키면서 그 심상을 실법實法이라고 붙잡는 것이다. 이 두 법집法執은 미세하므로 끊기 어렵다. 나중에 십지十地를 통하여 수 없이 익혀 법공관法空觀을 터특해야만 없앨 수 있다. 후천에 의한 법집法執은 현재의 외부 연緣에 따라서 나오므로 신체와 함께 하지 않는다. 잘못된 가르침과 잘못된 후천에 의하여 나타나므로 후천적이다. 후천적 법집法執은 오직 제 6식識인 의식意識의 유有이다."라고 하였다. 법공관法空觀이란 모든 현상法이 공空임을 통찰하는 관법觀法이다. 이 법공관을 통하여 제 7식識과 제 6식識이 만들어내는 심상心相들이 비법非法임을 알게된다. 현장은 말하기를 "심心, 의意, 식識의 여덟가지 종種은 속제에 따르면 그 추구하는 상相들이 다르지만 진제에 따르면 그 추구하는 대상相들이 같다. 왜나하면 그 추구하는 대상相들은 무無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제 8식識부터 시작하여 제 7말나식識, 제 6의식識과 나머지 다섯 감각의 5식識의 각 속성은 결국에 무無로 통일되게 되어있다. 이것이 현장의 포인트이다. 


4. 일체유식一切唯識

현장에 따르면 아집과 법집은 실제로 존재하는 실유實有가 아니다. 따라서 그 사실을 깨달아야 고통과 번뇌로부터 탈존한다. 현장은 말하기를 "심心, 의意, 식識 세가지 능변의 식識과 마음판心所은 견분見分과 상분相分으로 변한다. 이것을 전변轉變이라고 한다. 견분으로 변한 판을 분별分別이라고 하는데 능히 대상相을 포착取하기 때문이다. 상분相分으로 변한 판을 소분별所分別이라고 하는데 견분에 의하여 포착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리正理에 따른다면 실아법實我法은 식識없이 마음판所이 변한 것은 모두 비유非有이다. 포착하는 이가 없으면 포착되는 사물도 없다. 존재하지 않음非有에도 사물이 실재實物한다면 대상相이 나뉘어진 것이다. 따라서 모든 유위와 무위의 것은 실재이든 거짓이든 모두 식識을 떠나서 존재하지 않는다. 유식唯識이란 오직 식識으로만 실물實物이 존재하게 되므로 식識은 마음판에서의 현상法이 아니다. 또는 식識의 전변轉變이란 여러 내부의 식識이 외부세계에서 사이비 자아와 현상似我法의 상相으로 변한 것이다. 이 전변이 주체는 분별分別이다. 그 자성自性은 허망분별虛妄分別인데 삼계三界의 마음心과 마음판心所이 그렇다. 세계를 붙잡는 이 마음판이 분별판所分別이다. 즉 이 분별판은 실아법實我法의 성性을 망령되게 붙잡는다. 이러한 분별로부터 외부세계는 거짓 자아와 현상假我法의 상相으로 전변된다. 저 분별판所分別의 성性은 결정적으로 무無이다. 따라서 모든 경우에 식識만이 유有이다. 허망분별은 최종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유有이다. 유唯는 식識없이는 현상法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진공眞空의 성性은 유有이다."라고 하였다. 증감增減의 양 극단을 벗어나서 유식唯識의 의미가 이루어지면 중도中道에 부합한다."고 하였다. 유식唯識이란 식識이 없으면 외부세계와 사물도 없다는 것이다. 오직 식識 안에 있는 사물만이 성性을 갖는다. 식識이 전변하여 외부세계에 사물화된 대상相들은 무無이다. 그럼, 오직 내부의 식識으로부터 외부세계와 모든 사물이 나타난다면 어떻게 사물이 공간과 시간에 동시에 놓여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가. 현장은 말하기를 "꿈의 세계와 같다고 보면 그 의문을 해결될 수 있다."고 하였다. 현장은 말하기를 "직관現量하여 깨닫는 순간 외부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후 의식이 분별하여 망령되게 대상이 외부에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원래 직관現量된 세계는 자기의 상분相分으로서 식識이 전변轉變한 것이기 때문에 유有이다. 의식판에 포착된 외부 사물은 망령되게 있는 것으로서 사실은 없는 것이다. 또한 물질 세계는 물질은 아니고 물질로 보일 뿐이고 외부에 있지 않지만 외부에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이것은 마치 꿈판에서 일어나는 것과 같이 실제로 물질이 외부에 있어서 포착하는 것이 아니다."고 하였다. 직관現量은 순수경험을 통하여 세계의 대상을 포착한다. 그럼, 그 대상은 외부 세계에 있었던 것일까. 현장에 따르면 그 포착 대상은 결코 외부 세계에 있지않다. 다만 나중에 의식이 그것을 분별하여 외부세계에 있다고 여긴다. 직관現量이 포착한 대상은 식識의 상분相分으로서 유有이지만 의식판意識所이 포착한 실제 외부세계의 대상은 무無이다.

+ 꿈
외인이 묻기를 "모든 사물이 식識이 분리되지 않은 꿈세계夢境와 같다면 꿈에서 깨어난 후 그 꿈세계夢境가 오직 마음心으로부터 나온 것임을 알게되니 어찌 자기로부터 나온 물질세계色境가 오직 식識으로부터 나온 것임을 모르겠는가."라고 반문하였다. 현장은 말하기를 "꿈속에서는 자신이 스스로 알 수 없고 깨어난 후에 되돌아보면서 깨닫는 것처럼 깨어있는 때의 물질세계의 경우도 그와 같음을 알아야한다. 아직 진정으로 깨어나지 못하였으므로 스스로 알지 못하는 것이다. 진정으로 깨어난 후에는 그 세계의 사물들을 돌아보며 깨닫게 된다. 진정으로 깨어나지 못한 것은 꿈속에 있는 것과 같기 때문에 부처는 생사生死는 긴 밤長夜이라고 하였다. 아직 깨어나지 못하였으므로 물질 세계色境가 오직 식識으로부터 나오는 것임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장자는 큰 깨우침이 있은 후에야 이전은 큰 꿈이었음을 깨닫게 된다고 하였다. 현장은 장자와 조금 다르다. 인간은 오직 자신의 식識으로부터 나온 물질세계에서 깨어난 후에야 모든 사물이 환상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이것이 현장의 포인트이다.


5. 삼성三性, 삼무성三無性, 진여眞如

+ 삼성三性
현장에 따르면 삼성三性이란 의타기성, 변계소집성, 원성실성이다. 현장은 말하기를 "세가지 종種의 자성自性은 마음心과 마음판의 현상心所法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마음의 마음판과 마음의 변하는 현상은 여러 연緣에 따라 일어나므로 마치 환상처럼 사유似有로서 나타나서 미혹시키므로 이 모든 것이 의타기성依他起性이다. 어리석은 자는 있거나 없고, 또는 같거나 다르고, 함께 하거나 안 하는 자아我와 현상法에 멋대로 집착한다. 공중에서 피어나는 꽃空華처럼 자성性도 없고 대상相도 없는 이 모든 것이 변계소집偏計所執性이다. 타자에 의존하여 일어나는 즉, 의타기依他起에 따라서 허망하게 집착한 자아我와 현상法은 모두 공空이다. 이 공판空所에 현시된 식識의 진성眞性이 원성실圓成實性이다. 이 세가지는 마음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모든 현상은 여러 인연緣에 이끌려 자신의 마음과 마음판이 허망하게 전변하여 나타난 것으로서 마치 허깨비, 꿈속의 대상, 사물의 그림자 처럼 실재는 아니지만 실재와 비슷하다. 이 현상들은 타자에 의존하여 일어나는 의타기성依他起性에 속한다. 이러한 헛된 자아我와 현상法에 대한 집착은 변계소집성偏計所執性에 속한다. 자아와 모든 현상에는 식識의 진성眞性이 있다. 이 진성이 원성실성圓成實性이다. 삼성三性이란 의타기성, 변계소집섣, 원성실성을 말한다.

+ 삼무성三無性
현장에 따르면 삼무성三無性은 상무성相無性, 생무성生無性, 승의무성勝義無性이다. 현장은 말하기를 "첫째, 변계소집에 의거하여 상무성相無性이 세워진다. 이것의 본체 상體相은 허공의 꽃처럼 비유非有세계에서 피어나기 때문이다. 다음, 의타依他에 의거하여 생무성生無性이 세워진다. 이것은 환상처럼, 여러 연緣에 따라서 생기고 자연성自然性이 없으므로 허망한 집착일 뿐이나 자성性이 완전히 없는 것은 아니다. 마지막으로 원성실에 의거하여 승의무성勝義無性이 세워진다. 최고진리勝義는 변계偏計에 의해서 집착된 자아我와 현상法에서 멀리 벗어난 자성性이기 때문에 자성이 없음을 가정한 것이지 자성이 완전히 없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상무성은 자성이 없고 생무성과 승의무성은 자성이 없다고 가정하지만 자성性이 없는 것은 아니다. 마음과 마음판은 의타기성에 속한다. 현장은 말하기를 "여러 인연緣에 따라 생성되는 마음心과 마음판心所, 그리고 견분과 상분은 유루, 무루를 막론하고 모두 의타기성이다. 왜냐하면 여러 연緣에 따라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장은 말하기를 "모든 마음과 마음판은 타자에 의지하여 일어나기 때문에 마치 환상처럼 참된 실유實有가 아니다. 마음과 마음판 외부에 실유實有세계가 있다고 망령되게 집착하는 것을 버리기 위해 오직 식識만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직 식識만이 참된 실유實有라고 집착한다면 외부세계가 있다고 집착하는 것처럼 이 또한 법집法執이다."라고 하였다. 마음과 마음판의 모든 현상은 타자에 의지하여 일어난다. 이것이 의타기이다. 이것이 모든 현상의 실성實性이다. 이러한 실성實性을 실유實有라고 집착하는 것이 변계소집偏計所執이다. 모든 현상의 실성諸法實性을 알아야 원성실圓成實에 들어간다. 이 모든 현상의 실성諸法實性이 진여眞如이다. 현장은 말하기를 "진眞은 진실이니 허망하지 않음을 나타낸다. 여如는 영원히 그러함으로 변함없음을 나타낸다. 이 진실은 어느 위치에서도 그 자성性이 영원히 같으므로 진여眞如라고 했다. 즉 깊음이 있어 허망하지 않다는 의미이다. 진여와 같은 말로 현상계法界와 실제實際가 있다."라고 하였다. 현장은 말하기를 "공판空所과 무아판無我所에 떠오른 진여는 유有도 무無도 아니므로 말로 할 수 없으나 다른 일체一切의 현상法과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 이것은 현상法의 참된 이치眞理이므로 법성法性이라고 한다... ... 없다無고 부정하는 것을 막기 위해 있다有고 주장했고 있다有고 집착하는 것을 막기 위해 공空을 주장했다. 텅 빈 환상虛幻이라고 말하지 말라고 참됨實을 주장했고 이理는 망령된 전도倒가 아니므로 진여眞如라고 불렀다. 다른 종파에서 주장하는 사물色과 마음心을 벗어나 영원히 실재하는 현상法으로서의 진여는 다른 경우이다."라고 하였다. 의타기의 실성實性을 실유實有라고 집착하는 것이 변계소집이다. 반면에 모든 현상의 실성實性, 즉 제법실성諸法實性을 실유實有로 보는 것이 원성실이자 진여이다.


6. 오입유식悟入唯識

모든 현상法을 실유實有로 집착하는 것이 변계소집偏計所執이다. 모든 현상法의 참된 속성實性을 알면 원성실圓成實에 들어간다. 재미있게도 모든 현상法이 오직 식識에 의한 것임을 알더라도 실제도 모든 현상을 실유實有라고 집착한다. 그것은 자아我와 현상法의 두 집착으로부터 아직 깨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두 집착으로부터 깨어나기 위해서는 유식唯識이 필요하다. 유식을 깨닫는 데는 5단계가 있다. 현장은 말하기를 "모든 보살을 자량위資糧位 단계에서 식識의 상相과 성性에 대하여 깊이 믿고 이해한다. 가행위加行位 단계에서 점차 포착판所取과 포착능력能取이 점차 덜 차별화되면서 참되게 볼 수 있게 된다. 통달위通達位 단계에서 참되게 통달한다. 수습위修習位 단계에서 참되게 본 진리理에 따라 수없이 닦고 익혀서 그 밖의 장애를 잠복시키고 단절한다. 구경위究竟位 단계에 이르면 장애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빛을 깨닫고 미래를 통하여 유정有情의 무리를 교화하여 유식唯識의 상相과 성性을 깨닫도록 한다."고 하였다.

+ 1. 자량위資糧位
수행자는 자량위 단계에서 식識의 상相과 성性을 깊이 믿고 이해할 뿐 이취二取, 즉 포착판所取과 포착능력能取의 구별을 잠복시켜 없애지는 못한다. 이취二取는 유정有情에 따라 아뢰야식識에 숨어있으면서 때에 따라서 나타난다. 이것이 소지所知와 번뇌이다. 포착판所取에 현상法하는 것들을 참된 현상實法이라고 집착하는 것이 소지장所知障이다. 포착능력能取을 구비한 자아我를 참된 자아實我라고 집착하는 것이 번뇌장煩惱障이다.

+ 2. 가행위加行位
수행자는 가행위 단계에서 사물의 명名, 형식義, 자성性, 차별差別 등 여러 현상法은 실재가 없고 오직 자기 마음이 전변하여 임시로 있으므로 그 대상을 실제로 포착할 수 없음을 생각한다. 포착능력能取와 포착판所取는 서로 의존하므로 포착능력식識 밖의 대상은 포착판식識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수행자는 이취二取가 공空하고 세계가 공空하다는 지식을 얻는다. 그러나 공상空相이 있다고 여기므로 한 가지를 세우고 그것을 최고의 진리라고 말한다. 현대철학의 술어로 말하자면 주관과 객관의 존재를 구별할 수 있는 것은  유식의 최고 진리성眞勝義性을 믿을 뿐 알고 행하는 것이 아니다.

+ 3. 통달위通達位
수행자는 통달위 단계에서 연세계판所緣境으로부터 보살이 드러날 때 단일한 무분별지無分別智가 마음판으로부터 포착되지 않는 이유는 온갖 잡동사니戱論 종種의 상相이 드러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때 수행자는 비로소 명실名實로 유식의 최고진리에 머물게 되고 진여를 새긴 것이다. 지혜智와 진여眞如는 평등한데 포착능력能取과 포착판所取의 상相이 모두 없어진 때문이다. 포착능력의 상相과 포착판의 상相이 서로 분별分別한다는 것은 마음판에 온갖 잡동사니가 출현한 때문이다.

+ 4. 수습위修習位
보살은 수습위 단계에서 전의轉依를 깨닫기 위하여 다시 단일한 무분별지無分別智를 닦고 익힌다. 이 지혜는 포착능력能取과 포착판所取을 벗어나서 온갖 잡동사니戱論로부터 벗어낫기 때문에 그 작용이 신비하여 불사의不思議라고 불렀다. 보살은 무분별지를 닦고 익힘으로써 아뢰야식속의 번뇌장을 끊어 열반하고 소지장을 끊어 최고의 깨달음을 얻는다. 의타기성 위의 변계소집성을 전환하여 버리고 원성실성을 전환하여 얻는다. 유식의 진여는 열반과 생사가 의존하는 의존판所依이다. 진여를 깨달으면 곧 열반을 얻으므로 안락하게 된다.

+ 5. 구경위究竟位
보살이 수습위에서 얻은 전의轉依가 구경위의 참모습이다. 번뇌漏는 영원히 끊어졌으므로 번뇌는 더 이상 증가하지 않는다. 성性이 빛을 비추어 정화하므로 무루無漏인 것이다. 무루의 계界에는 무한하고 드문 위대한 공덕과 인의因義가 들어있으므로 세상과 세상 밖에서 항상 즐겁고 이로운 일을 낳는다. 보살은 구경위 단계에서 8식이 모두 지혜로 전환된다. 이 때의 식識은 무루식無漏識이다.각종 불신佛身과 불토佛土는 무루식無漏識이 전변轉變한 것이다.


7. 현장에 대한 평가

현장이 인도에서 들여와 소개한 유식唯識 사상은 중국인의 사상과 맞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개인의 식識이 타자에 의존하여 밖으로 세계를 창조한다는 이론은 흄의 극단적인 주관적 유심론과 유사한 면이 있다. 이전의 승조가 말한 부진공不眞空 사상에 따르면 모든 사물은 환화인과 같은 존재이지만 그 환화인은 없지 않다. 그래서 부진공不眞空이었다. 그러나 현장은 환화인은 참된 사물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현장에 따르면 모든 사람이 불성佛性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일부 사람에게만 있는 무루종無漏種이 타자에 의존하여 일어나는 의타기依他起에 따라 불성佛性이 실현되는 것이다. 불성은 한 번 생성되더라도 불변하는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이러한 현장의 사상을 그르다고 반박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법장法藏이다.  


8. 법장의 금사자론金師子論

법장法藏은 자가 현수賢首이고 성은 강康이다. 법장(643-712)은 원래 강거康居사람인데 할아버지 때 중국에 귀화했다. 법장은 당나라 정관情觀 17년에 장안에서 태어났다. 한 때 현장과 함께 역경사업에 참가했으나 견해가 달라서 그를 떠났다. 법장은 객관적 유심론자에 가깝다. 법장은 그후 두순과 지엄의 설을 발전시켜 화엄종華嚴宗을 세웠다. 법장은 측전무후에게 불학을 알기 쉽게 강론하기 위하여 궁전 앞의 금사자를 가리키며 요점적 이론을 10門으로 나누어 지었다. 그것이 <금사자장金師子章>이다. 법장은 세계를 마음과 물질로 나누면서 세계의 마음을 체體로 보았고 세계의 물질을 용用으로 보았다.

+ 제 1문: 연기가 빛남明緣起
법장은 금사자를 가리키며 말하기를 "금에는 자성自性이 없다. 장인의 기교라는 연緣이 갖추어지면 그 때 비로소 금사자 상相이 생성된다. 따라서 생성은 오직 연緣, 즉 조건에 따른 것이므로 연기緣起인 것이다."라고 하였다. 금은 본체에 그리고 금사자는 현상에 해당한다. 법장에 따르면 본체는 리법계理法界로서 본래의 그 본성자체로서 오염되지 않으니 자성청정自性淸淨하고 그 성체性體는 깊숙한 곳까지 두루 비추므로 원명圓明이다. 본체와 현상은 물과 물결에 비유할 수 있다. 즉, 물결은 현상에서 나타나는 여러 사물이다. 금사자는 금을 인因으로하여 장인의 기교를 연緣으로 삼아 생성된 것이다. 이것이 연기緣起이다.

+ 제 2문: 색이 공임을 변별함辨色空
법장은 말하기를 "금사자의 사자 상相은 허虛하고 참된 것은 금뿐이다. 사자는 있는 것이 아니지만 금덩이는 없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그 사물色은 공空인 것이다. 공空은 자체의 모습自相이 없었으나 빛에 의하여 사물色로 환유幻有되었으므로 색色은 원래 공空이었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현상세계의 사물色은 사물화幻色된 것들로서 원래 그 사물은 공空이었다. 따라서 현상세계에서 우리가 보는 색色은 환색幻色이고 공空은 진공眞空이므로 사물에 색色과 공空이 공존하는 것은 모순이 아니다. 공空은 자체의 모습, 즉 상相이 없으나 빛에 의하여 사물色화 된다.

+ 제 3문: 3성의 약술約三性
법장은 말하기를 "금사자에 사자가 있다고 집착하는 것이 변계偏計이고, 사자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의타依他이고, 금의 본성金性이 불변하는 것이 원성圓成이다."라고 하였다. 사자는 실제로 있는 것實有가 아니지만 인간의 변계偏計때문에 사자가 있다고 집착하게 된다. 또 금사자의 사자가 환영으로 나타날 수 있지만 그 상相은 자성이 없고 의타依他에 의하여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금사자의 금은 불변하는데 진심眞心의 본체는 항상 불변하므로 원성圓成이다.

+ 제 4문: 무상이 드러남顯無相
법장은 말하기를 "금사자가 융해되면 금 이외에 사자 상相은 얻을 수 없다. 이것이 무상無相이다."라고 하였다. 인간의 본체인 진심眞心이 현상세계에서 현현하면서 사물화된다. 이러한 환유幻有는 환영으로서 유有가 아니므로 무상無相인 것이다.

+ 제 5문: 무생의 설명說無生
법장은 말하기를 "금으로부터 사자가 생성될 때 단지 금만이 생기고 금 이외의 다른 사물은 없다. 사자가 생기고 소멸하더라도 금덩어리는 증감이 없으므로 무생無生인 것이다."라고 하였다.  마음으로부터 나타난 것이 현상세계의 모든 사물이다. 마음은 연緣이 작용에 따라 사물을 생성시키기도 하고 소멸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물은 환유幻有된 유有이므로 진정으로 생성된 것이 아니므로 무생無生이다.

+ 제 6문: 오교의 논술論五敎
법장은 말하기를 "첫째, 사자는 인연因緣에 따라 나타나는 현상法으로서 생각에 따라 생성하고 소멸되기도 하므로 사자의 참 상相을 얻을 수 없다. 이것이 우법성문교愚法聲聞敎이다. 둘째, 이러한 연緣에 따라 생성된 사자의 현상法은 저마다 자성自性이 없으므로 철저히 공空일 뿐이다. 이것이 대승시교大乘始敎이다. 셋째, 사자의 현상法은 철저히 공空이지만 자연스럽게 환유幻有되어 있는듯이 보이는 것은 의심할 바 없으므로 연緣에 따라 생성된 가유假有와 쌍존하는 것이다. 이것이 대승종교大乘終敎이다. 넷째, 이 두 상相이 서로 쟁탈하며 모두 망하면 거짓된 집착이 사라지게되고 무유無有가 힘을 얻으니 공空으로부터 나온 쌍유雙有가 모두 소멸하여 말로는 표현할 수 없고 마음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게된다. 이것이 대승돈교大乘頓敎이다. 다섯째, 집착이 소멸하여 본체가 드러난 현상法은 하나의 덩어리로 융합됨에 따른 것이다. 큰 용用이 현상한 것은 완전히 참되게 일어난 것이다. 따라서 모든 사물이 분분하여도 얽히지 않는 것이다. 모든 것一切이 곧 하나一인 것은 모든 것이 성性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一가 곧 모든 것一切인 이유는 인과因果에 따른 자연스러운 결과이기 때문이다. 본체의 힘力과 작용用이 서로 맞물려 스스로 펼쳐져 나온 것이므로 일승원교一乘圓敎이다."라고 하였다. 사물 상相의 본체는 없고 단지 변계에 의하여 생성될뿐이므로 금사자를 실유實有라고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 소승의 가르침小乘法이다. 또 사물의 성性은 생성도 소멸도 없으므로 금사자는 의타기에 의하여 현상한 철저한 공空이라는 것이 대승의 가르침大乘法의 가르침이다. 공空의 입장에서 보면 금사자는 환유幻有이고 이러한 금사자의 환유幻有가 유有라는 입장에서 보면 금사자는 공空이 아니다. 그러나 진심眞心에 따라 공空의 입장과 유有의 입장을 모두 소멸하면 언어적 표현은 단절되고 마음에는 아무 것도 남지않게 되는데 그 때 사자가 환유임을 깨닫게 된다. 하나는 전체一體이고 전체는 하나라는 것은 금덩이는 금사자로 주조될 수 있고 금사자는 금덩이로 환원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 제 7문: 10현 범주勒十玄
법장에 따르면 
1. 금과 사자는 동시에 주조된다.
2. 사자 눈이 사자를 감싸면 그 전체는 완전히 눈이고 사자 귀가 사자를 감싸면 그 전체는 완전히 귀이다.
3. 금과 사자는 서로 상호작용하여 주조되므로 일一과 多는 아무런 장애가 없다. 그러나 금과 사자는 각기 다르고 자기 위치에서 머문다. 
4. 사자의 눈, 코, 귀, 입 등은 금으로부터 주조되고 아무런 장애와 모순이 없다. 
5. 만약 사자만 보고 금이 안보인다면 사자는 드러나고 금은 숨었기 때문이다. 만약 금만 보고 사자는 안보인다면 금은 드러나고 사자는 숨었기 때문이다. 만약 양쪽을 다 보면 다 드러나거나 다 숨는다. 드러나면 두드러지고 숨으면 비밀이다. 
6. 금과 사자는 드러나기도 하고 숨기도 하는 데 아무런 모순과 장애가 없다. 
7. 사자의 눈, 귀, 사지, 털에는 각각 금사자가 있다. 모든 각각의 털 속에 있는 사자는 동시에 하나의 털 속에 들어간다. 하나의 털 속에는 무한한 사자가 들어있고 하나의 털에 있는 그 무한한 사자는 다시 하나의 털 속으로 돌아온다. 이것이 인드라망경계문이다. 
8. 사자를 통하여 무명無明을 드러내고 금金體을 통하여 진성眞性을 밝힌다. 본체理와 현상事를 합하여 아뢰야식을 논함으로써 생성에 대한 올바른 이해을 얻는다. 
9. 사자는 현상세계에서 찰나에 생성되기도 하고 소멸되기도 한다. 생각의 한 찰나는 삼제三際로서 과거, 현재, 미래이고 각각 다시 과거, 현재, 미래로 나누어지므로 총 구세九世이다.
10. 금과 사자는 숨거나 드러나기도 하고 하나이고 여럿이지만 각각 자성自性이 없고 마음이 전변하여 나온 것이다. 따라서 현상事과 본체理를 논하여 사자와 금을 밝혀낸다.

+ 제 8문: 6상의 개괄括六相
법장은 말하기를 "사자는 총상總相, 차별화된 오근五根은 별상別相, 이 모두가 하나의 연緣에 따라 일어나므로 동상同相, 눈과 귀 등이 서로 그 한계를 벗어나지 않으므로 이상異相, 모든 근根이 합하여 사자가 되는 것이 성상成相, 모든 근根이 각자 자기 위치에 머무는 것이 괴상壞相이다."라고 하였다. 다섯 감각기관이 회합하여 사물이 완성되면 성상成相이고, 다섯 감각기관이 회합하지 못하여 각자 따로따로 작용하면 사물이 완성되지 못하는 괴상壞相이다.

+ 제 9문: 보리의 성취成菩提
법장은 말하기를 "보리는 도道이고 깨달음覺이다. 즉 본래本 사자가 나와서 고요히 멸寂滅하므로 더 이상 파괴되지 않는 유위有爲의 전체적 현상을 보는 것이다. 모든 집착에서 벗어난 이 길을 통하여야만 지혜의 바다로 흘러들어가므로 도道인 것이다. 즉 태초 이래부터 전도顚倒된 유有는 실제로 원래 무無로 복귀한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각覺이다. 전체적으로 종種을 아는 지혜가 보리의 성취이다."라고 하였다. 지혜는 전체지一切智이다. 현상세계의 모든 사물은 유有가 아니라 유有로 전도된 것이므로 다시 전도되어 무無로 되돌아가는 것을 보는 것이 전체지一切智이다. 이는 마치 꿈에서 깨어나서 꿈속의 현상이 실재하지 않고 아무 것도 없음을 보게되는 것과 같다. 꿈속의 현상은 유有가 아니라 유有로 전도된 것이므로 깨어나면 그 전도된 유有는 다시 전도되어 무無로 복귀하는 것이다. 그러나 꿈 속의 유有를 집착한다면 그것이 미망迷妄이고 무명無明이다.

+ 제 10문: 열반에 듦入涅槃
법장은 말하기를 "사자와 금, 두 상相이 모두 없어지면서 번뇌가 생기지 않는다, 즐거움과 불쾌함이 펼쳐지고 마음은 바다처럼 편안하여 망상이 없어지고 아무런 갈등도 느끼지 않는다. 구속과 장애를 벗어나 고통의 근원을 영원히 버리는 것이 열반에 들어가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것이 수행의 최고경지이다. 금과 사자의 두 상相이 사라지고 본체세계를 맞이하게 되면 모든 번뇌와 망상에서 벗어나 해방되는 것이다.

+ 객관적 유심론
세계의 존재를 인정하느냐 마느냐에 따라서 객관적 유심론과 주관적 유심론으로 나누어진다. 불학은 원래 주관적 유심론으로서 개체의 심心만을 인정하여 인과응보로부터 생사윤회를 주장한다. 그러나 객관적 유심론은 전도된 세계의 유有를 본래의 무無로 환원할 것을 주장한다. 객관적 유심론의 대표적인 예는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이다.





<참고문헌>

풍우란. 박성규 역. 중국철학사.





2012년 6월 23일 토요일

7. 승조: 부진공不眞空, 반야무지般若無知. 도생: 돈오성불頓悟成佛

1. 역사적 맥락에서 본 승조

<고승전>에 따르면 승조僧肇는 남북조 시대 때 경조京兆 사람이다. 승조는 집이 가난하여 책을 베껴주는 일로 생계를 꾸리면서 경전과 역사책을 섭렵했고 노장老莊을 핵심으로 가르쳤다. 승조는 대승 경전을 깊이 배웠고 삼장三藏, 즉 경經, 율律, 론論에도 통달했다. 구마라집이 감숙성의 고장姑藏에 왔을 때 승조는 멀리서 찾아와 그를 따랐다. 구마라집은 인도 사상을 체계적으로 중국에 소개한 최초의 인물이다. 구마라집의 <대품반야경>이 나온 후에 승조는 <반야무지론>을 지어 구마라집에 바쳤다. 승조는 진晋나라 의희 10년인 414년 장안에서 타계하였다. 향년 31세였다.


2. 세계의 기원

승조는 세계를 이원화하여 본체세계와 현상세계로 나누었다. 승조는 말하기를 "무릇 본제本際란 모든 중생의 막힘없는 열반涅槃의 성性이다. 어찌하여 망심妄心과 전도顚倒가 홀연히 일어나는가. 그것은 일념一念에 미혹된 까닭이다. 그런데 그 일념은 하나로부터 일어났고 그 하나는 생각없이 일어났는데 그 생각없는 것은 터가 없다. 도道는 처음에 하나를 낳는데 하나는 무위無爲이다. 하나가 둘을 낳는데 둘이 망심妄心이다. 둘이 음양陰陽을 낳았는데 음양은 동정動靜이다. 양은 맑淸고 음은 탁濁하다. 따라서 맑은 기氣는 안으로 허虛하여 마음이 되고 탁한 기氣는 밖으로 모여 물질色이 되었으니 마음과 물질의 두 법法이 생성되었다. 마음은 양陽에 대응하고 양陽은 움직임動에 대응한다. 물질은 음陰에 대응하고 음은 고요함에 대응한다. 고요함靜은 곧 현빈玄牝, 즉 본체와 상통하므로 세계天地가 교합한다. 모든 중생은 음양陰陽 허기虛氣를 타고났다. 따라서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셋을 낳고 셋은 모든 현상萬法을 낳는다. 이미 무위無爲에 연緣하여 마음이 생기고 마음이 생김으로 인하여 물질色이 생긴다. 그러므로 경經에는 개별적인 마음과 개별적인 물질이라고 밝혔다. 그런즉, 마음이 모든 염려를 낳고 물질色은 모든 씨를 튀우므로 업業의 인자들이 서로 합하여 삼계三界의 종種이 생겼다. 삼계三界가 생긴 이유는 마음이 본원을 집착한 나머지 진일眞一에 미혹되어 탁한 욕망이 망기妄氣를 낳았기 때문이다. 망기妄氣가 맑고 깨끗해짐에 따라 무색계無色界가 되니 이것이 마음이다. 망기가 탁하게 나타나면 색계色界가 되니 이것이 몸이다. 망기가 흩어져 티끌이 되어 떠돌면서 욕계欲界가 되니 이것이 진경塵境이다. 따라서 경經에 따르면 삼계는 허망虛妄하여 진실되지 않아서 오직 하나의 망심이 변화해나갈 뿐이라고 했다. 무릇 마음 안에서 하나가 생긴다는 것은 밖에 무위無爲가 있다는 것이고 마음 안에서 둘이 생긴다는 것은 밖에 유위有爲가 있다는 것이고 마음 안에서 셋이 생긴다는 것은 밖에 삼계가 있다는 것이다. 이미 안과 밖이 상응하여 모든 개별적 현상法들이 생기고 모래알 만큼 많은 번뇌가 생긴다."고 하였다. 승조가 말하는 본제本際는 본체세계의 측면이고 삼계三界 즉, 무색계無色界, 색계色界, 욕계慾界는 현상세계의 측면이다. 승조는 중국 고유의 철학과는 구별지으면서 마음과 몸을 음양으로 나누었다. 승조는 말하기를 "미혹迷이란 자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아를 세워 안으로 자아가 전도된 상태이다. 자아가 전도된 상태에서는 성스러운 이치를 깨닫지 못한다. 때문에 밖으로 편견이 생긴다. 그런즉 안팍으로 장애가 생긴다. 때문에 사물에 대한 리理를 깨치지 못한다."고 하였다. 원래 인간은 무아無我임에도 불구하고 미혹되면 하나의 자아를 세우게 된다. 따라서 비아非我가 생겨나고 주관과 객관이 대립하면서 현상세계가 일어난다. 이것이 승조의 포인트이다.


3. 부진공不眞空

현상세계는 현상에 불과하므로 거짓이라 볼 수 있다. 따라서 현상셰계는 무無라고 할 수 있지만 현상이 드러난 이상 유有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승조에 따르면 현상세계는 참되지 않은 부진공不眞空이다. 사람과 사물은 모두 하나의 생멸生滅이므로 연緣이 합하여 생기고 연緣이 분리되면 멸한다. 따라서 모든 사람과 사물은 공허하고 환상적인 것으로서 진실되지 못하다. 진실되지 못하기 때문에 공空인 것이다. 승조는 말하기를 "모든 사물은 유有이기도 하고 무無이기도 하다. 모든 사물이 무無인 이유는 사물의 유有도 유有가 아니기 때문이다. 또 모든 사물이 유有인 이유는 사물의 무無도 무無가 아니기 때문이다. 유有는 유有가 아니므로 유有는 진유眞有가 아니고 무無도 무無가 아니므로 무無는 절대무絶對無가 아니다. 유有가 진유眞有라면 스스로 영원히 유有이므로 연緣에 연연할 필요가 없겠다. 무無가 진무眞無라면 스스로 영원히 무無이므로 연緣에 연연할 필요가 없겠다. 유有가 연緣에 의존하여 유有가 되면 참된 유有가 아니므로 유有도 유有가 아닌 것이다. 모든 사물이 무無라면 흥기하지 말아야 하는데 흥기하므로 무無가 아닌 것이다. 모든 현상萬法을 유有라고 하자니 그 유有는 참된 것이 아니고 무無라고 하자니 이미 나타나 있다. 모습이 나타났으니 무無는 아니지만 참되지 않으므로 실유實有가 아니다. 그러므로 부진공不眞空이다. <방광반야경放光般若經>에 따르면 모든 현상諸法은 거짓 명칭일 뿐이고 진실이 아니므로 환화인幻化人, 즉 허깨비와 같다. 환화인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참된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현상계의 모든 사물은 인연에 따라 생기기도 하고 멸하기도 하므로 환화인과 같다. 이런 면에서 환화인幻化人은 무無라고 볼 수 있으나 환화인은 없는 것은 아니므로 유有라고 볼 수도 있다. 승조는 환화인은 무無이기도 하고 유有이기도 하지만 참되지는 않으므로 공空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승조의 포인트이다. 이것이 승조가 말하는 부진공不眞空이다. 즉, 그 공空은 공空이지만 참되지 않은 공空이라는 것이다. 

4. 물불천物不遷

현상세계에 이미 있었던 사물은 비록 소멸되었더라도 있었던 사실 자체는 멸할 수 없다. 승조는 말하기를 "사물은 운동動할뿐 정지靜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과거의 사물이 현재에 계속되지 않는다고 본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사물은 운동하지않고 정지해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과거의 사물은 현재에도 소멸되지 않는다. 이렇듯 논의의 주제는 같으나 소견은 다를 수 있다. 진리에 어긋난 것이 막힘塞이고 진리에 합치한 것이 통달通이다. 미혹된 사람들은 이미 지나간 사물이 현재에 계속되지 않음을 알면서도 미래에 지속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과거의 사물이 계속되지 않거늘 현재의 사물이 어찌 미래에 지속되겠는가. 과거의 사물은 현재에 없으므로 계속되지 않은 것이고 또 과거 속에 남아있으므로 소멸되지는 않은 것이다. 현재의 사물은 현재에 있을 뿐 과거로부터 현재로 연속된 것이 아니다. 공자는 말하기를 "안회야, 항상 현재를 보아라. 아까의 어깨 스침도 과거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따라서 사물은 시간의 간격을 지속하지 않음이 분명하므로 사물에 무슨 운동動이 있겠는가. 그런즉, 광풍도 언제나 고요했고 강물도 흐른 적이 없고 해와 달도 회전한 적이 없다. 사물이 과거와 현재에 각각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이유는 운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사물은 계속되지 않기 때문에 과거와 현재를 반복하지 않으며 사물의 성性은 매 시간 다르다. 과거는 더 이상 현재가 아니다. 그러나 과거를 되돌아 볼 수 있으므로 소멸된 것은 아니다. 현재가 과거로부터 연속된 것이라면 과거 안에 현재가 있어야 하고, 현재에서 과거로 되돌아 간다면 현재 안에 과거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현재에는 과거의 사물이 없으니 되돌아 갈 수 없고 과거 안에는 현재 사물이 없으니 과거 사물은 소멸되지 않은 것이다. 과거가 현재로 연속되지 않았고 현재도 과거로 되돌아 갈 수 없으므로 사물의 性성은 시간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어찌 연속하거나 소멸되는 사물이 존재하겠는가. 그런즉, 춘, 하, 추, 동이 바람처럼 달리더라도 진리를 이해하고 나면 아무리 빠른 것도 운동하지 않음을 알게된다."고 하였다. 과거, 현재, 미래는 각각 독립적인 시간 안에서 정지해 있다. 따라서 모든 사물은 영원常토록 불변하므로 무상無常이 아닌 것이다. 승조는 말하기를 "여래如來의 업적功은 만세토록 항상 존재하고 도道도 만세토록 통通한다. 산을 만드는 일은 한 줌의 흙을 쌓는 데서 시작하고 먼 길도 첫 걸음에서 시작한다. 결과果는 공업功業이 썩어 없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난다. 공업功業은 썩어 없어지지 않으므로 꽃피지도 않는다. 꽃피지 않으므로 변천遷하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변천하지 않은 원리는 명백하다. 진실로 말세의 삼재三災, 즉 전쟁, 질병, 기근이 휩쓸어도 자기가 쌓은 업業은 그대로 남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불변성이란 운동을 떠나서 정지를 구하지 않고 반드시 운동 속에서 정지를 구하는 것이다. 따라서 운동을 떠나서 정지를 구하지 않으므로 정지하더라도 운동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과果에는 인因이 들어있지 않으나 인因으로 인하여 과거가 생긴다. 따라서 인因은 과거에 소멸된 것이 아니다. 또 과果에는 인因이 들어있지 않으므로 인因은 현재로 연속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인因은 소멸되지도 않고 계속되는 것도 아니므로 사물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승조가 말하는 물불천物不遷의 포인트이다. 인因은 과果를 낳고 과果는 인因에 따른 결과이다. 따라서 인因은 과거에 소멸되지 않은 것이다. 또 현재 과果안에는 과거 인因이 없으므로 인因은 현재로 연속되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인因은 소멸하지도 연속하지도않으므로 확실히 불변하는 것이다.


4. 성인聖人

승조에 따르면 현상세계는 유有라고도 볼 수 있고 무無라고도 볼 수 있고, 또 비유非有라고도 볼 수 있고 非無라고도 볼 수 있다. 또 상相이라고 볼 수 있고 무상無相이라고 볼 수도 있다. 승조는 말하기를 "상相이 무상無相인 경우는 상相이면서 무상無相인 경우이다. 색즉시공色卽是空 즉, 색色은 공空이지만 색色의 소멸이 공空인 것은 아니다. 마치 물이 흐를 때 바람이 쳐서 거품이 일어나므로 거품은 물이지만 거품의 소멸이 비로소 물이 되는 것은 아닌 것과 같다. 또 무상無相이 상相인 경우는 무상無相이면서 상相인 경우이다. 공즉시색空卽是色, 즉 공空은 곧 색色이지만 색色은 끝이 없다. 마치 거품이 꺼지면 물이 되는데 물이 곧 거품이고 물이 거품과 분리되는 것이 아닌 것과 같다. 거품과 같은 유상有相에 집착하고 물과 같은 무상無相을 두려워하는 유상有相은 바로 무상無相임을 알지 못하는 것이고 무상無相에 집착하고 유상有相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무상無相이 바로 상相임을 알지 못한다. 깨달은 사람은 부처이니 미망妄이 일어나지 않는다. 미망이 일어나지 않으면 그것이 본래의 진실이다."라고 하였다. 리理를 아는 사람은 현상 속에서 본체를 본다. 승조는 말하기를 "황금 보물 창고 안에서 황금의 본체만 관조하고 각종 형상을 보지 않고, 또 보더라도 형상에 미혹되지 않고 본체만을 관조한다면 허망한 그릇됨이 없어지는데 진인眞人의 경우가 그렇다. 각종 형상을 보더라도 진일眞一만을 관조하여 편견에서 벗어나고 진실의 경지에 머무르면 그가 바로 성인聖人이다. 반면에 황금의 각종 현상만 보고 본체는 보지 못하면 잡생각으로 쟁론을 일삼게 되니 그가 어리석은 자이다. 항상 잘생기고 못생긴 남녀의 외모만 보고 차별을 일으키고 본성을 미혹시켜 마음의 형상에 집착하므로 망상이 진일眞一을 가리운다. 어리석은 자는 현상에 집착하므로 현상 속에 갇히지만 성인聖人은 현상에 집착하지 않으므로 진실과 합일한다. 이미離微한 사람은 육신과 마음이 없으므로 두루 확대되어 모든 사물에 미친다. 육신과 마음에 집착하는 자는 광대한 지혜를 상실한다. 모든 경론은 육신과 마음의 집착을 깨뜨려야 진실에 들어갈 수 있다고 가르친다. 그것은 마치 대장장이가 광석을 녹여 금을 얻는 것과 같다. 육신에 집착하면 육신의 살에 얽매여 법신法身이 드러나려 하지 않고 마음에 집착하면 마음의 염려로 인하여 진지眞智가 은폐하여 숨는다. 그런즉, 큰 도道는 통하지 못하여 오묘한 리理가 침몰하므로 육신六神은 안에서 혼란하고 육경六境은 밖에서 주야로 허둥대며 쉬지를 못한다. 이離란 그 실체가 외물과 합하지도 않고 분리되지도 않음을 말한다. 마치 맑은 거울은 모든 사물을 비추지만 그 거울은 영상과 합하지도 않고 영상의 몸과 분리되지도 않는 것과 같다. 또 허공虛空처럼 모든 것을 빨아들이지만 오염되지 않고 집착되지 않으며 얽매이지 않고 뒤섞일 수 없기 때문에 이離이다. 미微란 그 실체가 오묘하여 무형無形, 무색無色, 무상無相하여 그 쓰임이 모든 사물에 미치나 그 공功을 드러내지 않으므로, 보아도 볼 수 없고 들어도 들을 수 없지만 그 덕德은 갠지스 강의 모래알처럼 영원하지않으면서도 단절되지 않고 더 이상 분리되지 않으므로 흩어질 수 없기 때문에 미微이다. 따라서 이離와 미微. 두 글자는 도道의 핵심이다. 육신六神과 六境이 그 흔적이 없는 것이 이離이고 모든 사물이 무아無我에 따라 작용하는 것이 미微이다. 미微하므로 이離하고 이離하므로 미微하다. 다만 이미離微는 작용에 따라 그 이름이 나뉘었을뿐 그 본체는 하나이다."라고 하였다. 이미離微란 탈존의 경지이다. 성인은 더 이상 미망에 휘둘리지 않는 사람으로서 무상無相의 상相을 이미離微로써 경험한 자이다. 이것이 성인에 대한 승조의 포인트이다.


5. 반야무지般若無知

승조에 따르면 성인聖人의 마음은 맑은 거울과 같아서 항상 비추기를 멈추지 않고 그 본체 자체는 비어虛있다. 승조는 말하기를 "성인聖人은 마음을 비워서 항상 비추고 종일 알아도 더 알고자하고 마음은 능히 묵요박도墨耀韜光, 즉 빛을 감춰 암흑이 드러나게 하므로 마음은 비워지면 바닥이 드러玄鑑나므로 지혜와 총명을 쓰지 않고 최고의 깨달음을 얻은 자이다. 성인은 바닥鑒의 신비를 얻었으므로 무를 인식無知하였고 때 마다 그 정신을 사용하여 무無를 생각한다. 無무로써 사유하는 정신은 세상을 능히 드러낸다. 무無를 인식한 지혜는 밖으로부터 능히 어둠玄을 빛춘다. 지혜는 만사를 초월해있으나 만사를 떠난 적이 없고 지혜의 본체身, 즉 반야는 현상세계로부터 떨어져 있으나 항상 현상세계로 초월한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피어나고 끝없이 조응한다. 신비로운 무無에 힘쓰지 않으면서도 무無가 빛난다. 이것이 무지無知의 인식능력이고 성스러운 정신神의 경지이다. 그 물질은 실재實하지만 유有가 아니고 공허虛하지만 무無가 아니다.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로 논할 수 없는 것이 성스러운 지혜이다. 왜 그런가. 유有라고 말하자니 무상무명無狀無名이고 무無라고 하자니 성인聖人의 영靈이기 때문이다. 성인의 영靈은 공허虛하나 항상 비추고, 무상무명하나 비추면서도 항상 비어있다. 비추나 항상 공허虛하므로 혼동되어도 달라지지 않는다. 비어있음에도 비추므로 항상 외물을 조응하면서 운동한다. 성지聖智는 한번도 멈춘 적이 없고 형상形相은 손으로 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보적寶積>에 따르면 무심無心한 뜻이 드러난다고 했던 것이고 <방광放光>에 따르면 부동不同의 깨달음이 모든 현상諸法을 드높인다고 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모든 사물은 성스러운 빛에 따라 하나一에 이를 수 있다. 그런즉, 반야般若는 공허虛하나 비추고, 어려우나 능히 알고 운동하면서도 정지하므로 성인은 무無에 조응하여 이루어낸다. 그런즉 모르不知나 아는 것이고 이루지않으不爲나 이루는 것이다. 따라서 어찌 다시 알려고 하고 어찌 다시 이루려고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승조에 따르면 현상세계는 망념妄念에서 시작한다. 성인은 무無를 통하여 망념적 유有를 극복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무無의 지혜가 반야이다. 반야는 현상세계를 초월하여 존재하고 항상 현상세계를 비추면서도 그 자체는 비어있다. 그럼, 비어虛있으므로 무無인가. 무無인 듯이 보이나 무無가 아니라고 말한다. 이것이 승조의 포인트이다.



6. 도생의 돈오성불頓悟成佛

도생道牲(355-434)은 승조와 동시대 사람이다. <고승전>에 따르면 축도생竺道生의 성은 위魏이고 거록사람으로서 팽성에서 살았다. 도생은 장안에 유학하여 구마라집 밑에서 수학하였다. 승려들은 그의 신통함에 놀랐다. 한번은 도생이 말하기를 "상象으로써 의미意를 전달하니 의미를 얻으면 상象은 잊어도 되고, 말로써 리理가 전달되니 리理가 들어오면 말은 그친다. 경전이 동쪽으로 전래된 이래 문자에 얽매어 온전한 의마가 제대로 파악되지 못했다. 통발을 잊고 물고기를 잡아야 비로소 도道를 논할 수 있다."고 하였다. 도생은 선善은 응보를 받지 않는다는 선불응보善不應報와 돈오성불頓悟成佛, 즉 문득 깨달아 부처가 된다는 설을 주장하였다. <열반경>이 처음 들어왔을 때 도생은 일천제一闡提, 즉 불법을 믿지 않는 사람도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하였다. 사람들은 도생을 비웃었으나 <대열반겯>이 수입되자 거기에는 일천제도 성불이 있다고 쓰여있었다. 도생은 송나라 원가元嘉 11년(434)에 타계하였다. 한편, 일천제도 음양의 두 기를 타고나므로 누구나 열반에 이르는 인因이 들어있고 또 삼계三界에 탄생하는 이유는 미혹의 결과果 때문이다. 도생은 경전의 말과 글을 통발에 비유하면서 말과 글에 집착하지 않아야 도道의 깨달음을 얻고 즉시 성불할 수 있다고 말했다. 나중에 선종禪宗은 문자를 중시하지 않고 마음의 깨달음을 중시하였다.

+ 돈오성불
도생은 말하기를 "모든 사물을 꿈속의 사물로 간주하면 유有의 세계에 살더라도 무無의 세계에 사는 것과 같아진다. 이 경지에 이르면 어찌 현재의 몸에 구애되거나 생명에 미련을 두겠는가. 무명無明은 모든 미혹의 근원이고 탐애貪愛는 모든 고뇌의 근원이다. 무명과 탐애에 빠지면 정신神이 흐려지고 길흉과 재앙을 불러온다. 무명無名은 빛을 엄폐하므로 정욕은 외부사물이 혼란을 일으키는 것이다. 탐애貪愛는 성性을 따라서 형形을 이루고 형形은 자아와 피아를 구별하는데 감정이 선악을 구별하는 이유는 자아와 피아의 구별로부터 나온 것이다. 자아와 피아를 구별하다보니 육신에 얽매어 육신만을 돌보게 된다. 선악에 관한 주관으로 인하여 생生에 연연하여 윤회전생하는 것이다. 그런즉 큰 단 꿈에 빠지면 미혹하여 혼미하고 긴 밤속에서 득실을 따지고 화복禍福이 따라다닌다. 악을 쌓아 하늘의 재앙을 불러오고 죄를 지어 그 벌로 지옥에 이른다. 이것이 필연의 이치數임은 의심할 바가 없다. 그러므로 죄와 복의 보응은 그 감感에 따른 것이다. 감感에 따라 그대로 되는 것이 자연自然이다. 자연이란 나의 그림자나 메아리같은 것이다. 따라서 어찌 자연이 본질, 현재玄宰이겠는가."라고 하였다. 마음의 감정은 외부사물과 접촉하여 보응한다. 보응은 마음이 외부사물과 접촉하여 생산한 감정내용이다. 따라서 무심無心으로 사물과 접촉한다면 감정내용이 없게되므로 업業을 이루지 않고 윤회에서 벗어나게 된다. 사령운謝靈運은 도생의 돈오성불과 관련하여 <변종론辯宗論>에서 말하기를 "부처에 따르면 성인의 도道는 멀리 떨어져 있으나 배움을 축적하여 능히 깨달음에 이르고 번뇌累를 다하여 바닥鑒이 드러나면 점오漸悟와 만난다고 했다. 공자에 따르면 성인의 도道는 오묘하여 안회도 도道에 근접함으로 그쳤으나 사실, 무無의 본체를 두루 느껴야感만이 일극一極으로 돌아가는 리理이다."라고 하였다. 불교에 따르면 성인의 도道는 배움을 쌓아 마음의 무명無明, 즉 번뇌累가 사라지는 진심眞心의 빛明이 드러나는 것이다. 즉 성불成佛은 점진적인 학습, 즉 점수漸修의 결과이다. 반면에 공자에 따르면 도道란 단번에 무無를 체득하여 일一로 돌아가는 것이다. 따라서 공자는 갑작스런 깨달음, 즉 돈오頓悟를 주장한 셈이다. 사령운은 <변종론>에서 말하기를 "신론도사新論道士, 즉 도생은 거울鑒 바닥의 신비하고 오묘함은 단계적 접근을 허용하지 않고 또 배움의 축적은 끝이없으니 언제 종결되겠는가. 이제 부처의 점오漸悟를 버리고 능지能至를 취하여야겠다. 또 공자의 태서殆庶를 버리고 일극一極을 취하여야겠다."고 하였다. 사령운은 도생을 분석하면서, 부처가 점수漸修를 통한 배움의 축적을 주장하였지만 결국 능히 이를 수 있는 경지, 즉 능지能至로 환원되었고 공자가 도道에 근접한 태서를 주장하였지만 결국 돈오頓를 통한 완전 정복의 일극一極으로 환원되었다. 그럼, 왜 부처는 배움의 축적을 강조하고 공자는 돈오에 치중하였는가. 사령운에 따르면 인도인은 이치를 깨닫지 못하면서도 쉽게 교화된다. 따라서 돈오를 폐기하고 점수를 권장하였던 것이다. 반면에 중국인은 쉽게 이치를 깨달으면서도 좀처럼 교화되지 않는다. 따라서 일극一極의 돈오를 권장하고 배움의 누적인 점수를 폐기했던 것이다. 최고의 경지인 무無는 일단 터득하면 완전해지므로 점진적으로 터득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배움의 축적은 예비공부에 불과하고 단번의 깨달음이 중요하므로 돈오頓悟가 필수적인 것이지 점오漸悟는 무無의 체득과 무관하다. 그러나 승유僧維는 사령운을 반박하면서 말하기를 "배움을 통하여 유有의 극한極을 해명하면 자연히 무無로 나아가는 것이니 어찌 무無를 언급할 필요가 있겠는가. 유有를 다 소진함으로써 무無가 드러난다면 어찌 점오漸悟라고 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승유는 배움을 통하여 유有의 극한을 규명하면 무無와 합일하니 점오가 존재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에 대하여 사령운은 반박하기를 "번뇌累가 없어지지 않으면 무無를 터득할 수 없으므로 번뇌가 다 소진된 것이 무無이다. 번뇌를 소진하려면 가르침에 의지해야 하지만 유有에 거하는 동안時의 학습은 깨달음悟이 아니다. 깨달음은 유有가 표상된 것으로서 배운 것이 드러난 것이다. 단계적 접근은 어리석은 논설이고 단번의 깨달음一悟으로 무無를 습득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무無는 배운다고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배운 것이 표상된 것이므로 배운 것을 포함한 모든 번뇌가 사라져야 습득될 수 있다. 이에 대하여 승유는 반박하기를 "깨달음은 유有가 표상된 것이므로 점진적으로 습득될 수 없다. 그런데 배움을 통하여 나아간다는 것은 그 빛이 진행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만약 그 빛에 의하여 나아가지 않는다면 배우지 않은 것과 같다. 나날이 그 빛이 진행한다면 점오漸悟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라고 하였다. 승유는 배움을 통해서 나아간다는 것은 그 신성한 빛이 진행하는 것이므로 배움은 점오漸悟라고 보았다. 이에 대하여 사령운은 반박하기를 "빛明은 점진적으로 나아가지 않으나 믿음信은 가르침에서 일어난다. 가르침으로부터 배운 믿음은 빛으로 인하여 나날이 진행한다. 그 빛은 점진적으로 나아가지 않으므로 무無를 밝히는 것이 아니다. 도道를 향하면 자연히 선심善心이 일어나므로 번뇌가 줄어들고 더러움이 숨는다.그 더러움이 숨음으로 인하여 무無처럼 보이고 악惡이 떠난듯이 보이나 근본적으로 번뇌累가 없어진 것이 아니다. 그러나 단번의 깨달음一悟에 이르면 모든 번뇌가 동시에 사라진다."고 하였다. 배움으로부터 나온 믿음은 번뇌를 감소시키고 더러움을 숨길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무無를 습득한 것이 아니다. 무無는 빛明에 의하여 단번에 터득되는 것이다.그러한 깨달음은 돈頓이지 점漸이 아니다. 이것이 사령운의 포인트이다. 그럼, 참된 깨달음과 거짓 깨달음은 어떻게 구별하는가. <변종론>은 말하기를 "거짓 인식假知은 번뇌가 잠복해 있으므로 깨달음이 항구적이지 않다. 참된 인식眞知은 고요히 빛나며 항상 리理에 머물면서 작용한다. 번뇌는 저절로 없어지지 않는데 어찌 번뇌를 없앨려고 리理를 구하겠는가. 리理가 마음에 머물러도 번뇌가 없어지지 않으니 장차 어떻게 해야하는가. 번뇌는 마음으로 인因하여 일어난다. 마음이 번뇌를 일으키는 이유는 마음이 어둡기 때문이다. 배운 자는 번뇌를 매일같이 숨긴다. 숨은 번뇌가 오래되면 번뇌는 소멸한다. 번뇌가 소멸되었다는 것은 번뇌가 숨어있었기 때문이다. 숨은 번뇌와 소멸된 번뇌는 겉모습은 동일하나 그 속은 다르므로 살피지 않으면 안된다. 소멸된 번뇌의 본체는 자신의 질료와 형상物我를 완전히 잊고 유무有無를 일관一觀하는 것이지만 숨은 번뇌의 상태는 자기와 타자를 구별하면서 실實과 공空에 차이를 둠으로서 속박에 빠지는 것이다. 무無와 유有가 하나로 통일되고 질료와 형상物我이 동일하게 되는 것은 빛에 따른 것이다."고 하였다. 깨달음은 유有를 초월하지만 유有를 통해서 배운 것이 표상된 경지이다. 배움을 통해 나온 믿음은 날로 진행하는 것이지만 빛明에 의하지 않고는 믿음이 드러나지 않는다. 잠복된 번뇌는 유有와 무無, 질료와 형상物我, 실實과 공空, 자기와 타자가 통일됨으로써 소멸하여 믿는 내용이 드러나는 것이다. 도생은 말하기를 "배움으로부터 믿음이 생기므로 모르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지식을 알더라도 자아을 표상하는 리理가 드러나지 않으면 쓸모없다. 자아에 다다름으로써 피아를 습득하니 어찌 나날이 발전이 없겠는가. 그러나 아직 자아를 아는 데 미치지 못했다면 어찌 빛이 유有를 갈라 밝히겠는가. 밖에서 리理를 본 것만으로는 몽매와 다름없다. 지식이 자기 안에 있지 않으므로 능히 비출 수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다. 배움으로부터 믿음을 얻고 그 믿음을 통해 리理를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믿음은 단지 지식일뿐 자신의 경험과는 상관없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을 통하여 결국 자아를 알게 된다. 그러한 앎은 반드시 빛을 통한 지식이다. 도생에 따르면 그러한 지식을 얻으면 나날이 발전하게 된다. 이것이 도생의 포인트이다. 혜림慧琳에 따르면 부처가 점오漸悟를 강조한 이유는 육체의 수양때문이었고 공자가 점오漸悟를 논하지 않은 이유는 도道의 관점에 섰기 때문이었지 오랑캐夷만이 점오漸悟에 구속되고 중국인만이 돈오頓悟를 신봉하는 것이 아니다. 또 혜원에 따르면 부처는 중생의 자질이 얄팍하고 깨달음의 길이 멀기 때문에 점오설漸悟說을 수립했으나 중생은 한번 도약하여 큰 깨달음을 얻을 수 있으니 돈오설頓悟設 또한 수립했다고 보았다.





<참고문헌>

펑유란. 박성규 역, 중국철학사.





2012년 6월 19일 화요일

6. 동중서: 음양오행陰陽五行, 천인감응론天人感應論

1. 역사적 맥락에서 본 동중서

<한서漢書>에 따르면 동중서董仲舒는 한漢나라 때 사람으로서 현재 허베이 성城의 광천 사람이다. 동중서는 어려서 공자의 <춘추>를 공부했고 효경제 때 박사가 되었다. 동중서는 얼굴을 직접 대면하지 않은 채로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3년 동안 두문불출할 정도로 학문에 전념하였다. 동중서는 예禮가 아니면 행하지 않았으므로 선비들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았다. 재미있게도, 옛날 은殷나라의 도道가 해이헤지자 문왕은 <주역>을 해설하였고, 그후 주周나라의 도道가 헤이헤지자 공자는 <춘추>를 짓고 도道를 빛나게 하였다. 동중서는 진시황秦始皇 분서 이후 학문을 계승하여 육경六經을 분석하고 음양陰陽의 학설을 밝히면서 유가儒家의 영수가 되었다. 동중서는 <춘추번로春秋繁露>를 남겼다.


2. 신天, 음양 오행陰陽 五行

동중서가 말하는 하늘天은 물질적인 하늘天을 가리키기도 하고 의지를 갖고있는 자연신天을 가리키기도 한다. 동중서는 말하기를 "하늘天, 땅地, 음, 양, 목, 화, 토, 금, 수에 사람을 덧붙인 열十은 완전한 신天의 수數이다."라고 하였다. 동중서는 모든 사물은 시원을 갖고 있다고 하면서 그것을 원元이라고 하였다. 동중서는 말하기를 "일원一元이란 태초이다. 오직 성인聖人만이 사물을 일一에 귀속시켜 원元에 다다른다. 원元은 근원原과 같은 것으로서 천지天地의 시작부터 종말까지 관통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원元이란 모든 사물의 원자로서 사람의 원元도 거기에 속한다. 원元은 천지天地가 생성되기 이전에 존재했다."고 하였다. 원元은 세계天地가 생성되기 이전에 존재했다. 재미있게도 동중서는 자연신의 근원에 대하여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럼, 음양陰陽이란 무엇인가. 동중서는 말하기를 "천지간天地間에 존재하는 기氣가 항상 사람을 적시는 것은 물이 항상 물고기를 적시는 경우와 같다. 다만, 물은 눈에 보이지만 기氣는 눈에 보이지 않고 고요하다는 점이 다르다. 사람이 천지간天地間에 사는 것은 물고기가 물에 의지하여 사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기氣는 어디에나 있으나 물은 더 부드러울 따름이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기氣는 음陰과 양陽으로 나뉘어지는 물질적인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동중서와 음양가가 말하는 기氣는 물질적인 것이 아니다. 그럼, 오행五行에 대하여 살펴보자. 동중서는 말하기를 "하늘天은 오행을 갖고 있으니 첫째, 나무木 둘째, 불火 셋째, 흙土 넷째, 쇠金 다섯째, 물水이다. 이것이 신天의 질서이다. 나무는 불을 낳고 불은 흙을 낳고 흙은 쇠를 낳고 쇠는 물을 낳는다. 나무는 왼쪽, 쇠는 오른쪽, 불은 앞, 물은 뒤, 흙은 중앙에 위치한다. 오행의 운행은 그 자체의 질서에 따르고 오행의 기능은 각각의 역량을 발휘한다. 따라서 나무는 동쪽에서 춘기春氣를 불은 남쪽에서 하기夏氣를 쇠는 서쪽에서 추기秋氣를 물은 북쪽에서 동기冬氣를 주관한다. 따라서 나무는 삶을 쇠는 죽음을 불은 더위를 물은 추위를 흙은 중심을 주관한다. 흙은 자연의 수족이므로 덕성이 풍부하고 아름다워서 어느 한 계절에 한정시킬 수 없다. 목, 화, 금, 수는 토가 없으면 성립할 수 없다. 즉 신맛, 쓴맛, 매운맛, 짠맛이 단맛에 의지하지 않으면 맛을 낼 수 없는 경우와 같다. 단맛이 오미五味의 근본이라면 흙土은 오행의 주재자이다. 천지天地의 기氣는 합쳐져서 하나를 이루지만 음양으로 나뉘고 사계절로 갈리고 오행으로 배열된다. 행行이란 운행한다는 것으로서 저마다의 운행이 다르므로 오행인 것이다. 오행은 다섯 가지 기관으로서 인접한 행行은 상생관계이고 건너 뛴 행行은 상극관계이다."라고 하였다. 오행의 상생相生 관계란 나무는 불을 낳고 불은 흙을 낳고 흙은 쇠를 낳고 쇠는 물을 낳고 물은 나무를 낳는 것을 말한다. 오행의 상극相極관계란 쇠는 나무를 이기고 나무는 흙을 이기고 흙은 물을 이기고 물은 불을 이기고 불은 쇠를 이기는 것을 말한다. 후한後漢 장제章帝 때의 <백호통의白虎通義>에 따르면 나무는 따뜻한 기운을 품고 있으므로 비비면 불을 낳는다. 불은 나무를 태워서 재를 남기므로 불은 흙을 낳는다. 흙이 모이면 산이 되고 산속의 돌에는 쇠가 붙어있으므로 흙은 쇠를 낳는다. 쇠를 녹이면 물이되고 또 쇠의 소재지인 산속에 구름이 일면 습기가 일기 때문에 쇠는 물을 낳는다. 반면에 나무가 흙을 이기는 이유는 응집된 것이 흩어진 것을 이기기 때문이고 흙이 물을 이기는 이유는 고체가 액체를 이기기 때문이고 물이 불을 이기는 이유는 많은 것이 적은 것을 이기기 때문이고 불이 쇠를 이기는 이유는 정밀한 것이 단단한 것을 이기기 때문이고 쇠가 나무를 이기는 이유는 강한 것이 부드러운 것을 이기기 때문이다.


3. 사계절

동중서에 따르면 목, 화, 금, 수는 사계절의 기氣를 각각 주관하고 흙은 중앙에서 그것을 보좌한다. 사계절의 기氣가 성하고 쇠하기 때문에 계절의 변화가 생긴다. 그 변화는 음양에 따른 결과이다. 동중서는 말하기를 "하늘天의 상도常道는 사물이 상반되게 일어나지 않는 것인데 이것이 통일一이다. 통일되어 다르지 않는 것이 천행天行이다. 음과 양은 서로 상반되는 사물이다. 따라서 하나가 나아가면 다른 하나는 들어가고 하나가 왼쪽에 있으면 다른 하나는 오른쪽에 있다. 봄에는 남쪽으로 향하고 가을에는 북쪽으로 향하고 여름에는 앞에서 교차하고 겨울에는 뒤에서 교차한다. 함께 나아가지만 길이 다르고 서로 교차하더라도 각각 다르게 주관한다. 이것이 음양陰陽의 방식이다."라고 하였다. 또 동중서는 말하기를 "양기陽氣는 북동쪽에서 일어나 남쪽으로 진행하고 서쪽으로 돌아 북쪽으로 숨는다. 음기陰氣는 남동쪽에서 일어나 북쪽으로 진행하고 서쪽을 돌아 남쪽에서 숨는다. 양陽은 남쪽에서 활동하고 북쪽에서 휴식한다. 음陰은 북쪽에서 활동하고 남쪽에서 휴식한다. 양陽이 활동하면 큰 더위로 뜨거워지고 음陰이 활동하면 더 큰 추위로 얼어붙는다."고 하였다. 재미있게도 이와같은 동중서의 주장은 일반적인 통념과는 다르다.<회남자>에 따르면 양기陽氣는 북동쪽에서 일어나서 남서쪽에서 다 없어지고, 음기陰氣는 남서쪽에서 일어나서 북동쪽에서 다 없어진다."고 하였다. 이것이 일반적인 통념이다. 동중서는 말하기를 "세계는 항상 하나一로부터 음陰이 되고 하나一로부터 양陽이 되는 것이다. 양陽은 하늘天의 덕德이고 음은 하늘天의 형벌罰이다. 천도天道은 세 계절을 생성과 삶에 할당하고 한 계절을 상실과 죽음에 할당했다. 죽음이란 모든 사물이 시들어 떨어진다는 것이고 상실이란 음기의 슬픔과 비애를 말한다. 하늘天은 기쁨과 분노한 기氣와 슬픔과 즐거움의 마음을 갖고 있는데 이것은 인간과 같다. 인간은 유類와 합하면서 하늘天과 통일된다."라고 하였다.

4. 천인감응론天人感應論

동중서에 따르면 하늘天과 인간은 동류同類이다. 동중서는 말하기를 "기氣보다 더 정밀한 것은 없고 땅보다 더 풍부한 것은 없고 신天보다 더 신비로운 것은 없다. 인간은 하늘天로부터 명命을 받았기 때문에 다른 모든 사물보다 고귀하다. 다른 사물들은 막혀있어서 인의仁義를 행할 수 없고 오직 인간만이 인의仁義를 행할 수 있다. 인간의 본질은 하늘天에 따른 것이다. 인간의 형체는 천수天數에 따른 결과이고 인간의 혈기血氣는 천지天志가 합해진 결과이고 인간의 덕행德은 천리天理가 의義롭게 변화한 것이다. 인간의 선호와 혐오는 신天의 따뜻함과 맑음에 따른 것아고 인간의 기쁨과 분노는 하늘天의 춥고 더운 것에 따른 것이다. 신天의 부속이 인간에게 있으니 인간의 정성情性은 하늘天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하늘天은 효제孝悌로써 모든 사물을 생성하고, 현상세계地는 의식衣食으로써 모든 사물을 양육하고, 인간은 예악禮樂으로써 모든 사물을 완성한다. 하늘天, 땅地, 인간人, 이 세가지는 서로 손발이 되어서 한 몸을 이루고 있다."고 하였다. 인간의 본질은 신성天性에 있다. 인간은 알든지 모른든지 현상세게에서 천성天性을 실천하고 있다. 동중성의 포인트는 신인합일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5. 성性, 정情

인간의 마음에는 성性, 정情 두가지가 있다. 동중서는 말하기를 "성性,정情은 하늘天의 음陰과 양陽에 상당한다. 인간이 성性, 정情을 갖고있는 것은 하늘天이 음陰, 양陽을 갖고있는 것과 같다. 인간의 질료質를 논하면서 정情을 빠뜨린다면 하늘天의 양陽을 논하면서 그 음陰을 빠뜨린 것과 같다."고 하였다. 성性이 밖으로 표현된 것이 인仁이다. 정情이 밖으로 표현된 것이 탐貪이다. 동중서는 말하기를 "인간에게는 진실로 인仁과 탐貪이 있는데 인仁과 탐貪의 기氣는 모두 우리 몸身에 있다. 몸은 하늘天로부터 취한 이름이다. 하늘天에게 음陰과 양陽의 작용이 있듯이 사람에게는 인仁과 탐욕貪의 두 성性이 있다."고 하였다. 동중서가 말하는 인仁은 성性의 표현이고 탐貪은 정情의 표현이다. 인간의 질료質에는 성性도 있고 정情도 있고 또 인仁과 탐貪도 있으므로 인간은 선善하다고만 할 수 없다. 동중서는 말하기를 "선善은 쌀과 같고 성性은 벼와 같다. 벼가 쌀을 산출하지만 벼를 쌀이라고  할 수 없듯이 성性이 비록 선善을 산출하지만 성性을 선善이라 할 수 없다. 선善은 하늘天에 연결되어 밖으로부터 들어온 것이지 인간 내부에 있는 것은 아니다. 하늘天은 인간의 한계 밖에 있다. 이 한계 바깥이 왕교王敎이다. 왕교은 성性 밖에 존재하지만 성性은 양성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따라서 성性은 선善한 질료이지만 선善이라고 할 수는 없다. 벼에서 쌀을 생산함은 성性에서 선善을 만드는 일로서 성인이 하늘天과 연결되어 진행된 것이지 성性, 정情 자체가 생성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고 하였다. 인간은 노력을 통하여 성性으로써 정情을 제어하여야만 선善한 경지에 이를 수 있다. 동중서는 말하기를 "마음은 악惡을 규제하여 밖으로 드러나지 않게 한다. 마음은 바로 규제자이다. 하늘天이 음陰을 규제하듯이 몸은 정욕을 규제하므로 천도天道와 매한가지이다. 하늘天이 억제하는 것은 몸도 억제하기 때문에 하늘天과 몸은 같다고 말한다. 천성天性은 교화敎에 의존하지 않으면 끝내는 규제될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고 하였다. 교화敎란 성性으로써 정情을 금지하는 것이므로 인간이 하늘天과 연결되어 하늘天을 본받는 것이다. 동중서의 성설性說은 맹자와 순자를 결합시키고 있으나 맹자의 성선설性善說에 다소 기울어졌다. 맹자처럼, 동중서도 인간의 질료에는 본디 선단善端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다만 성性에는 선단善端이 있을 뿐이지 그것이 선善이라고는 하지 않았다. 그럼, 성性에는 선단善端이 있고 마음心에는 선善한 질료質가 있는데 왜 인간본성이 선하지 않은가. 동중서는 말하기를 "그것이 아니다. 달걀 속에 병아리가 잠재하지만 달걀은 병아리가 아닌 것과 같다. 어떤 사람은 인간의 성性은 선善하다고 말하고 또 어떤 사람은 선하지 않다고 말한다. 성性에는 선단善端이 있어서 어린아이가 부모들 사랑하는 것은 맹자가 말한 선善이고, 삼강三綱 오기五紀를 따르고 팔단八端의 이치에 통달하여 널리 사랑하고 예禮을 좋아하면 선善인 경우는 성인聖人의 선善이다. 맹자는 금수와 비교했기 때문에 성性은 이미 선善하다고 했고 나는 성인聖人에 비교했기 때문에 성性은 아직 선善하지 않다고 했다. 즉, 성性 너머에 선善이 있고 선善 너머에 성인聖人이 있다."고 하였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선단善端 이상을 갖고 나오기도 하고 선단善端이 거의 없이 태어나는 인간도 있다. 공자가 말한 상지上智와 하우下愚가 그것이다. 동중서는 말하기를 "성性은 상지上智나 하우下遇에 해당하지 않고 그 중간의 성품을 두고 하는 말이다. 성性이란 보통사람의 성性을 말한다. 보통사람의 성性은 달걀의 경우와 같다. 암닭이 20일을 품은 후에야 달걀이 병아리가 되듯이 성性은 교화敎에 의하여 훈도된 다음에 선善이 될 수 있다. 선善은 교화의 훈도에 의하여 도달할 수 있는 것이지 인간의 바탕 질료 자체로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동중서의 성설性說은 공자, 맹자, 순자를 융합한 것이겠다.


6. 개인과 사회의 윤리

인간 바탕 질료의 선단善端을 개발하여, 선善으로 완성시키기 위한 덕德으로써 인의仁義가 중요하다. 신天은 인성人性을 만들면서 인의仁義로써 창피함을 알도록 하였다. 따라서 짐승처럼 자연스럽게 살거나 구차하게 이익만을 좇으며 살도록 한 것이 아니다. 동중서는 말하기를 "인仁으로써 타인을 편안하게 하고 의義로써 나를 바로 잡는다. 인仁은 타인을 향한 것이고 의義는 나를 향한 것이다. 보통 사람은 이 이치를 살피지 못하여 인仁으로써 자기에게 관대하고 의義로써 타인을 규제했다. 이러한 혼란에 빠졌던 까닭은 타인과 자기에게 적용할 이치를 분간하지 못하여 인仁과 의義가 베풀어질 대상을 성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춘추春秋>는 인仁의 기준으로서 타인을 사랑함에 두었지 자기를 사랑함에 두지 않았고, 의義의 기준으로서 나를 바로잡음에 두었지 타인을 바로잡음에 두지 않았다. 왕자王者는 인仁이 오랑케에까지 미치고 패자覇者는 인仁이 제후에까지 미치고 안정된 군주君主는 인仁이 자기 영역에까지 미치고 위태로운 군주君主는 인仁이 측근에만 미치고 망국의 군주君主는 인仁이 자기 한 몸에만 그친다. 인仁은 義와 다르다. 인仁은 밖으로 나가고 의義는 안으로 들어온다. 인仁은 멀리 미치는 일이 중요하고 의義는 가까이 적용하는 일이 중요하다. 사랑이 타인에게까지 이를 때 인仁이고 의로움이 자기에게 있을 때 의義이다. 인仁의 대상은 타인이고 의義의 대상은 자기이다."라고 하였다. 개인의 윤리에는 인의仁義의 덕德 이외에도 지혜智의 덕德이 필요하다. 동중서는 말하기를 "가장 중요한 것이 인仁이고 가장 필요한 것이 지智이다. 인仁하더라도 지헤롭지 못하면 분별없이 사랑하고 지혜롭지만 인仁하지 못하면 알더라도 행하지 못한다. 따라서 인仁은 인류를 사랑하게 하고 지혜智는 인류의 해악을 제거할 수 있게한다. 그럼, 지智란 무엇인가. 지智란 선천적인 말先言이 후천적으로 합당하게後當 통일된 것이다. 지혜로운 자는 화복禍福을 멀리까지 통찰하며 이해利害를 신속히 파악하고 사물의 변화를 예측하며 사태의 시작을 보고 결말을 인식한다. 말은 적지만 충분하고 함축적이나 이해가 쉽고 간결하지만 예리하고 간략하지만 완벽하고 행동은 법도에 맞고 언어는 임무에 합당하니 이것이 지혜智이다."라고 하였다. 동중서는 인仁, 의義, 지智를 인간 윤리의 덕목으로 보았다. 한편 <중용>은 지智, 인仁, 용勇의 세가지 덕을 달덕達德으로 여겼다.

+ <백호통의>
<백호통의>는 인간의 마음과 덕목과의 관계를 상세히 밝히고 있다. <백호통의>는 말하기를 "성性은 양陽의 혜택이고 정情은 음陰의 변화물이다. 인간은 음양의 기氣를 타고나고 오성五성性과 육정六情을 품고있다. 정情은 정精이고 성性은 생生이다. 오성五性은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이다. 인仁이란 모질지 않는 것으로 타인에 대한 사랑이고 의義란 올바름으로서 중도에 맞게 결단을 내리는 것이고 예禮란 도道를 실천하여 격식을 완성하는 것이고 지智란 지식에 의한 통찰력으로 사물에 미혹되지 않고 미래의 사태를 인식하는 것이고 신信이란 참誠되고 변함이 없는 것이다. 인간이 태어날 때 8괘의 본체에 감응하여 오기五氣를 얻어 법도로 삼은 것이 인, 의, 예, 지, 신이다. 육정六情이란 희喜, 노怒, 애哀, 락樂, 애愛, 오惡이다. 인간은 본래 육률六律과 오행五行의 기氣를 타고 나왔으므로 몸에는 육부와 오장이 있고, 이것으로부터 성정性情이 유발된다. 오장五藏은 간장, 심장, 비장, 폐장, 신장을 말한다. 간장은 인, 심장은 예, 비장은 신, 폐장은 의, 신장은 지에 상당한다. 간의 상징은 나무이고 그 색은 푸르고 지엽이 있다. 인은 삶을 좋아하는 것인데 동쪽은 양이고 만물이 탄생한다. 심장의 상징은 불이고 색은 불고 예리한다. 예에는 존비尊卑가 있고 남쪽은 존귀하다. 비장의 상징은 흙이고 그 색은 누렇고 흙은 만물을 낳고 양육하므로 사사로움이 없고 신실의 최고점이다. 폐의 상징은 쇠이고 의義에 상당한다. 의義란 결단을 내리는 것인데 서쪽은 쇠이고 죽어서 만물을 이루고 그 색은 하얗다. 신장의 상징은 물이고 지智에 해당한다. 지혜智란 의혹이 없는 것인데 물 역시 의혹이 없이 전진하고 북쪽이다. 신장의 색은 검고 물은 음이기 때문에 신장은 쌍이다. 그럼, 육부六府란 무엇인가. 쓸개, 소장, 위, 대장, 방광, 삼초를 말한다. 부府란 오장 궁전의 보고한 뜻이다. <예운>에 따르면 육정은 오성을 떠받쳐서 완성된다고 하였다. 서쪽은 모든 사물의 완성을 주관하므로 기쁨이고 동쪽은 모든 사물의 생산을 주관하므로 분노이고 북쪽은 양기가 시작되므로 좋아함이고 남쪽은 음기가 시작되므로 미움이고 위는 즐거움이 많고 아래는 슬픔이 많다."고 하였다. 천인합일天人合一의 관점에서 여러 덕목은 이와같은 근거가 있었던 것이다.

+ 삼강 오기三綱 五紀
동중서는 사회윤리와 관련하여 말하기를 "모든 사물은 반드시 합合에 이른다. 위는 아래와 짝하여 합을 이루게 되고 왼쪽은 오른쪽과 짝하고 앞은 뒤와 짝하고 겉은 속과 짝하고 아름다움은 추함과 짝하고 순종은 거역과 짝하고 기쁨은 분노와 짝하고 추위는 더위와 짝하고 낮은 밤과 짝하여 합合을 이룬다. 음은 양과 짝하고 아내는 남편과 짝하고 아들은 아버지와 짝하고 신하는 임금과 짝하니 모든 사물은 저마다 짝하고 짝에는 각기 음양이 있다. 군신, 부자, 부부의 의義는 모두 음양의 도道에서 취한 것이다. 임금은 양이고 신하는 음이며 아버지는 양이고 아들은 음이며 남편은 양이고 아내는 음이다. 인의仁義의 제도와 법칙의 묘수數는 신天으로부터 취한 것이다. 하늘天은 임금으로써 보호하고 기르며 현상세계地는 신하로써 보조하고 지탱한다. 양은 남편으로써 낳고 음은 아내로써 기른다. 봄은 아버지로써 낳고 여름은 아들로써 양육한다. 이 세 벼리綱의 왕도王道는 하늘天로부터 나온 것이다."고 하였다. 임금은 신하의 벼리요 아버지는 아들의 벼리요 남편은 아내의 벼리였으므로 신하, 아들, 아내는 부속품이었다. 인간은 이러한 인성人性을 다 발휘하여 진정한 인간이 될 수 있었다. 공자는 모든 사물 가운데 인간이 가장 고귀하다고 하였다. 하늘天이 부여한 천성天性을 이해하면 자신이 모든 사물보다 고귀함을 알게된다. 그런 후에 인의仁義를 알게되고 인의仁義를 안 후에 예禮를 중시한다. 그런 후에 선善에 거처하고 선善에 거처한 후에 즐거이 예禮를 좇는다. 즐거이 예禮를 좇을 수 있어야 비로소 군자君子이다. 공자는 이것을 두고 계시命을 알지 못하면 군자가 될 수 없다고 했던 것이다. 인간에게 윤리와 도덕이 없다면 뭇 생물과 구별이 없게 되고 금수와 다를 바 없다.


7. 정치철학

동중서는 인간의 성性은 완벽하지 못한채로 태어나므로 지혜로운 왕이 인간의 성性을 교화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동중서는 말하기를 "하늘天이 인간의 성性을 만들 때 선한 질료質는 주었지만 아직 선善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왕으로 하여금 선善하게 교화하도록 하였다. 이것이 천의天意이다. 왕은 천의天意을 이어받아 백성의 성性을 완성하는 것을 임무로 하는 자이다."라고 하였다. 왕은 천명天命을 받아서 인간을 다스리는 자이므로 지위가 매우 높고 책임이 막중하다. 동중서는 말하기를 "왕은 오로지 하늘天을 본받고 때時에 따라서 이루고 계시命에 따라서 법을 세우고 수數에 따라서 일을 도모하고 도道에 따라 다스리니 그것이 법이고 그러한 의지는 인仁으로부터 나온 것이다."고 하였다. 왕은 하늘天을 본받고 때時를 기다린다는 것이다. 동중서는 말하기를 "성인聖人은 천의天意에 따라 다스린다. 따라서 경사慶로써 봄의 따뜻함에 따르고 포상賞으로써 여름의 더위에 따르고 징벌罰로써 가을의 서늘함에 따르고 형벌刑로써 겨울의 추위에 따른다. 왕은 경慶, 상賞, 벌罰, 형刑으로써 덕德을 완성한다. 하늘天에게는 춘, 하, 추, 동의 사계가 있듯이 왕에게는 경, 상, 벌, 형의 사정四政이 있어서 서로 상통하는 도道가 하늘天과 인간에게 공존한다."고 하였다. 왕은 하늘天을 승계하여 인간들의 선善을 완성시켜야 한다. 동중서는 말하기를 "하늘天의 령令은 계시命이므로 성인이 아니면 계시命을 이행할 수 없다. 본 바탕 질료가 성性이며 성性은 교화되지 않으면 완성되지 않는다. 반면에 인간의 욕망은 정情이며 제도制度가 아니면 절제되지 않는다. 따라서 왕은 천의天意을 이어받아 계시命에 순종하고 백성을 교화함으로써 성性을 완성한다. 또 바른 법도法度로써 상하간의 질서를 세우고 욕망의 방출을 제어한다. 이로써 대본大本이 빛난다."고 하였다. 왕이 하는 일은 하늘天의 뜻을 이어받아 백성의 성性을 교화하는 일이다. 동중서는 말하기를 "세 달이 한 계절을 완성하고 왕은 3공公으로 자신을 보좌하게 하였다. 완전한 수를 세우고 4번 중복함으로써 과실을 없앴다. 천수天數를 살피는 것은 도道를 살피는 것이다. 인간은 하늘天로부터 태어나고 하늘天의 몸은 나뉘었으므로 크고 작고 두껍고 가는 차이가 있는 것이 인간의 기氣이다. 선왕先王은 기氣의 차이에 따라 4단계로 선발하였다. 따라서 3공公은 성인聖人 가운데서 선발하고 3경卿은 군자君子 가운데서 선발하고 3대부大夫는 선인善人 가운데서 선발하고 3사士는 정직한 사람 가운데서 선발했다."고 하였다. 벼슬은 천수天數에 '따라 분리되었던 것이다. 동중서는 말하기를 "신의 도天道에는 질서와 법칙이 있으므로 성인聖人은 하늘天을 바라보며 행한다. 성인이 호好, 오惡, 희喜, 노怒를 살피면서 정령을 포고하고 풍속을 교화하는 것은 신天의 뜻에 부합하려 함이다. 또 천박함, 화려함, 허위를 부끄러워하고 정성, 중후함, 충직, 신실함을 중시하고 아부, 파당, 편견, 사사로움을 거부하고 사랑과 이익 공유를 찬양하는 것은 신의 뜻에 부합하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동중서는 말하기를 "아름다운 자의 인仁은 하늘天로부터 나온다. 하늘天은 인仁이다. 하늘天은 모든 사물을 생성하고 양육하고 완성한다. 하늘天의 인仁은 한량이 없다. 인간은 하늘天의 명命을 받아서 인仁을 실천하므로 부자와 형제간에 친애, 충직, 자비, 신실, 은혜의 마음으로 예의와 염치廉恥를 행한다."고 하였다. 하늘天은 인간을 이롭게 도모하므로 왕은 하늘天을 본받아 땅地에서 그것을 완성하려고 도모한다. 이것은 묵자의 학설과 유사한 면이 있다.

+ 불평등
동중서는 말하기를 "공자가 가난을 걱정말고 불평등을 걱정하라고 했듯이 쌓아두는 사람이 있으면 텅텅 빈 사람이 있게 된다. 부유하면 교만하여 횡포해지고 가난하면 근심하여 도둑질하게 된다. 성인은 그러한 실정을 통찰하였으므로 인도人道를 세워 교만하지 않게 하고 근심하지 않게 하였다. 성인은 부의 균등을 모색함으로써 재물이 결핍되지 않게 하고 위아래를 안정시켰으므로 세상은 쉽게 다스려졌다. 그러나 이제 인간들은 욕망을 제멋대로 추구하여 그 끝을 찾을 수 없으므로 군자들은 재물이 딸렸고 서민은 수척해갔지만 부자는 이익을 더욱 탐하고 가난한 자는 날마다 법령을 위반하였으므로 세상은 다스리기 어려워졌다. 이미 큰 것이 있음에도 작은 것을 겸하는 것은 하늘天이 바라는 바가 아니다. 성인은 하늘天을 본받아 제도를 만들면서 큰 봉록을 누리는 자가 사업을 펼치며 작은 이익을 겸하는 것을 금지하도록 했으니 이것이 천리天理이다."라고 하였다. 동중서는 이상적인 토지분배제도로서 정전법을 주장하였다. 진秦나라가 망하고 한漢나라가 등장하면서 귀족정치가 무너지고 자유경쟁한 결과 신흥부호들이 늘어나고 또 가난한 자들 또한 늘어났다. 동중서를 비롯한 지식인들은 이러한 폐단을 시정하려고 했던 것이다.

+ 재이災異
동중서는 말하기를 "천지天地의 사물에 이상한 변화의 징조를 가리켜 이異라고 한다. 이異는 재災로써 현실화된다. 이異는 하늘天의 경고이고 재災는 하늘天의 응징이다. <시詩>에 따르면 하늘天의 경고를 두려워한다고 니와있다. 재이災異의 근본은 국가의 잘못으로부터 나온다. 국가가 잘못하면 신天은 경고와 재해를 내린다. 경고했음에도 고치지 않으면 놀라운 괴이怪異가 생기고 그것을 무시하면 재난이 닥친다. 따라서 천의天意는 인仁이지 함정에 빠뜨리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인간의 행위가 옳지 못하면 하늘天은 경고하고 재난을 내린다. 이것이 동중서의 포인트이다. 재미있게도 당시 동중서는 요동지방의 한漢나라 조묘祖廟와 한 고조의 능에서 연이어 불이 나자 이것을 재이災異로 보고 상소하였다. 한무제는 그 글을 보게 되었다. 근데, 동중서의 제자는 그 글을 힐난하였으므로 동중서는 사형의 위기에 처했으나 한 무제가 사면해주었다. 동중서 철학의 포인트는 신天과 인간은 똑같고 그 도道는 하나라는 데 있다. 동중서는 하늘天을 인격화하면서 자연현상과 사회현상을 일치시켰다. 이것이 동중서의 천인감응론天仁感應論이다. 반면에 순자는 하늘天과 인간人 간의 구별을 명확히 하고 자연현상과 사회현상을 명백히 구별하였다. 동중서는 말하기를 "하늘天에게 음양이 있듯이 인간에게도 음양이 있다. 천지天地의 음기가 일어나면 인간의 음기도 그에 상응하여 일어나고 또 인간의 음기가 일어나면 그에 상응하여 천지天地의 음기도 마땅히 일어나는데 이 도道는 하나이다. 이 이치를 깨달은 사람은 비를 내리게 하려고 음기를 요동시켜 음기를 일으키고 비를 그치게 하려면 양기를 요동시켜 양기를 일으킨다. 재앙이나 복 따위의 발생원리도 이 이치에 따른다. 형벌이 바르게 적용되지 못하면 사기邪氣가 일어난다. 아래에서 사기邪氣가 쌓이면 위에서 원망과 증오가 모인다. 위 아래가 불화하면 음양이 꼬이고 어그러져 불길한 징조가 나타나고 이로부터 재이災異가 일어난다."고 하였다. 인간의 행위가 옳지 못하면 음양의 기氣가 기계적으로 감응하여 비상한 현상이 일어난다. 동중서에 따르면 재이災異의 원인은 인간의 행위에 있다.

+ 천天, 지地, 인人
인간은 아래로 모든 사물을 관장하고 위로는 하늘天과 함께 셋을 이룬다. 따라서 다스림과 어지러움, 움직임과 고요함, 따름과 거스름의 기氣는 음양이 덜거나 보태어져서 사해四海가 요동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물의 이치는 귀신의 일처럼 이해하기 어렵다. 가령 땅에 몸을 던지면 죽거나 다치고 땅을 요동시킬 수 없지만 진흙에 던지면 그 주변을 요동시키고 물에 던지면 더 멀리 요동시킨다. 즉, 사물이 부드러울수록 더 변동시키고 요동시키기 쉽다. 기화氣化는 이보다 더하다. 임금이 백성을 쉬지않고 요동시키면 그 기氣가 천지天地와 뒤섞여 잘 다스리지 못하게 된다. 세상이 태평하고 백성이 화합하고 뜻이 어렵지 않으면 기氣가 바르게 되어 세계天地가 정밀하고 모든사물이 아름다워진다. 세상이 혼란해지고 백성이 반목하고 뜻이 어려우면 기氣가 거슬리고 천지天地가 손상되어 재해의 기氣가 일어난다."고 하였다.


8. 역사철학

동중서는 말하기를 "이른바 새 왕王이 제도를 고친다는 것은 도道를 고치는 것이 아니다. 천명天命을 좇아 역성易姓 혁명으로 왕조를 바꾼 것은 이전 왕을 계승한 경우가 아니다. 따라서 이전 제도를 그대로 따르고 아무 것도 고치지 않는다면 이전 왕王과 구별이 없게된다. 천명天命으로 왕이 되었다는 것은 하늘天에 의하여 드높여졌다는 뜻이다. 따라서 거처를 옮기고 칭호를 바꾸고 정삭正朔을 개정하고 복색을 바꾸는 이유는 하늘天의 의지에 따라 자신을 드높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강大綱, 인륜, 도리, 정치, 교화, 습속, 문의文義는 옛 것과 같으니 무엇을 고치겠는가. 왕王은 명목상 제도를 고칠 뿐 실제의 도道는 바꾸지 않는다. 공자는 무위無爲로써 다스린 사람은 순舜임금이라고 했으니 순舜임금은 직전의 요堯임금의 도道로써 다스렸다. 즉, 도道는 바뀌지 않는다는 비근한 예이다."라고 하였다. 도道의 근원은 하늘天로부터 비롯되므로 하늘天이 변하지 않듯이 도道 또한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도道는 바뀌지 않는 것이다. <벡호통의>는 말하기를 "왕旺이 한번은 질質 한번은 문文으로 교대함으로써 세계天地를 이어받고 음양에 순응하는 것이다. 양의 도가 극에 이르면 음의 도가 이어받고 음의 도가 극에 이르면 양의 도가 이어받는다. 두 양陽과 두 음陰이 연속하여 계승할 수 없음을 밝힌 것이다. 질質은 하늘天을 본받고 문文은 땅地을 본받을 따름이다. 따라서 하늘天은 질質이 되고 땅地은 하늘天에 따라 변화되고 양육되고 완성되니 문文이 되는 것이다. <상서대전>에도 왕王이 한번은 질質 한번은 문文으로 교대하는 것은 천지天地의 도道에 의거한 것이라고 했다. <예삼정기>에도 질質은 하늘天을 본받고 문文은 땅地을 본받는다고 했다. 제왕이 처음에 흥기하면 먼저 질質을 추구하고 다음에 문文을 추구한다. 즉 먼저 질성質性이 있고난 후에 문장文章이 있게 된다. 한 왕조가 질質을 숭상하면 다음 왕조는 문文을 숭상하여 직전 왕조의 폐단을 시정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둘로 반복된다는 의미이다. 셋으로 반복되는 것은 삼통, 즉 삼정三正이다. 넷으로 반복되는 것은 상商, 하夏, 질質, 문文이다. 여기서 상, 하는 왕조 이름이 아니다.

+ 상商, 하夏, 질質, 문文
상商을 기본으로 하여 하늘天을 좇아서 왕王이 된 경우, 그 도道는 양기가 넘치고 부모를 친애하고 인仁과 소박함을 추구한다. 왕은 아들을 후계자로 삼고 친동생을 후대하며 첩은 아들로 인햐여 귀해지고 관례는 아버지가 아들을 위하여 자字를 짓고 혼례는 부부 분별의 예가 세세하고 부부는 마주않아 식사하고 상례는 부부를 따로 물으며 제례은 소와 양의 생고기를 먼저 올리고 부부의 위패는 소목昭穆으로 나누어 배열한다. 다음, 하夏를 기본으로 땅地을 좋아서 왕이 된 경우, 그 도道는 음기로 나아가고 귀인을 존중하고 의리와 절도를 추구한다. 따라서 왕은 손자를 후계자로 세우고 맏아들을 후대하므로 첩과 그녀의 아들은 귀하지 않다. 관례는 어머니가 아들에게 자字를 지어주고 혼례는 부부의 분별의 예가 세세하고 나란히 앉아서 식사한다. 상례는 부부를 합장하고 제례는 삶은 고기를 먼저 올리고 아내의 위패는 남편과 함께 배열한다. 다음, 질質을 기본으로 하늘天을 좇아 왕王이 된 경우, 그 도道는 양기가 넘치니 부모를 친애하고 바탕質과 사랑愛을 추구한다. 왕은 아들을 후계자로 세우고 친동생을 후대하며 첩은 아들로 인하여 귀해지고 관례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자字를 지어주고 혼례는 부부 분별의 예가 세세하고 마주앉아 식사한다. 상례는 부부를 따로 묻고 제례는 쌀을 먼저 올리고 부부의 위패는 소목으로 나누어 배열한다. 다음, 문文을 기본으로 현상세계地를 좇아 왕이 된 경우, 그 도道는 음기로 나아가니 귀인을 존중하고 예禮와 형식文을 추구한다. 왕은 손자를 후계자로 세우고 맏아들을 후대하고 첩과 그녀의 아들은 존귀하지 않다. 관례는 어머니가 아들에게 자字를 지어주고 혼례는 부부의 예가 세세하여 나란히 앉아서 식사하고 상례는 부부가 합장하고 제례는 울창주를 먼저 올리고 아내의 위패는 남편과 함께 배열한다."고 하였다. 실제 역사에서 보면 순舜임금은 상商을 기본으로 하늘天을 좇아 왕이 되었고 우禹임금은 하夏를 기본으로 땅地를 좇아 왕이 되었고, 탕湯왕은 질質을 기본으로 하늘天을 좇아 왕이 되었고, 문왕은 문文을 기본으로 땅地을 좇아 왕이 되었다. 이러한 순환이 넷으로 반복되는 것이므로 주周나라의 왕조는 다시 상商을 기본으로 하늘天을 좇아 왕이 된 것이다.

+ 삼교三敎
하夏나라는 충忠을, 은殷나라는 경敬을, 주周나라는 형식文을 추구했다. 공자는 말하기를 "은나라는 하나라의 예禮를 답습했고 주나라는 은나라의 예禮를 답습했으므로 덜고 보태진 바를 알 수 있으니 앞으로 주나라를 계승할 왕조는 이후 100세대 후라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모든 왕조는 이 세가지 준거에 기초하는 것이다. 충忠에 폐단이 생기면 경敬을 숭상하고 경敬에 폐단이 생기면 형식文을 숭상하여 시정하고 형식文에 폐단이 생기면 다시 충忠을 숭상하여 순환하므로 100세대 후라도 알 수 있는 것이다. 충忠은 사람에 기본이 있고 경敬은 땅地에 기본이 있고 형식文은 하늘天에 기본이 있다. 따라서 천인합일天人合一의 관점에서 보면 역사는 신의 의지인 셈이다.






<참고문헌>

펑유란. 박성규 역, 중국철학사.




2012년 6월 18일 월요일

5. 한비자: 명형名形, 세법술勢法術, 상벌賞罰, 성악性惡,

1. 역사적 맥락에서 본 한비자

한비자韓非子는 한韓나라 귀족이었다. 한비자(279B.C.-233B.C.)는 황로黃老사상을 이어받았고 형명법술刑名法術에 능했다. 원래 한비자는 말을 더듬었으나 저술에는 능하였다. 또 한비자는 이사李斯와 함께 순자의 문하였다. 당시 한비자는 한韓나라가 쇠락하는 현실을 보고 왕에게 여러 차례 상소하였으나 왕은 이를 채용하지 않았다. 한편 한비자는 세勢를 장악하여 법法을 정비하여 술術로써 신하를 제어하면서 부국강병을 위한 인재를 구하도록 왕에게 간언하였다. 세勢, 법法, 술術은 제왕의 도구로써 어느 하나도 폐기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한비자는 말하기를 "세勢는 백성의 마음資을 얻는 것이다. 현명한 군주는 신天같이 법제를 시행하고 귀신같이 사람을 쓴다. 신天과 같은즉 잘못이 있을 수 없고 귀신 같은즉 곤경에 빠지지 않는다. 또 세勢가 나아감으로써 위엄이 세워지면 백성은 마음이 거슬릴지라도 아무도 거역하지 못한다. 따라서 그런 연후에야 법을 시행한다."고 하였다. 자고이래로 현명한 군주는 세勢, 법法, 술術을 이용하여 나라를 다스린다. 어것이 한비자의 포인트이다.


2. 춘추전국 교체기의 법

춘추시대에서 전국시대로 전환되면서 법의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관자>는 말하기를 "현명한 군주는 도량度量을 통일하고 표의表儀를 세워 지킨다. 따라서 백성은 그 명령을 따라 지킨다. 법은 현상세계天下의 정식程式이고 모든 일의 표의表儀이다. 관리는 백성의 생명을 보호하고 현명한 군주는 법에 따라 처단한다. 따라서 법에 따라 죄를 물으면 죽음을 당하더라도 원한을 품지 않는다. 또 법에 따라 공功을 평가하면 상賞을 받더라도 감격하지 않는다. 이것이 법法의 이로움이다'라고 하였다. <명법名法>에 따르면 법에 의한 국가 지배는 조치만하면 된다고 하였다. 현명한 군주는 법도法度를 만들었으므로 모든 신하는 올바른 지배에 따라서 간사하지않고 염치없지않다. 백성은 군주가 법에 따라 일처리하는 것을 알고있으므로 관리의 명령이 합법이면 따르고 무법이면 따르지 않는다. 법에 의하여 백성은 관리들과 거리를 두고 아래는 위의 일을 따르므로 간사한 자는 군주를 속일 수 없고 질투하는 자는 나쁜 심보를 쓸 수 없고 아첨꾼은 꾀를 부릴 수 없으며 천리 밖에서도 염치없이 비리를 저지를 수 없다. 또 <명법名法>에 따르면 법도의 제정이 있으면 허위와 사기가 통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한비자는 말하기를 "법술法術을 버리고 자기 마음대로 지배하면 요堯임금이라도 나라를 바로잡지 못할 것이다. 곱자를 팽개치고 대충 헤아리면 해중奚仲도 바퀴 하나를 완성하지 못할 것이다. 또 척촌尺寸을 폐하여 길이의 차이가 모호해지면 왕이王爾 또한 반도 적중하지 못할 것이다. 평범한 군주라도 법술法術을 지키고 서툰 장인이라도 척촌尺寸을 쓴다면 만에 하나의 실수도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현명한 군주는 법을 제정하여 공포하고 백성들로 하여금 준수하게 한다. 일단 법이 제정되면 군신, 상하 모두 준수해야하고 사사로이 변경해서는 안된다. <관자管子>는 말하기를 "법이 통일되지 않으면 그 나라에 불길하다. 법은 불변하지 않으면 안된다. 법은 흥망성쇠를 좌우하는 근원이므로 성군聖君은 법을 대의大儀로써 사용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일은 법에 있는 것이 아니면 움직動일 수 없으므로 법은 현상세계天下의 도道이고 성군의 실용實用이다. 법은 생성되고, 법은 지켜지고, 법은 흘러간다. 군주는 법을 생성하고 신하는 법을 지키고 백성은 법에 따라 흘러간다. 군신君臣, 상하上下, 귀천貴賤 모두가 법을 따르는 것이 위대한 지배大治이다."라고 하였다. 군신, 상하, 귀천이 모두 법을 따르고 사사로룬 논쟁을 피하면 태평성세가 이루어진다. 이것이 법가法家의 포인트이다. 그럼, 사사로운 논쟁辯은 왜 일어나는가? 한비자는 말하기를 "군주가 현명하지 못하면 논쟁辯이 발생한다. 현명한 군주의 명령은 국가의 최고 권위이고 법은 최고의 준칙이다. 말에는 두 권위가 있을 수 없고 법에는 두 준칙이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언행이 법령으로부터 벗어나지 않도록 반드시 금지한다. 만약 법령이 없음에도 변화에 대처하여 일처리가 되었다면 위에서는 반드시 그 실책 또는 성과를 따져 물어야 한다. 그 말이 합당하면 큰 상을 내리고 부당하면 중죄를 내린다. 따라서 어리석은 자는 감히 말하려 하지 않을 것이므로 죄를 두려워하고 지혜로운 자는 쟁론하려 하지 않는다. 이것이 논쟁變이 생기지 않는 이유이다. 난세의 경우에 군주가 영令을 내려도 백성들은 그럴듯한 학설로 비판하고 관청은 법이 있어도 백성은 사사로이 보복한다. 그럼에도 군주는 자신의 법령을 희석시켜 학자들의 지혜와 행실을 존중한다. 이것이 세상에 학설이 판치는 이유이다. 선비儒의 복장을 하거나 검을 찬 자들은 많으나 농사와 전쟁에 종사하는 자는 적다. 견백堅白과 무후無厚의 논변은 창성하나 법은 효력이 없다. 그런즉, 군주가 현명하지 못하면 논쟁辯이 일어난다."고 하였다. 현명한 군주가 지배하는 중앙집권적 전제주의 하에서는 법이 언론과 모든 행동을 통제한다. 이것이 한비자의 포인트이다. 한편 진시황은 이사李斯의 보조를 받아서 중국을 통일하고 중앙집권적 전제군주국을 세웠다.


3. 정명론正名論

술術은 군주가 신하를 다루는 기술이다. 술術의 대표적인 예는 정명론正名論이다. <관자>는 말하기를 "명名이 바르게 되고 법이 완비되면 성인聖人은 더 할 일이 없다. 명名에 비추어 실實를 살피고 실實에 따라서 명名을 정한다. 명名과 실實은 상생하지만 상반되는 것이 현실이다. 명名과 실實이 합당하면 태평이고 명名과 실實이 합당하지 않으면 혼란이다."라고 하였다. 한비자는 말하기를 "도道를 쓰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명名이다. 명名을 바르게하여 사물을 정하니 명名이 기이하면 사물이 변질되므로 성인聖人은 적절하게 일치시킴으로써 명名으로 뜻이 세워지고 명名이 저절로 실현되도록 한다. 신하는 그 명名의 본색을 찿기위하여 최선을 다하고 능력에 맞게 임무가 주어지므로 그 임무는 잘 처리되고 신하는 스스로 합당한 실적을 바칠 것이다. 군주는 바르고 적절하게 법을 처리함으로써 모든 것이 스스로 자리를 찾도록 하니 군주는 명名에 따라 그것을 거론한다. 그 명名에 대하여 잘 모르면 그 형形을 살펴보고 그 형形과 명名이 합동하는지 살펴본다. 신하는 명名과 형形이 참된지 그 실정을 보고한다. 군주가 그 명名을 잡고 있으면 신하는 그 형形을 드러낸다. 형形과 명名이 합동하면 위아래가 모두 화합하게 된다. 군주가 신하의 간사한 행위를 금지하려면 말과 일을 통하여 그 명名과 형形이 부합한지 심리한다. 신하가 말로써 진언하면 군주는 신하의 말에 따라 일을 맡기고 그 일의 결과에 따라 공적을 주거나 책임을 지운다. 공적이 그 일에 합당한 결과라면 상을 주고 그 공적이 그 일에 합당하지 않고 그 일이 그 말에 합당한 것이 아니라면 벌준다. 따라서 군주는 신하가 큰 것을 말하였으나 공적이 적다면 벌준다. 공적이 적으므로 벌주는 것이 아니라 공적이 명名에 합당하지 않으므로 벌주는 것이다. 또 군주는 신하가 적은 것을 말하였으나 공적이 큰 경우에도 역시 벌준다. 큰 공적을 꺼린 때문이 아니라 명名에 합당하지 않으므로 그 해악이 큰 공적보다 심하므로 벌준다."고 하였다. 공자의 정명론正名論은 각자 사람들이 저마다 해야 할 것을 하게 하는 것이었다. 반면에 한비자의 정명론正名論은 군자가 신하를 다루는 술術로서 명名과 형形을 현실에서 일치시킴으로써 말과 일의 합일 여부에 따라 공적과 책무를 판단하여 상과 벌을 주는 기술이다.


4. 상벌賞罰

한비자에 따르면 법法과 술術은 없어서는 안 될 제왕의 도구이다. 그러나 법法과 술術만 있고 세勢가 없다면 군주능 신하을 제어할 수 없다. 군주는 세勢가 없으면 법法과 술術을 추진할 수 없다. 한비자는 말하기를 "재능이 있으나 세勢가 없으면 현명한 자도 어중이를 제압할 수 없다. 한 자 크기의 재목도 높은 산위에 세우면 천 길 낭떠러지를 굽어보는즉, 재목이 커서가 아니라 위치가  높기 때문이다. 걸桀이 천자로서 현상세계天下를 제압할 수 있었던 것은 현명했기 때문이 아니라 세勢가 무거웠기 때문이다. 요堯 임금이 필부일 때 제 집안도 다스릴 수 없었던 것은 어중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지위가 낮았기 때문이다. 천균千鈞의 물건도 배에 실리면 뜨지만 치수緇銖만큼 아주 가벼운 것도 배 밖으로 버려지면 가리앉는다. 천균이 가볍고 치수가 무겁기 때문이 아니라 세勢가 있고 없음에 달려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짧은 것이 높이 임하는 것은 위치 때문이듯이 어중이가 현자를 제압하는 것도 세勢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위세威勢는 군주의 근력筋力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한비자의 포인트이다. 위세는 밖으로 표출하여 상벌賞罰로 나타난다. 한비자는 말하기를 "현명한 군주가 신하를 제대로 제압할 수 있는 이유는 두 칼자루二柄 때문이다. 두 칼자루란 형刑과 덕德이다. 형刑이란 사형에 처하는 것이고 덕德이란 상을 내리는 것이다. 신하는 형벌을 두려워하고 상을 좋아하는 자이다. 따라서 군주가 형刑과 덕德을 잘 쓰기만 하면 신하들은 위엄을 두려워하고 상賞을 좋아하는 쪽으로 돌아간다."고 하였다. 현명한 군주는 자신의 위세를 이용하여 신하들로 하여금 형벌을 두려워하고 상賞을 좋아하도록 이끌어낸다. 한비자는 말하기를 "현상세계天下를 지배하려는 자는 반드시 인정人情에 따라야 한다. 인간의 감정人情이란 좋고 싫은 것이므로 상벌賞罰로 이용하여 금지와 명령을 세울 수 있으므로 지배의 도구이다. 군주가 칼자루를 쥐어잡고 처세함으로써 명령과 금지가 시행된다. 칼자루柄는 죽이기도 하고 살리리기도 한다. 세勢란 백성의 마음資을 얻는 것이다."라고 했다. 인심人心을 거스르면 장사라도 힘을 쓸 수 없고 인심을 얻으면 힘이 저절로 나온다. 이것이 한비자의 포인트이겠다.


5. 성악性惡

순자의 제자인 한비자와 더불어 순자를 떠받들고있는 법가法家에 따르면 인간의 본성은 악惡하다. 따라서 인간은 학습을 통하여 교화될 필요가 있다. 한비자에 따르면 현명한 군주는 상벌賞罰의 시행을 통하여 신하들을 교화할 수 있다. 한비자는 말하기를 "황제黃帝에 따르면 군신 상하는 하루에도 수백 번 전쟁상태이다. 신하는 속마음을 숨기고 군주를 시험하고 군주는 도량度量을 엄격히 하여 신하의 의도를 해부한다."고 하였다. 또 한비자는 말하기를 "경작자를 살 경우 주인이 비용을 들여 맛있는 음식을 마련하고 베를 골라 돈을 준비하는 것은 경작자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그래야 경작자가 밭을 깊이 갈고 정성껏 김매기 때문이다. 경작자가 열심히 김매고 밭갈고 밭두둑을 고치는 것은 주인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그래야 맛있는 반찬을 먹고 품삯도 넉넉하게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공력의 보상에는 부자지간 같은 은택이 존재한다. 마음을 쓰는 자는 한결같이 자신의 마음을 위한다. 따라서 인간은 이익이 된다 싶으면 적과도 화해하지만 손해가 된다 싶으면 부자간에도 돌아서고 원망한다."고 하였다. 한비자에 따르면 세상 사람들은 한결같이 이기적이고 자신만을 위하므로 군주는 상벌의 도道로써 자기 이익을 도모하도록 자유경쟁시키면서 신하와 백성들을 지배할 수 있다. 따라서 유가儒家가 주장하는 토지의 평등 분배를 반대하면서 오히려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것은 인간 행위의 기초라고 보았다. 한비자의 스승인 순자에 따르면 인간의 본성은 악하지만 군주는 백성들의 본성을 교화하여 도덕심을 심을 수 있다고 일갈하였다. 한비자는 말하기를 "요즘 학자들은 걸핏하면 빈궁한 자에게 토지를 분배하고 물질을 나누어 주자고 말한다. 그러나 모든 조건이 남과 똑같고 흉년인데도 살림이 넉넉한 이유는 노력하면서 검약하기 때문이다. 또 모든 조건이 남과 똑같고 기근, 질병, 재난, 형벌을 당하지 않았음에도 살림이 빈궁한 이유는 낭비 또는 나태하기 때문이다. 낭비하고 나태한 사람이 빈궁하게 되고, 노력하고 검약하는 사람이 부유하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럼에도 부자로부터 거두어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자는 말은 노력하고 검약한 자들로부터 빼앗아 낭비하고 나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자는 말이다. 그것을 좇는다면 백성들은 열심히 일하지도 않고 절약하지도 않을 것이다."고 하였다. 한비자에 따르면 인간은 자유경쟁 상태에서 노력하고 절약하면서 생산력을 증가시키게 된다. 논밭의 구획 경계를 없애서 토지국유제를 폐지하면 백성은 토지를 개간한 만큼 소유할 수 있게 되므로 생산력이 증가하는 방책일 수 있다고 보았다. 당시 보수적인 유가儒家 학자들은 토지사유제를 부정하면서 토지국유제로 돌아가고자 하였다. 그러나 빈궁한 자들에게 토지를 분배해주자는 말은 국가가 빈궁한 자에게 토지를 나누어주자는 것이다.

+ 역사발전
한비자는 말하기를 "옛날에는 산천초목의 열매가 풍성하고 금수의 털가죽이 풍족했으므로 남자와 여자는 힘들여 일하지 않았다. 재화는 넉넉하고 인구는 적었으므로 서로 다투지 않았다. 따라서 군주는 상벌로 지배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자식 다섯도 많다고 여기지 않으므로 할아버지는 죽기 전에 손자가 25명이나 된다. 인구는 많고 재화는 적으므로 열심히 일해도 살림은 궁박해졌으므로 백성들은 서로 투쟁한다. 군주는 상과 벌을 가중해도 문란을 피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요堯임금은 왕노릇하면서 풀로 지붕을 이었고 서까래는 다듬지 않은 채로 썼고 거친 밥과 콩잎 국을 먹었으며 겨울에는 사슴 가죽옷과 여름에는 갈옷을 입었다. 당시 문지기의 생계도 요堯임금보다 나았을 것이다. 또 우禹임금은 왕노릇하면서 몸소 쟁기와 가래를 들고 일했으므로 흰 살이 없어졌고 정강이 털이 자랄 겨를이 없었다. 전쟁노예도 우禹임금보다 더 힘들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천자天子의 자리를 선양한 것은 문지기와 노예의 삶을 벗어던진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지금, 현령이 되면 자손 대대로 마차를 몰 수 있으므로 현령 자리를 쉽게 물리치지 못한다. 천자天子 자리는 쉽게 물리쳐도 현령 자리는 그렇지 못한 이유는 박하고 후한 실속의 차이 때문이다. 무릇 산 속에 살면서 물을 길어다 먹는 자는 큰 제사가 있으면 물을 보내주었지만 강가에 살면서도 수해를 겪은 자는 품꾼을 고용하여 도랑을 판다. 또 빈궁한 봄에는 밥 한술도 동생에게 양보하지 않지만 풍성한 가을에는 나그네에게도 밥을 준다. 이것은 골육지친은 멀리하고 나그네를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다소의 형편의 차이 때문이다. 따라서 옛 사람이 관대했던 것은 어질어서가 아니라 재물이 풍족했기 때문이고 지금 사람이 쟁탈하는 것은 야비해서가 아니라 재물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옛날에 천자天子 자리를 쉽게 양보한 것은 인품이 고상해서가 아니라 권세가 미미했기 때문이요, 지금 비서 자리를 놓고 다투는 것은 인품이 저질이어서가 아니라 권세가 대단하기 때문이다. 군주는 다소多小와 박후薄厚를 따지면서 지배한다. 옛 군주는 자애로워서 그 형벌이 가벼웠던 것이 아니고 지금 군주가 혹독해서 형벌이 엄한 것이 아니다. 군주는 각 시대의 풍속에 맞추어 시행할 뿐이다."고 하였다. 인간의 행위는 환경의 영향을 받는 것이지 본성에 따른 것이 아니다  따라서 군주는 법과 형벌로써 지배해야 태평을 보장할 수 있으므로 맹자와 공자가 논한 덕德과 예禮를 통한 지배를 부정해야 한다"라고 일갈하였다. 이것이 한비자의 포인트이다.

+ 세勢, 법法, 술術
한비자는 말하기를 "엄한 집안에 사나운 종 없고 자애로운 어머니 밑에 패륜아 자란다. 따라서 위세威勢로써 흉포를 막을 수 있지 덕후德厚 따위로는 부족하다. 성인聖人지배자는 백성들이 선행善行하도록 독려하는 것이 아니라 비리를 저지르지 못하도록 힘쓴다. 진실로 선행한 자는 열 댓도 아니되나 비리를 저지르려는 자는 다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가 지배자는 소수에게 통하는 방식을 버리고 다수에게 통하는 방식을 택하므로 덕德에 힘쓰지 않고 법法에 힘쓴다. 현명한 군주는 상벌에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선행하는 백성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왜냐하면 국법은 홀대되지 않으면서 모든 백성을 감독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술術을 장악한 군주는 우연의 선善을 좇지 않고 필연의 도道를 행한다."고 하였다. 현명한 군주는 세勢, 법法, 술術에 따라 필연의 도道를 행하여 태평을 이룩한다. 이것이 한비자의 포인트이다.

6. 무위無爲

군주가 필연의 도道를 사용할 수 있다면 무위無爲하면서 지배할 수 있다. 한비자는 말하기를 "일은 사방에 있지만 중요한 것은 중앙에 있다. 성인聖人은 중요한 것을 잡고 있으므로 사방에서 찾아와 본받으려 한다. 성인이 마음을 비운채 대하면 신하들은 스스로 능력을 발휘한다. 성인은 오직 두가지를 바탕으로 중단없이 행하는데 이것이 리理의 실천이다. 모든 사물은 각자에게 맞는 일이 있으며 모든 재료는 적합한 쓰임이 있다. 모든 것이 마땅한 자리에 거하면 상하上下는 무위無爲한다. 닭으로 아침을 알리고 고양이로 쥐를 잡듯이 신하가 능력을 발휘하면 임금은 더 할 일이 없다. 만약 군주가 특정한 재능을 훌륭하게 여기면 업무가 바르게 진행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신하는 그것을 가지고 군주을 기만하기 때문이다. 군주가 논변과 총명을 좋아하면 신하는 바로 그런 재능을 이용한다. 이렇게 상하의 역할이 뒤바뀌면 국가의 지배가 아닌 것이다."고 하였다. 군주는 두 권병, 즉 상과 벌을 세우면 신하는 스스로 능력을 발휘한다. 닭이 새벽을 알리고 고양이가 쥐를 잡는 것은 자연의 도道이다. 한비자는 이 도道를 법法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군주는 도道를 법法으로 삼아서 닭이 새벽을 알리도록 하고 고양이가 쥐를 잡도록 하자는 것이다. 따라서 군주는 스스로 밤을 감독할 필요가 없고 또 쥐를 잡을 필요도 없게 된다. 이것으로 군주는 신하들의 능력을 사용하여 할 일이 없게 된다. 이것은 한비자가 노자老子의 '작위하지 않으나 이루지 않는 일이 없다.'는 명제를 개조한 것이다. 한비자는 노자老子의 철학을 개조하여 법가法家의 통치술과 결합시킨 것이다. 이것이 황로지학黃老之學이다. 한비자는 말하기를 "옛날에 완전한 대체大體를 안 사람은 현상세계天地의 산을 관찰하여 바다를 유추했다. 해와 달이 비추고 사계절이 운행하고 구름이 떠가고 바람이 부는 것과 마찬가지로 군주는 지혜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았고 이기심 때문에 괴로워하지도 않았다."라고 하였다.













<참고문헌>

풍유란.  박성규 역, 중국철학사